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김좌진, 만주 독립운동단체 ‘북로군정서’ 총사령관으로 활약

↑ 김좌진

 

1910년 강제 합병 후, 국내에서 독립운동하다 2년 10개월간 옥살이

김좌진(1889~1930)은 만주에서 활동한 북로군정서를 이끌고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운동가다.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집안은 대대로 내려오는 부호이자 명문가였다. 김좌진은 타고난 장사였다. 어린 시절부터 병정놀이를 즐기며 영웅을 꿈꿨다. 13세 되던 해, 형이 15촌 아저씨의 양자로 들어가 집안 살림을 떠맡았다. 15세 때인 1904년 집에서 부리던 노비 50명을 모아놓고 종 문서를 불사른 후 논밭을 무상으로 분배했다. 자신의 집도 개조해 문중과 함께 사립학교인 호명학교를 세워 학감으로 활동했다. 학교 운영비는 가산을 정리한 자금으로 충당했다. 1907년 서울로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서 현대식 군사 지식을 습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1910년 나라가 망했을 때에는 군자금을 모아 만주 서간도 지역에 독립운동 기지를 세우겠다고 결심하고는 의병들과 연락 거점으로 삼기위해 서울에 위장 상점인 이창양행을 설립했다. 1910년 12월부터 1911년 2월까지 부호들을 상대로 거행한 6차례의 군자금 강제모집에 동지들과 수차례 참가했다가 1911년 일경에 체포되어 2년간 옥살이를 했다. 1913년 9월 출옥 후에는 고향 홍성에서 독립운동을 도모하다가 또다시 체포되어 10개월의 형을 살았다.

1915년 박상진을 중심으로 대구에서 결성한 비밀결사 조직 ‘대한광복회’에서 활동하다가 1917년 9월 박상진 총사령관의 명에 따라 만주에 군사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만주로 건너갔다. 서간도를 거쳐 도착한 길림에서는 민족지도자 39명이 참여한, 3·1독립선언의 전주곡인 ‘무오독립선언서’(1919.2)에 서명했다. 1919년 3월 길림에서 무장독립운동단체인 길림군정사를 결성했으나 무장투쟁을 뒷받침해줄 대중적 기반이 취약해 대책을 강구하다가 북간도 왕청현 서대파에 본부를 둔 대종교의 대한정의단(중광단의 후신)에 가입, 군사 책임자가 되었다. 서일이 총재로 있는 대한정의단은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리긴 했으나 무장투쟁을 지도할 독립운동가가 없었기 때문에 김좌진의 가담은 큰 힘이 되었다.

김좌진의 가담 후 대한정의단은 1919년 10월 군정부(軍政府)로 확대·개편했으나 정부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말라는 상해 임시정부의 권고에 따라 1919년 12월 ‘북로군정서’로 개칭했다. 북로군정서는 독판에 서일, 군사령관에 김좌진을 추대하고 1920년 2월 독립군 간부를 배출하기 위한 사관연성소를 설치했다. 사관연성소는 1920년 9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체코군으로부터 무기를 구입,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자유시 참변’에 실망해 공산주의는 거부

청산리 전투 승리 후 일본군이 계속 증원되었다. 북로군정서는 중소 국경 부근인 밀산으로 후퇴해 1920년 12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군 등 10여 개 독립군 부대와 힘을 합쳐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다. 병력이 3500여명으로 불어난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는 서일이었다. 김좌진은 홍범도, 조성환과 함께 부총재로 임명되었다. 김규식이 총사령으로 추대되었다. 대한독립군단은 일본군이 다시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펼치자 1921년 1월 일본의 추격을 피해 흑룡강을 건너 러시아령 이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러시아 볼셰비키가 세운 원동공화국(극동공화국)의 협조를 받아 좀 더 안전한 인근의 자유시(스보보드니)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친 공산 계열의 한인 독립군 부대가 다수 주둔하고 있었다. 김좌진 부대 등 일부 독립군 부대는 그런 상황이 의심스러워 자유시로 가지 않고 만주로 되돌아갔다. 덕분에 자유시에서 친 공산계열의 독립군들끼리 벌인 무력충돌로 수백명이 죽은 ‘자유시 참변’을 겪지 않았다.

대한독립군단은 ‘자유시 참변’을 겪은 후에도 항일무장독립군 부대를 통합하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1925년 3월 김혁 등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정서와 힘을 결집하고 민간 조직까지 끌어들여 신민부를 조직했다. 김혁이 중앙집행위원장, 김좌진이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을 맡았다. 신민부는 의병 단체라기보다 재만 교포를 아우르는 지방 행정부인데도 성동사관학교를 세워 무관들을 양성했을 정도로 무장투쟁을 중시했다. 남쪽으로는 백두산 북방의 돈화·안도에서부터 북쪽으로는 러시아 국경 부근의 밀산까지 15~16현에 50만여 명의 한인을 관장했다. 그러나 신민부 결성 직후인 1925년 6월 만주 군벌 장작림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와 ‘미쓰야 협약’을 맺고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해 조선총독부에 넘겨주면서 사정이 급격히 나빠졌다. 김혁도 1927년 3월 체포되자 12월 군정파와 민정파로 양분되었다.

