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특수상대성이론 발표

↑ 아인슈타인

 

특수상대성이론, 아인슈타인을 일약 물리학계의 총아로 만들어줘

1905년은 과학계에서 ‘기적의 해’로 불린다. 26살에 불과한 무명의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이 마치 신의 계시라도 받은 듯 불과 수개월 사이에 광양자 가설, 브라운운동 이론, 특수상대성이론 등 3편의 논문을 독일의 유명 학술지 ‘물리학 연보’에 잇따라 발표함으로써 과학계의 기존 인식을 뿌리째 흔들어놓은 해가 1905년이기 때문이다.

3편의 논문 중 빛의 에너지가 광자라는 알갱이 형태로 전달된다는 ‘광양자 이론’은 루트비히 볼츠만의 원자 가설을 차용해 논리의 근간을 이뤘다. 물 같은 흐름체 속에서 꽃가루 같은 알갱이가 보이는 ‘브라운 운동’에서는 볼츠만의 가설이 사실임을 완벽하게 논증함으로써 볼츠만이 평생 집착했던 원자론에 월계관을 얹어주었다. 아인슈타인은 이 두 개의 논문만으로도 현대물리학의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받지만 ‘운동하는 물체의 전기역학에 대하여’(특수상대성이론) 논문이야말로 스위스 연방 특허국의 말단 심사관이던 아인슈타인을 일약 물리학계의 총아로 만들어준 일등 공신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독일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김나지움 3학년 때인 1895년 프러시아 군국주의 국가의 시민이 되고 싶지 않다며 학교를 자퇴하고 독일 국적을 포기했다. 스위스 국적을 취득하려 했으나 성인만 국적을 취득할 수 있어 한동안 무국적자로 지내다 1901년 스위스 국적을 취득했다. 1930년대에 다시 미국 국적을 취득한 것까지 포함하면 일생 동안 세 나라의 시민으로 살았다. 성장기는 지나치리만큼 평범했다.

1896년 스위스 취리히 공과대에 입학하고 그곳에서 4살 연상의 밀레바 마리치를 만나 사랑을 나눴다. 다리를 조금 절었던 밀레바는 세르비아의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다. 계속 공부했다면 뛰어난 과학자가 될 수 있을 만큼 머리가 비상했다. 그러나 1901년 아인슈타인과 함께 휴양지로 놀러갔다가 임신하게 되자 과학자의 꿈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딸을 낳았다. 아인슈타인은 딸의 안부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차가운 부정을 보이다가 1903년 밀레바와 결혼했다. 두 살된 딸은 그해 세상을 떠났다. 아인슈타인은 1900년 스위스 취리히 공과대를 졸업하고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다가 1902년 겨우 스위스 베른의 연방 특허국 3등 심사관으로 들어갔다. 특수상대성이론은 이 특허국 직원으로 일하던 무명 시절에 알아냈다.

 

