20세기 이야기

中 소설가 루쉰(魯迅), ‘아Q정전(阿Q正傳)’ 발표

↑ 루쉰(魯迅 노신)

 

비판적 지식인의 길을 오롯이 걸어간 선각자

루쉰(노신·1881~1936)은 비판적 지식인의 길을 오롯이 걸어간 선각자다. 그는 어떤 이데올로기와 사상에도 얽매이지 않고 어떤 대세와도 타협하지 않으며 언제나 자유롭게 회의하고 성역 없이 비판했다. 지식인은 물론 권력자나 지배자도 비판했으며 민중도 거침없는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공산당이라고 예외를 두지 않았고 1920년대 이래 중국을 휩쓴 민중주의에 대해서도 펜 끝을 겨눴다.

루신은 중국 절강성 소흥의 부잣집에서 태어나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모종의 사건으로 투옥되어 가문이 몰락하고 아버지마저 일찌감치 병사하면서 고생스러운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다. 그 과정에서 그가 깨우친 것은 떵떵거리며 살던 가문이 쇠락의 길로 들어서는 순간 친절하던 주변 사람들의 태도가 돌변한다는 사실이었다. 루쉰은 어려운 상황이 닥쳤을 때야말로 세상 사람들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청소년기에 가족제도를 지탱하고 있는 낡은 유교의 뒷면에 도사린 추악한 인간관계를 어렴풋하게나마 간파한 것이다.

루쉰은 1898년 고향을 떠나 난징에서 신식 교육을 받고 1902년 3월 국비 장학생으로 뽑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어 습득 과정을 거쳐 1904년 9월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 것은 서구 열강의 신학문인 의학을 익혀 중국 근대화의 일익을 담당하고자 했던 포부 때문이었다. 이런 그를 의사 지망생에서 문학가로 방향을 돌리게 한 것은 이른바 환등기(幻燈機) 사건이었다. 당시 세균학을 가르치는 일본인 교수는 학생들에게 수업 시간 사이사이 러일전쟁 관련 필름을 보여주곤 했다. 그중에는 한 중국인이 러시아군의 스파이 노릇을 했다는 죄목으로 일본군에게 끌려와 총구 앞에서 처형을 기다리는 장면도 있었다.

그때 루쉰의 눈에 들어온 것은 주위의 무표정한 중국인 구경꾼들의 모습이었다. 루쉰은 “중국인 몇 명의 육체를 고치는 것보다 정신 개혁이 훨씬 중요하다”며 “정신 개혁에는 문예가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의사 지망생에서 문학가로 인생 방향을 돌리기로 결정한 그날 밤, 루쉰은 온 산을 헤매고 다니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듯 노래를 불렀다. 결국 그는 국민의 의식이 깨이지 않는 한 의학 지식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메스 대신 펜을 들었다.

1906년 3월 센다이 전문학교를 그만두고 도쿄로 돌아가 독일어 학교에 적을 두었다. 문예평론과 구미 문학을 섭렵하고 틈나는 대로 러시아와 동유럽의 혁명 문학작품들을 번역해 중국 독자들에게 소개했다. 문학을 무기로 조국의 독립과 민중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삶이 시작된 것이다.

 

일관된 관심사는 민중(농민)의 계몽과 지식인의 역할

루쉰은 유학 생활 7년 만인 1909년 8월 귀국해 고향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1년 신해혁명 무렵에는 고향의 사범학당 교장에까지 올랐으나 혁명적 분위기가 점차 가시고 정권의 반동적 성격이 점차 뚜렷해지자 사직서를 제출하고 베이징으로 올라갔다. 그 무렵 중국은 제국주의와 봉건 잔재, 그리고 국내 파시즘의 발톱에 할퀴여 만신창이가 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루쉰의 일관된 관심사는 민중(농민)의 계몽과 지식인의 역할이었다. 그는 민중의 각성이야말로 중국이 변화할 수 있는 최대 관건이고 그러려면 지식인이 어떤 식으로든 일정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지식인을 성역으로 두지는 않아 지식인을 냉소하고 그들의 허위의식을 가차 없이 폭로했다. 민중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애(愛)와 증(憎)을 동시에 품었다. 문학을 통한 루쉰의 투쟁은 다양한 문학 장르로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무기의 성격을 지닌 것은 짧은 에세이 형식의 잡문이었다. 간결하면서도 날카롭게 정곡을 찌르는 그의 글은 적들에게는 눈엣가시였지만 동지들에게는 위로와 힘이 되었다.