군정파였던 김좌진은 당시 만주에서 활동 중인 3부(참의부·정의부·신민부) 통합에 관심이 많았다. 김좌진은 1928년 9월 3부 통합회의에 대표를 파견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통합 운동을 포기하고 북만주 지역으로 돌아갔다. 당시 북만주 지역에는 대종교인뿐만 아니라 다수 공산주의자도 거주했다. 지리적으로도 소련과 맞닿아 있어 재만 한인사회와 민족주의 진영에 속하는 민족운동 단체에도 공산주의 사상이 강하게 전파되었다.

김좌진 등 신민부의 대종교적 민족주의자들은 1921년 자유시 참변에 충격을 받아 공산주의에 거부감이 컸다. 대종교도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했기 때문에 계급과 국제성을 강조하는 공산주의와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당시 재만 한인들은 신민부 군정파보다 공산주의에 더 공감했다. 군정파가 친일 한인들의 암살을 시도하고 국내 진입을 위한 공작을 벌여 불똥이 한인들에게 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농민을 괴롭히거나 살해하는 군정파 대원들까지 있어 한인들로부터 인심을 얻지 못했다. 이런 틈을 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재만 한인사회를 파고들었다. 김좌진에게는 공산주의자와 대결할 수 있는 이념과 방략이 필요했으나 정치적 이념을 실현할 기반이 없다는 게 현실적 한계였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무정부주의와의 합작이었다.

 

김좌진 피살 전모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어

김좌진은 1929년 7월 신민부와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이 제휴한 한족총연합회를 결성, 하얼빈 근처 산시역 부근에 본부를 설치했다. 김좌진은 위원장을 맡아 재만 교포의 자립과 안정에 목표를 두고 교포들의 지위 향상에 힘을 기울였다. 중앙집권제를 폐기하고 지방자치제 실시를 명기한 것을 두고 아나키스트들 스스로 “4,000년 조선 역사 이래 새로운 방식에 의한 농민 자체의 조직체”라고 자부할 정도로 북만주 지역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김좌진은 1930년 1월 24일, 한족총연합회가 운영하는 산시역 근처의 도정공장으로 갔다. 오후 4시쯤 기계를 살피고 있는 김좌진의 등 뒤에서 누군가 총격을 가했고 김좌진은 즉사했다.

100일 뒤 거행된 장례식에는 국내·외 각지에서 1,000여 명의 조문객이 몰려와 애도했다. 시신은 가매장되었다가 1934년 방물장수로 가장한 김좌진의 아내가 유해를 파서 고국으로 가지고 와 충남 홍성에 밀장했다. 1957년 아내가 타계한 후에는 아들 김두한이 유해를 충남 보령에 있는 한산 이씨 종산에 합장했다. 현장에서 도주했다가 나중에 만주 경찰에 붙잡힌 범인은 조선공산당 소속 박상실이었다. 그는 1931년 사형 판결을 받았으나 그해 9월에 터진 9·18 만주사변의 어수선한 틈을 타 도주했다. 이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범행 동기 등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가장 유력한 설은 “김좌진이 일제와 결탁했다”는 거짓 보고를 상부에 올려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암살을 지시했다는 것이다. 박상실을 사주한 것으로 알려진 김봉환은 체포되어 사살당했다.

신용하 서울대 교수는 “김좌진이 한국독립군단, 신민부, 한족총연합회 등을 창설해 독립운동을 벌이면서 ‘적화방지단’이라는 비밀조직을 결성해 공산 조직의 침투를 막으려 하자 공산단체 적기단이 비밀단원 박상실을 시켜 암살한 뒤 ‘김좌진이 친일파로 변절해 처단했다’는 소문을 퍼뜨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강훈 전 광복회 회장은 자서전 ‘민족해방운동과 나’에서 “(일제하 진보적 여류 문인) 강경애와 (그의 동거남) 김봉환이 하얼빈영사관 경찰부 소속 일본 형사의 회유로 변절, 공산계 급진주의자인 박상실을 사주해 김좌진을 암살했다”고 적고 있다. 이강훈은 김좌진을 따라 신민부와 한족총연합회에도 가담하고 동북만주에서도 활약하다가 1933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5년형을 받은 인물로 누구보다 김좌진의 주변 정황에 정통한 인물이다. 범인이 박상실이 아니라 공도진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사건의 전모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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