위치에 따라 시간과 속도가 다르게 관찰된다는 놀라운 발상

그가 특허 심사관으로 일하던 시절에는 시계에 대한 특허가 자주 접수되었다. 당시 도시를 잇는 열차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여러 도시 간에 시간을 맞추는 일도 점점 더 중요해졌다. 도시는 정지해 있는 좌표계이므로 두 도시 사이에 시간을 맞추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중 하나의 좌표계가 움직이고 있다면 정지한 좌표계와 운동하는 좌표계의 시간을 어떻게 맞출까 하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궁금증이었다. 어느 한 좌표계에서 ‘동시’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이 다른 좌표계에서는 ‘동시’가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물음표도 생겼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이 세상에 나오기 전, 빛의 속도를 둘러싼 물리학계의 최대 난제는 17세기 중엽 ‘뉴턴의 법칙’과 19세기 중엽 ‘맥스웰 법칙’ 사이의 모순이었다. 뉴턴의 이론에 따르면, 물체의 속도는 무한히 빨라질 수 있기 때문에 빛의 속도가 아무리 빠르다 해도 물체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는 반면 맥스웰의 이론에 따르면 빛의 속도가 가장 빠르므로 어떤 경우에도 물체의 속도가 빛의 속도를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인슈타인은 맥스웰의 이론을 토대로 ‘사고 실험’을 거듭했다. ‘사고 실험’이란 실제로 실험 장치를 쓰지 않고 이론적 가능성에 따라 마치 실험을 한 것처럼 머릿속에서 결과를 유도하는 실험을 말한다. 사고 실험을 하던 어느 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빛의 빠르기는 일정하며 어떤 물질도 빛보다 빨리 달릴 수 없다는 가설을 토대로 그가 주목한 것은 시간과 속도의 함수였다. 속도는 ‘거리÷시간’의 식으로 표시되는데 항상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는 빛을 이 식에 들어맞게 하려면 시간이나 거리(공간)가 상대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특수상대성이론’이 탄생한 것이다. 따라서 물체는 운동 속도가 빨라지면 길이(거리)가 짧아지고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이것은 관찰하는 사람에 따라 시간과 속도가 다르게 관찰된다는 놀라운 발상이었다. 그동안 시간과 공간은 전 우주에 걸쳐 오직 하나뿐이고 같은 공간에 펼쳐 있을 뿐이라는 믿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같은 공간에 있고 모든 사건은 동일한 공간에서 일어난다. 같은 공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는 하나뿐인 동일한 시간이 적용된다. 이 같은 고정관념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해 뿌리째 바뀌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 전혀 별개의 것으로 생각해오던 시간과 공간을 결합한 ‘4차원 시공간’ 개념도 그렇게 생겨났다. 이로 인해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이어서 어느 곳에서나 동일하다는 뉴턴의 이론은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그로부터 몇 주 후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이론 논문에서 수학적 표현이 빠져 있는 것을 알고 부록에 해당하는 3장의 보충 논문(물체의 관성은 에너지 함량에 의존하는가)을 ‘물리학 연보’에 다시 보냈고, 논문은 11월호에 실렸다. 그 유명한 ‘질량에너지 등가원리(E=mc²)’ 방정식이 세상에 공개된 것이다. 이 방정식에서 E는 에너지의 거대한 영역이고, m은 우주의 물질에 관한 것이며 c는 빛의 속도다. 즉 에너지는 질량에 빛의 속도의 제곱을 곱한 것이다.

그전까지 에너지와 질량은 서로 다른 영역의 독립적인 세계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두 영역은 아무런 관련 없이 홀로 발달해왔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이 에너지와 질량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전이가 발생할 수 있고 속도가 그 둘을 연결하는 환산인자라는 사실을 규명한 것이다. 빛의 속도를 이용해 에너지와 질량이 같다는 사실을 규명한 것은 놀라운 통찰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이해하는 사람 거의 없어

특수상대성이론은 이처럼 인류가 유사 이래 지녀왔던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파괴했으나 말 그대로 특수한 경우 즉 빛처럼 등속운동을 하는 물체만을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일반적인 가속운동이나 회전운동을 하는 경우에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물리법칙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했던 아인슈타인에게 이것은 커다란 난관이었다.

자신의 이론이 반쪽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아인슈타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0년 동안 다시 끙끙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1915년 11월 25일 중력장 방정식을 완성하고 1916년 3월 20일 ‘물리학 연보’에 ‘일반상대성이론의 기초’라는 논문을 발표해 뉴턴의 중력이론마저 무너뜨렸다. 여기서 가장 놀라운 사실은 빛이 중력장에서 휜다는 것이다. 큰 별 주위의 우주 공간은 별의 강력한 중력 때문에 휘게 되는데, 이 휘어진 공간을 통과하는 것은 질량을 가진 물체든 질량이 없는 빛이든 모두 휜다는 것이다. 공간만 휘는 것이 아니라 시간도 휜다. 시간이 휜다는 것은 시간이 변한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중력이 강한 곳에 있는 시계는 느려진다.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의 차이점은 몇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특수상대성이론은 조건이 붙은 특수한 상황에서만 적용되는 이론이다. 이 이론이 적용되는 것은 ‘중력의 영향이 없다’, ‘관측자가 가속도운동을 하고 있지 않다’는 조건이 충족되는 경우다. 일반상대성이론은 그런 제약을 없애고 더욱 일반적인 상황에 적용되도록 발전시킨 이론이다. 일반이론은 특수이론을 그 속에 포함한다. 일반이론에서는 중력이 강한 곳에서 반드시 시간이 느려진다.