루쉰은 1918년 5월 ‘주수인’이라는 본명 대신 ‘루쉰(魯迅)’이라는 필명으로 잡지 ‘신청년’에 단편소설 ‘광인일기’를 발표했다. ‘광인일기’에서 그는 유교로 엮인 중국의 봉건사회를 준엄하게 비판하며 중국인들에게 눈을 뜰 것을 촉구했다. ‘광인일기’는 구어체로 쓴 중국 최초의 근대 창작소설로, 근현대 중국의 혁명적 현실주의 문학의 초석을 놓았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아Q’는 현실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당시 중국인들의 모습

루쉰은 1921년 ‘파인(巴人)’이라는 필명으로 중편소설 ‘아Q정전(阿Q正傳)’을 발표했다. ‘아Q정전’은 1921년 12월 4일부터 1922년 2월 12일까지 주 1회 또는 격주로 ‘신보 부간’지에 연재되었다. 루쉰은 ‘아Q정전’을 통해 신해혁명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고발했다. 그는 신해혁명이 정치적으로는 공화제를 가져다주었지만 인민들의 의식에는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주인공 ‘아Q’는 신해혁명 시기 중국 어느 농촌의 날품팔이 인생으로, 중국 민중의 전형적 유형이었다. 자신의 현실을 똑바로 보지 못한 채 항상 스스로를 속이며 현실을 호도하는 아Q의 모습은 당시 중국인들의 모습이기도 했다. 타인의 불행을 동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자양분 삼아 살아가는 중국인, 그가 바로 아Q였다. 아Q는 자존심이 강했으나 강자 앞에서는 무력해 약자를 욕망의 배출구로 삼았다. 강자에게 모욕을 당해도 저항할 줄 모르는 아Q는 바로 서세동점의 와중에서 자존심만 비대했던 청과 중국 민족을 가리켰다. 루쉰이 일본 유학 시절 환등기를 통해 보았던 구경꾼들, 즉 처형을 앞둔 동족을 무표정하게 보고만 있던 사람들이기도 했다.

루쉰은 이름도 성도 뚜렷한 직업도 없는 날품팔이 노동자 아Q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자기만족에 젖어 있는 중국인들을 끝없이 힐책했다. ‘아Q정전’은 관료와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소설은 혁명적 민중상이 아니라 비굴한 민중의 얼굴을 그렸지만 그 인물의 비극적 생애가 곧 중국 민중의 보편적 현실을 반영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광인일기’와 ‘아기원설정전’에서 보듯 루쉰은 세상에 초연한 문필가가 아니었다. 문인이기에 앞서 ‘싸움닭’이었고 ‘전사’였다. 그가 글 속에서 드러내놓고 욕을 퍼부은 사람만 100명이 넘는다. 1930년대 중국좌익작가연맹에 참여한 루쉰은 당시 국민당 정권을 비판하고 항일 문예운동에 앞장섰지만 연맹 내부의 독선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루쉰의 작품은 모택동식 혁명에도 필수적이었으나 역으로 모택동의 혁명을 부정하고 극복하는 데도 유용하게 적용되었다. 루쉰은 위협 때문에 신문·잡지에 글을 발표할 때마다 이름을 바꿨다. 그렇게 등장한 필명이 140개를 넘었다.

루쉰은 어설픈 관용과 화해를 원치 않고 끝까지 비판적 자유인으로 살다가 1936년 10월 10일 지병으로 일찍 세상을 떴다. 유언장에는 이렇게 썼다. “나의 적은 상당히 많다…. 멋대로 원망하도록 하라. 나 역시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겠다.” 루쉰은 조선 지식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루쉰이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은 시인 이육사는 1936년 10월 조선일보 학예면에 장장 닷새에 걸쳐 ‘루쉰 추도문’을 연재했다. 루쉰은 사후 민족주의자로 인식되고 모택동의 공산당 정권이 수립된 후에는 사회주의자로 받들어졌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비판을 받은 공자와 달리 선양되었다. 그러나 그는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복무한 적이 없고 교조주의적 혁명문학에 반대했던 사람이다. 영원한 비판자, 영원한 회의자, 영원한 자유인 그것이 루쉰의 참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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