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폴란드 유대인들, 바르샤바 게토 봉기… 독일군, 게토 초토화하고 닥치는 대로 학살

↑ 바르샤바 게토에서 체포된 유대인들

 

by 김지지

 

2023년 4월 19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게토 봉기 80년 추모 행사에 참석한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이 검은 양복 재킷에 유대인을 상징하는 ‘다윗의 별’ 모양 수선화 장식을 달고 단상에 올라 “독일인의 역사적 책임에는 끝이 없다”며 “독일인들이 이곳에서 행한 끔찍한 범죄에 깊은 수치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독일 국가원수가 바르샤바 게토 봉기 추모식에 참석해 연설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바르샤바 게토 봉기는 1943년 4월 19일 게토 주민들이 강제수용소 이송에 저항해 무장봉기를 일으킨 사건이다.

 

게토 유대인들, 저항과 투쟁보다는 청원과 호소에 치중

유대인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지역을 일컫는 ‘게토’가 처음 설치된 곳은 1516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였다. 이때 이후 유럽 내 모든 나라의 유대인 거주 지역을 ‘게토’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게토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히틀러가 집권한 1930년대였다. 나치 독일은 1939년 2차대전을 일으켜 폴란드를 점령한 뒤 유대인을 격리·수용하기 위해 도시에서 가장 낙후한 빈민 지역에 게토를 설치했다.

최초 게토는 1939년 10월 폴란드의 피오트르쿠프 지역에 설치되었다. 두 번째 게토는 폴란드의 공업도시 우지에 세워졌다. 바르샤바에 세워진 게토는 규모가 가장 컸다. 주위에는 3m 높이의 콘크리트벽과 철조망을 세워 유대인의 자유로운 출입을 가로막았다. 거주 공간에 비해 너무 많은 사람을 수용하고 위생 시설까지 엉망이어서 전염병이 창궐했다. 나치는 이런 현실을 악용해 게토 입구마다 ‘출입 금지! 전염병 조심!’이라는 큰 글씨의 팻말을 붙여놓고 게토 바깥의 비유대인들에게 “유대인들로부터 당신을 지키기 위해 게토를 만들었다”고 거짓 선전을 했다.

1941년 중반까지 게토는 유럽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을 한데 모아 비유대인들과 격리하는 섬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1942년 이후 게토의 성격은 확연히 바뀌었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가스실이 설치되고 폴란드 동부 지역 곳곳에 유대인을 절멸하기 위한 수용소가 설치된 후 게토는 그곳으로 강제 이송되기 직전 유대인들이 머물던 중간역이자 학살 대기소가 되었다.

1940년 4월부터 외부와 차단된 우지 게토에는 원래부터 이 구역 안에 살고 있는 6만여 명을 포함해 모두 16만여 명의 유대인이 수용되었다. 1940년 11월에 세워진, 규모가 가장 큰 바르샤바 게토에는 바르샤바 면적의 2.4%에 불과한 4㎢의 공간에 바르샤바 인구의 30%나 되는 50만 명의 유대인이 수용되었다. 식사량은 독일인 평균의 10분의 1에도 못 미쳐 굶주림이 다반사였고 집집마다 15명씩이나 거주해 위생 상태도 최악이었다. 1942년 7월까지 12만 명이 기아와 질병(특히 장티푸스) 등으로 숨져 거리는 시체들로 넘쳐났다.

게토 봉기 중, 벙커에 숨어있다가 체포된 유대인 여성과 아이들

 

