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50년 10월 15일, 태평양의 웨이크 섬에서 만난 트루먼 대통령(왼쪽)과 맥아더
20세기 아시아 역사에서 맥아더만큼 중심에 선 외국인은 없어
더글러스 맥아더(1880~1964)는 미국의 수많은 군인 중에서도 최고 엘리트였고 각종 최연소 기록의 주인공이었다. 개교 이래 웨스트포인트를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필리핀 점령군 사령관을 지낸 아버지 아서 맥아더의 후광까지 더해져 사단장, 웨스트포인트 교장, 육군 참모총장이 될 때마다 최연소 기록을 갈아치웠다. 미 최고 훈장인 은성무공훈장을 7차례나 받았으며 미 육군 역사상 4명밖에 없는 5성 장군의 영예까지 안은 당대 최고의 군인이었다.
이런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군사전략가로는 실패한 군인”, “오만과 허풍, 현란한 언사로 일관한 정치군인”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1944년 10월 필리핀 레이테섬 상륙작전 때 바닷물에 바짓가랑이를 적시며 상륙하는 사진도 사실은 맥아더의 섬세한 연출 장면이었던 것처럼 맥아더의 진짜 탁월한 능력은 패배마저 승리로 포장할 줄 아는 홍보 능력이라고 빈정대는 목소리도 그런 비판 중의 하나다. 6·25 때 중공군의 개입을 예상하지 못해 미군이 막대한 피해를 보게 되었다는 비판도 반 맥아더 측의 단골 메뉴다. 그러나 공과가 어떻든 20세기 아시아 역사를 장식한 여러 외국인 가운데 맥아더만큼 비중 있고 중심에 선 인물은 없었다.
맥아더와 아시아의 첫 인연은 필리핀에서 시작되었다. 현역에서 은퇴한 뒤 필리핀의 군사고문으로 있을 때 태평양전쟁이 터져 태평양지역 사령관으로 복귀한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필리핀을 방어하지 못해 명성보다는 오명을 얻었다. 그런데도 1945년 8월 종전 후 일본의 2,000년 가까운 역사에서 유일한 외국인 통치자가 되었다. 민주당 소속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지만 종전 후 공화당의 협조를 얻어야 하는 정치적 필요성 때문에 태평양전쟁의 조연이면서도 국민에게 인기가 많은 맥아더를 주연 격인 일본 점령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945년 9월 일본으로부터 항복문서를 받아내는 장면만으로도 맥아더는 태평양전쟁의 영웅 대접을 받았다.
트루먼은 5년 후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맥아더를 유엔군 총사령관에 임명하는 것을 꺼렸으나 맥아더가 한국과 가까운 일본에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로 인해 6·25전쟁은 맥아더와 중국 간의 전쟁이라는 새로운 성격이 추가되었다. 전쟁 발발 후인 1950년 6월 2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유엔 회원국들에게 북한의 무력공격을 격퇴하고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권고문을 채택함으로써 미국의 군사조치를 공식적으로 승인하고 7월 7일 안전보장이사회가 미국에 최고지휘권을 위임하는 결의를 채택함으로써 맥아더가 유엔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맥아더는 한국에 파견된 16개국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유엔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을 때 맥아더의 가슴 속에는 2년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선거에 대한 꿈이 꿈틀거렸다. 맥아더는 2년 전 공화당 대통령 예비선거에 명함을 내밀었다가 겨우 11명의 선거인단만을 확보하고 꿈을 접어야 했다.
“승리 외에 다른 것은 없다”며 38선 북진 명령 내려
1950년 9월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계기로 유엔군의 우세가 점쳐졌을 때 트루먼은 “38선 이북을 넘지 말고 전전(戰前)의 상태를 회복하면 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맥아더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의 여세를 몰아 38선을 넘어 한반도 끝까지 진격하길 원했다. 그의 결정에 따라 10월 1일 국군이 동부전선의 38선을 돌파한 뒤 빠른 속도로 북진을 시작하고, 맥아더의 미 8군 역시 10월 9일 서부전선의 38선을 넘어 북진에 나섰다. 하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소련과 중국의 개입을 우려해 10월 15일 태평양상의 웨이크섬에서 맥아더를 만나 의견을 조율했다. 맥아더는 트루먼에게 “전쟁은 이긴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중공군이 참전하더라도 5만~6만 명에 불과하고 공군도 없다”며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양자 회담 후인 10월 19일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 파죽지세로 남하하고 결국 1951년 1월 초 서울까지 중공군에 내주는 등 전황이 급변하면서 맥아더와 트루먼 사이에 내연하던 갈등이 폭발했다.