아인슈타인에게 중력은 ‘힘’이 아니라 ‘장(필드)’이었다. 태양계의 경우, 뉴턴의 중력이론에서는 태양과 지구가 서로 끌어당기는 만유인력에 의해 지구가 태양 주위를 타원운동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태양과 같은 거대한 물체는 중력장에서 자신을 둘러싼 공간을 휘게 만들고 그 휘어진 공간을 통해 물질이 이동한다. 지구는 휘어진 공간 내에서 직선운동을 하는데 이것이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도는 공전 현상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구를 기준으로 태양 뒤편에 별이 있을 경우 이 별빛은 지구로 오다가 태양의 강한 중력 때문에 진로가 굽어져서 지구로 들어오기 때문에 지구에서는 별의 위치가 치우쳐 보이게 된다. 그러나 당시 과학자 중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실험실과 상아탑에만 머물러 있지 않아

그런 가운데 영국의 천문학자 아서 에딩턴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확인할 목적으로 1919년 5월 29일 개기일식에 맞춰 아프리카의 한 섬을 찾아갔다. 에딩턴은 평소 낮엔 별을 볼 수 없지만 개기일식 때는 달이 해를 가려 태양 주변에 나타나는 별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착안해 별들을 사진으로 찍어 두었다가 6개월 뒤 그 별들이 다시 밤하늘에 나타날 때 그 전에 찍은 사진과 비교할 생각이었다.

에딩턴은 개기일식 때 찍은 16장의 사진을 토대로 반년 동안 분석했다. 그 결과 놀랍게도 별이 원래의 위치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별빛은 휘어 있었고, 일반상대성이론이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이로써 우주적 거시 세계에서만은 뉴턴의 법칙이 영원히 추방되었다. 아인슈타인은 훗날 상대성이론을 알기 쉽게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받자 “미인과 함께 있으면 1시간이 1분처럼 느껴지지만 뜨거운 난로 위에서는 1분이 1시간보다 길게 느껴지는 것과 같다”고 흥미로운 비유로 답변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아인슈타인은 1905년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하고 1906년 박사학위를 취득하자 1909년 스위스 특허국을 그만두고 취리히대 교수로 부임했다. 프라하대(1911년)를 거쳐 1914년부터는 베를린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19년 수년 동안 별거 상태에 있던 밀레바와 이혼하고 사촌이면서 두 딸을 둔 이혼녀 엘사와 결혼했다.

아인슈타인은 1921년 상대성이론이 아닌 ‘광양자 이론’으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해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물리학자의 반열에 올랐으나 독일 내 반유대 분위기가 확산해 신변이 불안해졌다. 1차대전 때 반전운동을 지지한 유대인인데다 독일 국적을 스스로 포기한 적이 있어 반유대주의 표적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1933년 10월 미국으로 건너가 뉴저지주의 소도시 프린스턴에 소재한 고등연구소의 종신 연구원이 되었다.

그가 떠난 독일에서 상대성이론 논문은 불태워지고 재산은 몰수당했으며 나치의 ‘처단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 아인슈타인은 실험실도 없고 학위 제도도 없어 비교적 자유로운 미국의 고등연구소에서 통일장 이론 연구에 매달렸으나 실질적인 진보는 거의 이루지 못하고 실패와 새로운 시도의 모색만이 가득한 노트만을 남겼다.

아인슈타인은 미국에서 실험실과 상아탑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1939년 9월 우려하던 2차대전이 터졌을 때는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가 핵폭탄 개발의 필요성을 밝히고 아인슈타인이 서명한 편지가 10월 11일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 핵폭탄 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한 편지에 대해 훗날 아인슈타인은 “내 생애에서 가장 커다란 잘못은 그 편지에 서명한 것”이라고 후회했다.

2차대전 후 냉전의 조짐이 확연하던 시대에 자신이 사회주의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1950년대 매카시즘의 광풍에 맞서 불복종운동을 전개했으며 반전평화주의자로 전쟁의 영원한 종식을 꿈꿨다. 에드거 후버 FBI 국장은 이런 그를 1급 감시 대상 후보에 올려놓았다. 1952년 의례적 지위인 이스라엘 대통령이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1955년 4월 18일 새벽 76세로 숨을 거둔 그의 병원 침대에는 전날까지 통일장 이론에 관해 계산하던 종이 몇 장이 놓여 있었다. 상대성이론은 과학은 물론 철학·영화·미술·사진·문학·음악·건축 등 거의 모든 분야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 때문에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새 천년 직전인 1999년 아인슈타인을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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