가스실로 강제 이송되기 전 머물던 학살 대기소

바르샤바 게토에 수용되어 있던 유대인들의 강제 이주가 시작된 것은 1942년 7월 22일이었다. 목적지는 죽음의 절멸수용소 트레블링카였으나 나치는 휴양소로 보낸다고 선전했다. 영문도 모른 채 그해 9월 12일까지 50여 일 동안 트레블링카로 보내진 약 30만 명의 유대인은 수용소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았다. 죽음에 이르기 전 게토 내 유대인들은 저항과 투쟁이 아니라 청원과 호소라는 소극적 방식으로 살길을 모색했다. 유대인들이 이런 오판을 하게 된 배경에는 2,000년 동안 유대인 특유의 ‘디아스포라(이산)’를 겪으면서 터득한 허황된 희망 때문이었다. 나라 없는 삶을 살아오는 동안 유대인들은 언제나 소수였고 그렇기 때문에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압도적인 군사력을 갖고 있는 적에게 무력으로 대항하는 것도 민족 전체의 멸망을 초래할 뿐이라는 경험도 작용해 그들은 실낱같은 희망에 집착했다.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게토 지도자들은 복종을 통한 생존을 제1의 지침으로 삼았고 대중도 이 가르침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절멸수용소에 관한 흉흉한 소식이 들려와도 확증이 없으면 인정하지 않았다. 여기에 나치의 기만과 속임수도 크게 작용했다. 유대인들은 게토행 기차를 타기 전에는 ‘등록’과 ‘이주’라는 말로 기만당했고 가스실로 내몰린 삶의 마지막 순간에는 ‘목욕’이라는 말에 속았다. 게토 내 유대인 지도자들은 1943년에야 자신들이 겪고 있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근대적 절멸 과정이 수백 년 전에 자기 조상들이 겪었던 크고 작은 학살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대인이 저항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장 투쟁의 규모는 작았고 횟수도 적었다. 범위도 국지적이었고 시기적으로도 절멸 과정의 후반에 등장했다. 무장 게토 봉기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르샤바 게토봉기였다. 바르샤바 게토에서 저항운동 조직이 생겨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가장 큰 이유는 게토 주민들 스스로 자신이 죽을 운명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 당당히 맞서다 죽겠다며 결사항전 선택

바르샤바 게토 내 유대인의 강제 이송이 시작된 것은 1942년 7월이었다. 그해 9월까지 트래블링카 절멸수용소로 강제 이송된 사람은 30만 명에 달했다. 게토에서도 많은 사람이 죽다 보니 1942년 11월 현재 게토 안에 남은 사람은 6만 명 전후를 헤아렸다. 남아 있는 청년들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것을 알고 ‘유대인 전투조직’을 결성해 사즉생의 투쟁을 다짐했다. 1943년 1월 18일 게토 경비대원들이 유대인을 또다시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로 강제 이송하기 위해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워 게토 안으로 들어왔다. 청년들은 기습 공격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시가전은 ‘유대인 전투조직’의 일방적 패배로 끝났다.

‘유대인 전투 조직’은 다시 조직을 확대하고 무기를 확보해 다음 진입에 대비했다. 당시 경비대는 3,000명 이상의 병력에 야포와 탱크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전투는 기원전 13세기 유대인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 하루 전인 4월 19일 새벽 6시에 재개되었다. 경비대원들은 유대인 전투 조직의 수류탄과 화염병 기습을 받아 탱크 1대가 불길에 휩싸이자 후퇴했다. 이후 밤에는 유대인들이 독일군을 기습했고 낮에는 독일군이 유대인 밀고자들을 앞세워 지하 은신처를 수색하는 방식으로 전투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5월 8일 유대인 전투조직 지휘부의 은신처가 발각되자 지도부는 자결하거나 살해되었다. 하수구를 통해 도망간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폴란드인의 밀고로 살해되었고 일부만이 탈출하는 데 성공해 후일 당시의 참상을 증언했다.

독일군이 게토 내 건물들에 불을 지르고 있다.

 

독일군은 4주 동안 화염방사기 등으로 게토를 초토화하면서 유대인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봉기 진압 과정에서 6000명이 타 죽거나 질식사한 것을 비롯, 그 직후에 죽은 사람을 포함하면 1만 5,000여 명에 달했다. 절멸수용소로 강제 이송된 사람은 5만 명이 넘었다. 독일 측이 입은 손실은 사망 16명과 부상 85명에 불과하다는 독일군 측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만 피해가 크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했다. 5월 16일 현장 지휘관이 하인리히 힘러 친위대 사령관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저녁 8시 15분 상황 종료. 체포되거나 학살된 유대인은 5만 6,065명. 바르샤바 게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전후 유럽 역사에서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갖는 의미는 특별하다. 폴란드와 전 세계 유대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비극이었지만, 이 사건이 과거 역사를 독일이 직면하고 과오를 인정하는 출발점이 됐기 때문이다. 1970년 12월 7일 폴란드를 방문한 빌리 브란트 당시 서독 총리가 바르샤바 게토 자리에 세워진 위령탑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독일 정치인들은 거의 매년 바르샤바를 찾아 희생자를 기리고 사과의 메시지를 발표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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