맥아더는 여전히 중국과의 대대적인 한판을 꿈꾸며 확전을 요구한 반면 트루먼은 3차대전으로 확전될지도 모르는 위험한 도박을 꺼렸다. 다행히 1951년 1·4후퇴에 밀리던 유엔군이 3월 중순 다시 서울을 탈환하고 또다시 38선 이북으로 공산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트루먼은 전쟁 전 상태를 회복한다는 당초의 전쟁 목표가 달성된 것으로 보고 3월 20일 사실상 휴전 의사를 밝힌 성명서를 유럽 동맹국에 전달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3월 24일 이른바 ‘도쿄 대반란’으로 트루먼의 평화 협상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 “승리 외에 다른 것은 없다”며 공개적으로 38선 북진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 무렵 트루먼을 정말 진노하게 하는 일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도쿄 대반란이 있기 전인 1951년 2월 12일 공화당 하원의원 조지프 마틴이 “대통령은 전쟁에서 승리하겠다는 목표도 없이 수많은 미국의 젊은 군인을 죽인 살인자”라는 연설을 한 후 맥아더에게 의견을 묻는 서한을 보냈는데 맥아더가 소신대로 보낸 답신이 4월 5일 공개된 것이다. 맥아더는 서신에서 트루먼 행정부의 6·25전쟁 정책을 비판했다. 이는 대통령에 대한 명백하고도 공개적인 도전이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결국 트루먼이 4월 11일 맥아더의 해임을 발표했다. 명예로운 은퇴의 기회조차 주기 싫어 자진사퇴가 아닌 파면 형식의 해임이었다. 그러나 미국인들에게 맥아더는 영원한 전쟁 영웅이었다. 트루먼의 백악관 우편실에 항의 편지가 쇄도하고 갤럽 여론조사는 69%가 맥아더를 지지했다. 하지만 이미 해임된 맥아더는 그를 진정으로 사랑한 일본 국민들과 공식적인 작별 인사도 없이 연도에 선 25만 명의 환영을 받으며 4월 16일 일본을 떠났다.
맥아더와 트루먼의 전쟁 2라운드는 미국에서 펼쳐졌다. 4월 19일 미 상하양원합동회의에서 행한 고별연설로 맥아더는 다시 한번 전 미국인을 사로잡았다. 34분에 걸친 연설에 의원들은 30회의 박수로 화답했다. “금세기로 넘어오기 전 제가 군문에 들어섰을 때…그 병영에서 가장 즐겨 부르던 군가의 후렴 구절을 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그 노래의 노병처럼, 저는 이제 군인의 삶을 마감하고 다만 사라져갈 뿐입니다.”라는 내용의 연설을 마치고 통로를 지날 때 한 하원의원은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 들은 것은 직접 현신하신 하나님의 육성”이라고 외쳤다. 뉴욕의 환영 퍼레이드에는 750만 명의 인파가 몰려들어 떠나는 영웅에게 아낌없는 갈채를 보냈다.
맥아더는 1951년 내내 전국을 순회하며 대중을 상대로 연설을 했다. 사실상 트루먼에 대한 정치적 공격이자 1년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 예비선거를 의식한 연설이었다. 그는 “트루먼이 공산주의를 분쇄할 만한 아무런 전략도 갖지 못한 채 수많은 미군을 죽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던 분위기 덕에 맥아더는 공산주의와 결연히 맞서 싸우다 희생된 영웅으로 부각되었다. 정치인들은 유행처럼 트루먼에게 욕설을 퍼부어댔다.
그러나 5월의 상원 청문회를 통해 맥아더의 일부 전략적 오류들이 드러났는데도 자신의 실수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고집불통으로 인식되고 이에 실망한 여론이 서서히 등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맥아더의 인기가 차츰 시들해졌다. 여기에 2차대전의 영웅 아이젠하워 장군의 대통령선거 출마로 맥아더의 입지도 좁아졌다. 결국 72세의 노병은 자신의 시대가 지나가고 있음을 받아들여야 했고 영웅은 그렇게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