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

↑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의 첫 보도(경향신문 1966년 9월 15일자 3면)

 

한일 간 경제유착의 어두운 면을 드러낸 첫 번째 사건

1966년 9월 15일자 경향신문 사회면에 ‘또 재벌 밀수’라는 큼지막한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기사만 아니었으면 조용히 묻혔을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의 실상이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기사는 5개월 전 삼성그룹의 자회사인 한국비료가 사카린을 밀수했는데 부산세관이 이를 적발하고도 벌금만 물린 채 유야무야했다는 특종보도였다. 한국비료는 요소비료 단일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인 연산 36만t을 목표로 1965년 12월부터 울산에 공장을 짓는 중이었다. 당시 공사 진척도는 80% 정도였다. 사카린은 설탕이 귀하던 시절 식료품을 만드는 중요한 공업용 재료로, 4배 정도의 차익이 예상되는 당시로서는 썩 괜찮은 밀수품목이었다. 그러나 당시 밀수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까지 만들어 밀수범에게 최고 사형을 선고할 만큼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밀수를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국민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문제가 커질 것 같자 9월 16일 재무부가 진화에 나섰다. 재무부는 “5월 5일 한국비료가 건설자재를 가장해 사카린 원료인 OTSA 2400부대(3000만 원 상당)를 울산항으로 몰래 들여와 5월 19일 1430부대를 부산의 금북화학에 매각하려다 적발되어 부산세관이 2230만 원의 벌금 및 추징금을 부과하고 OTSA 전량을 압수했다”며 “몇몇 직원의 잘못이지 한국비료의 경영진과는 상관없는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언론이 계속 의혹을 제기하고 국회도 관련 장관을 불러 추궁할 방침을 세우자 9월 19일 박정희 대통령이 나서 ‘원점 재수사’를 지시했다.

당시 언론들이 계속 의혹을 제기하는데도 유독 삼성그룹 소유의 중앙일보와 동양방송만 “한국비료 직원 몇 명이 개인적으로 저지른 범죄에 불과하고 그에 따른 벌금형 처벌을 받았기 때문에 다시 수사하는 것은 ‘일사부재리’ 원칙에 어긋난다”는 삼성 측의 해명논리를 쏟아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왜곡보도가 심각하다며 재벌의 언론 소유 금지방안을 마련하라고 9월 21일 강도 높은 지시를 내렸다.

 

언론은 “꿩 대신 닭 잡는 격”이라고 비판

그러자 자칫 1년 전 힘들게 창간하고 개국한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을 엄습했다. 결국 이 회장은 9월 22일 “건설 중인 한국비료를 국가에 바치고 모든 사업 활동에서 손을 떼겠다”는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했다. 여론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려는 포석이었으나 언론은 ‘상투적인 제스처’라는 반응을 보였고, 정부는 “한국비료 준공 후 헌납받겠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 회장의 사과성명이 있던 그날, 풍운아 김두한 의원이 국민을 대신해 분노를 터뜨렸다. 국회에서 대정부 질문을 하던 중 국무위원석을 향해 똥물을 뿌린 것이다.

검찰이 9월 24일 한국비료 상무 이창희(이병철 회장의 차남)와 이일섭을 구속했으나 언론은 검찰이 짜맞추기식 수사를 하고 있다며 비판의 날을 거두지 않았다. 10월 6일 검찰이 최종 수사 결과를 발표했을 때도 언론은 이창희·이일섭 두 상무와 금북화학 간부 등 7명만을 기소하고 부산세관과 이병철 회장은 무혐의 처리한 것에 대해 실망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야당은 “국민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며 비난수위를 높였고, 언론은 “꿩 대신 닭 잡는 격”, “이병철씨 무혐의는 모순 당착”이라며 “수사가 아니라 수습”이라고 비판했다. 그래도 검찰 발표에 따라 사건은 진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5·16 후 밀월관계를 유지해오던 박 대통령과 이 회장 간에는 회복할 수 없는 균열과 불화가 자리를 잡았다. 정치권에 실망한 이 회장은 이때 이후 평생을 정치권과 ‘불가근 불가원’의 관계를 유지했다.

한국비료는 1967년 4월 20일 준공되었다. 그런데 이 회장이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말한 적이 없다”며 소유권 이전을 거부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자 중앙정보부가 나서 회사 간부와 큰아들 이맹희를 불러 회유하고 협박했다. 그때서야 이 회장은 고집을 접고 10월 11일 한국비료 주식 51%를 국가에 헌납했다. 1심(1967.3)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은 이창희·이일섭은 항소심(1968.1)의 집행유예 선고에 이어 대법원 상고심(1969.8)에서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아 재판 역시 용두사미로 끝이 났다.

 

박정희·이병철의 합작 주장도 있어

밀수사건은 지금까지도 두 가지 문제로 논란을 빚고 있다. “모든 언론이 갑작스럽게 성장한 중앙일보를 시기해 사건을 키웠다”고 이병철 회장이 언급했고, “박정희 대통령이 이병철 회장과 함께 밀수할 것을 합의해놓고도 사건이 들통 나자 도마뱀 꼬리 자르 듯 삼성을 팽했다”고 이 회장의 장남 이맹희가 1993년의 회고록에서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 회장 말대로 중앙일보는 창간 초기부터 삼성으로부터 엄청난 물량공세 지원을 받으며 성장해 다른 신문사를 위협하는 수준으로까지 발전했다. 모든 언론이 장장 45일 동안 삼성에 대해 융단폭격을 가한 것도 이 때문이라는 게 이 회장의 주장이다.

이맹희는 회고록에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일본의 미쓰이사(社)가 한국비료 공장 건설에 필요한 차관 4200만 달러(실제로는 4390만 달러)를 기계류로 대신 공급하며 삼성에 리베이트로 100만 달러를 주었으나 불법적인 돈을 국내로 반입하기가 어려웠던 이 회장이 이 사실을 박 대통령에게 알렸고, 정치자금이 필요한 박 대통령과 공장 건설용 장비가 필요한 이 회장이 돈을 부풀리기 위해 밀수 쪽으로 합의해 나와 이창희·이일섭 등이 밀수를 지휘했다.“ 이맹희는 그러나 밀수 사실을 알게 된 공화당의 한 실력자가 삼성에 정치자금을 요구했을 때 삼성이 이를 거절하자 그가 이 사실을 언론에 폭로했다고 주장했다.

이병철 회장과 이맹희의 주장이 정황상 일리는 있다. 그렇더라도 한국 최대 기업이 밀수를 했다는 사실만은 어떤 경우든 용납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 삼성은 1994년 민영화 공개입찰을 통해 한국비료를 되찾았다. 사카린 밀수사건은 그 자체가 삼성그룹의 어두운 보고서였고, 한일 간 경제유착의 어두운 면을 드러낸 첫 번째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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