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남아공의 크리스티안 바너드 세계 최초 심장이식 수술 성공

↑ 크리스티안 바너드

 

몇 겹의 장벽이 사람의 심장이식 수술을 가로막아

신체의 일부를 다른 사람에게 옮기는 ‘이식기술’은 1905년 각막이식과 1908년 관절이식 등의 성공으로 눈에 띄게 발전했지만 생명과 직접 연관이 있는 ‘장기이식’은 20세기 중엽에 와서야 비로소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1954년 12월 23일 일란성 쌍둥이 형제 간의 신장이식 수술이 미국 보스턴에서 세계 최초로 성공하고, 1960년 개의 심장이식이 성공함으로써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전 세계 환자들을 흥분시켰다. 그러나 사람의 심장이식 수술만은 몇 겹의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첫 번째 장벽은 수술시간이었다. 수술시간이 4분이 넘으면 정상적인 혈액순환이 이뤄지지 않아 뇌에 손상을 주기 때문이다. 이 장벽을 처음 허문 사람은 쓸 만한 심폐기를 최초로 개발한 미국의 존 기번이다. 그는 1952년 심폐기를 이용하여 심장에 구멍이 있는 생후 15개월 된 아기를 수술했다. 아기는 수술 도중 사망했지만 기번은 좌절하지 않고 1년 뒤인 1953년 5월 심폐기로 생명을 27분 동안 유지토록 한 뒤 심장 질환을 치료하는데 성공했다.

그 다음 넘어야 할 장벽은 심장이식에 따른 거부반응이었다. 이에 대한 연구도 세계 각국에서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1950년대 초 ‘코르티손’이 면역체계를 억제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1959년 강력한 면역억제제 ‘아자티오프린’이 새롭게 개발되었다. 같은 해에 ‘6-메르캅토푸린’을 매일 투약하면 토끼의 면역체계를 억제할 수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마지막 장벽은 심장 제공자였다. 특히 미국은 ‘장기이식의 메카’이면서도 뇌사 판정기준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심장 제공자를 확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미국에서 심장 제공자를 찾느라 심장이식 수술이 늦어지고 있을 때, 남아공의 케이프타운에서도 크리스티안 바너드(1923~2001)가 심장이식 수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바너드는 케이프타운대 의과대를 졸업하고 미국 미네소타대에서 박사학위와 외과의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남아공으로 돌아와 케이프타운대의 외과연구부장으로 근무했다. 그러다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300여 차례의 동물실험에 참여해 심장이식술을 터득한 후 다시 남아공으로 돌아와 1964년 남아공 케이프타운의 그루트슈르병원에 이식팀을 조직했다. 이식팀은 수년 동안 48차례의 동물 심장이식수술을 통해 이식기법을 갈고 닦았다. 그러는 동안 세계 각국에서는 1963년 간장이식과 폐이식, 1966년 췌장이식이 각각 성공했다.

 

환자 曰 “이제 나는 프랑켄슈타인이 되었군”

1967년 10월 바너드는 신장이식이 성공을 거두자 심장이식을 시도하기로 했다. 바너드는 당뇨병, 관상동맥질환, 울혈성심부전을 앓으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55세 남성 루이스 와슈칸스키를 심장이식 대상으로 정하고 심장 제공자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1967년 12월 2일, 24세 여성 데니스 다발이 교통사고로 뇌사상태에 빠져 병원으로 실려왔다. 다발의 가족이 장기이식에 동의했으나 다발의 심장 박동은 1967년 12월 3일 새벽 2시 32분에 멈추고 말았다.

다급해진 수술팀은 부랴부랴 오전 3시 1분 다발의 심장을 떼어내 금속 쟁반에 담았다. 뒤이어 아직 살아 있는 와슈칸스키의 심장을 가슴에서 잘라낸 뒤 그 자리에 심폐기를 통해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다발의 심장을 이식했다. 봉합까지 끝냈는데도 심장이 뛰지 않아 수술팀을 긴장시켰다. 하지만 심장 박동을 촉진하기 위해 전기충격을 가하고 나서야 새 심장이 꿈틀거리며 혈액을 펌프질했다. 마취에서 깨어나 간호사에게 “이제 나는 프랑켄슈타인이 되었군”이라고 말한 워시칸스키는 이틀 만에 식사를 하고 다시 열흘 후 병상에서 일어나 걸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수술은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기존의 신체 조직이 남의 조직을 거부하는 이식 거부반응 때문에 폐렴이 발생, 와슈칸스키는 결국 18일 동안만 살다 12월 21일 오전 6시 50분에 사망했다.

수술 성공 소식은 전 세계로 타전되었다. “토요일에는 남아프리카의 이름 없는 외과의사였지만 월요일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져 있었다”는 자신의 말처럼 바너드는 곧 유명인사가 되었다. 미국의 TV에 출연하고 타임지 표지를 장식했으며 린든 존슨 미 대통령의 목장에 초대되었다. 첫 수술 한 달 후인 1968년 1월 2일, 바너드는 58세의 전직 치과의사를 대상으로 두 번째 심장이식 수술을 성공시켰다. 이번에는 환자가 18개월 동안 생존했다.

 

‘아프리카 10대 위인’에 올라

바너드가 세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동안 경험과 능력면에서 저만치 앞서있던 미국의 의료진들은 당혹감과 씁쓸한 기분에 휩싸였다. 심장이식 1호의 주인공은 당연히 미국 스탠퍼드대 노먼 셤웨이 교수일 것이라고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셤웨이는 1958년부터 개를 이용한 실험을 통해 심장이식의 외과적 요법을 완성한 심장이식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칼잡이’였다. 그는 1960년 자신이 세계 최초로 심장이식 실험을 한 개가 1년 동안이나 생존한 것에 자신감을 갖고 개보다 쉬운 것으로 알려진 사람의 심장이식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최초가 되지 못한 것은 미국에서 뇌사 판정기준이 정해지지 않아 심장 제공자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셤웨이는 바너드보다 약간 늦은 1968년 1월 6일 미국 최초로 심장이식에 성공했다. 바너드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미국은 대학과 주(州)가 독자적으로 뇌사 판정기준을 정한 뒤 심장이식에 박차를 가했다. 1968년에는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봇물 터지듯 심장이식이 유행했다. 그런데 1969년부터는 심장이식 수술이 거의 이뤄지지 않아 열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거부반응 때문에 생존율이 좀처럼 높아지지 않는 데다 소송이 잇따른 게 원인이었다. 거부반응은 효과적인 면역억제제를 개발하지 않는 한 해결이 무망했다.

다행히 1980년대 들어 ‘사이클로스포린’이란 면역억제제가 개발되고 수술기법도 향상된 덕에 성공률이 획기적으로 높아졌다. 심장이식 수술은 다시 활기를 띠었다. 성공과 실패를 구분하는 ‘1년간 생존율’은 초기의 10~20%에서 80~90%로 높아졌다. 바너드는 2000년 아프리카인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대(大) 피라미드의 주인공 파라오 쿠푸, 시바 여왕, 클레오파트라 등과 함께 ‘아프리카 10대 위인’에 올랐다. 우리나라 첫 심장이식 수술은 1992년 11월 11일 확장성심근염을 앓아 생명이 위태로워진 48세 주부를 상대로 울산대 의대 송명근 교수에 의해 이뤄졌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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