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세계 최초 유성영화 ‘재즈 싱어’ 개봉

↑ 알 존슨

 

“기다려! 기다려! 넌 아무것도 듣지 못했잖아! (Wait a minute! Wait a minute! You ain’t heard nothin’ yet!)”. 19세기 말 탄생 후 오랫동안 침묵하던 영화가 마침내 말문을 튼 것은 1927년 10월 6일이었다. 그날 영화 주인공 알 졸슨(1886~1950)의 목소리가 영화에서 흘러나오자 뉴욕 워너 브러더스 극장에서 영화를 보던 관객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영화에서 배우 목소리가 들리다니…. 세계 최초의 유성영화 ‘재즈 싱어(Jazz Singer)’의 첫 대사는 이렇게 세상 밖으로 흘러나왔고, 영화 속 짧은 대사는 세계 영화사를 ‘무성(無聲)’과 ‘유성’으로 갈라놓았다.

앨런 크로슬랜드가 감독한 88분짜리 ‘재즈 싱어’의 스토리는 재미가 있으면서도 감동적이다. 한 유대인 소년은 5대째 내려온 칸토르(유대교 예배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를 물려받아야 한다. 그러나 소년은 재즈 가수가 되겠다며 아버지의 반대를 뿌리치고 집을 뛰쳐나간다. 소년은 뉴욕에서 잭 로빈으로 개명하고 재즈 가수로 성공을 거둬 마침내 브로드웨이의 공연에 캐스팅되어 첫 주연을 맡는다. 하지만 공연 전날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해 임종을 지킨다. 로빈은 이렇게 첫 공연을 펑크냈지만 그의 노래가 점차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으면서 브로드웨이의 인기 가수로 성공하게 된다.

‘재즈 싱어’가 탄생할 무렵 미국의 영화산업은 위기에 몰려 있었다. 변사의 해설이나 생음악 연주 등으로 무성의 한계를 보완했으나 라디오의 등장 후 대중은 조금씩 영화를 외면했다. 그러던 중 영사기에 축음기를 연결한 벨연구소의 ‘바이터폰’이 등장하면서 화면에 소리를 넣는 유성영화의 기술적 토대가 마련되었다.

워너 브러더스 영화사와 앨런 크로슬랜드 감독은 이 바이터폰을 이용해 1926년 8월 ‘돈 주앙’이라는 장편 영화를 만들어 세상에 공개했다. 그러나 ‘돈 주앙’은 뉴욕필이 연주한 영화음악과 칼이 부딪치는 음향효과만 들려주었을 뿐 배우들의 육성까지는 담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영상과 음악, 대사와 노래를 동시에 갖춘 ‘재즈 싱어’에 최초 유성영화의 영예가 돌아간 것이다. ‘재즈 싱어’는 1925년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공연되고 있던 ‘참회의 날’을 원작으로 삼았다. 하지만 한동안 주연배우를 구하지 못해 난항을 겪었다. 그러다가 발견한 인물이 수년 전 브로드웨이에서 ‘스와니’를 히트시켜 유명해진 알 졸슨이었다.

‘재즈 싱어'(1927년) 포스터

 

“기다려! 기다려! 넌 아무것도 듣지 못했잖아”

알 졸슨은 러시아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7살 때 미국으로 이주해 워싱턴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유대인 성가대 지휘자로 활동하며 아들이 가업을 이어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알 졸슨은 ‘보드빌’(음악을 곁들인 짧은 희가극)에 빠져 지냈다. 졸슨은 워싱턴의 보드빌 무대에 서고 1910년대 초반부터는 뉴욕의 뮤지컬 무대에서 활약했다. 뮤지컬 ‘신밧드’(1918)에도 출연했으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1919년 조지 거슈윈이 작곡한 ‘스와니’를 ‘신밧드’에서 부른 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런 점에서 알 졸슨 개인의 삶은 영화 ‘재즈 싱어’와 많이 흡사했다.

‘재즈 싱어’는 재미도 있었지만 알 졸슨의 뛰어난 노래 솜씨가 자랑이었다. 통상 ‘최초’는 짜임새가 없고 내용이 빈약하기 마련인데도 알 졸슨의 가창력은 ‘최초’답지 않게 관객의 혼을 빼놓을 정도로 훌륭했다. 최초의 유성영화라고는 하나 영화의 대사 대부분은 자막으로 처리된 무성이었고, 단 두 장면만 배우의 목소리가 들리는 유성이었다.

그러나 그 ‘양’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배우가 ‘말을 한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경이였고 충격이었다. 또한 ‘재즈 싱어’에서 알 졸슨이 부른 ‘My Mammy’ 등의 세 곡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본다면 최초의 영화 주제곡이라고 할 수 있다. 알 졸슨이 카메라 앞에서 노래를 부른 것은 최초의 뮤지컬 영화라는 의미도 있다. 대사가 나온다고 해서 영화에 붙은 ‘토키(Talkie)’는 이후 유성영화를 지칭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알 졸슨은 최고 인기 스타로 부상했다. 워너가의 네 형제가 모여 만든 워너 브러더스는 ‘재즈 싱어’ 상영 전까지만 해도 패러마운트, MGM 등에 비해 사세가 훨씬 못 미쳤으나 영화 덕에 기록적인 흥행 수입을 거둬들여 메이저 영화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대 스튜디오로 발돋움했다.

그렇다고 ‘재즈 싱어’가 최대 흥행 실적을 낸 영화는 아니었다. ‘재즈 싱어’보다 한 주 먼저 개봉된 제1회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날개들’, 그레타 가르보가 출연한 ‘러브’ 등의 흥행 기록에는 미치지 못했다. 찰리 채플린은 “유성영화가 영화예술의 토대가 되는 팬터마임을 땅속에 파묻어 버린다”는 이유를 들어 오랫동안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도도한 시대의 흐름을 거역하지 못해 1936년 ‘모던 타임스’를 통해 유성영화 시대로 뛰어들었다. 영상과 음악과 목소리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진정한 의미의 최초의 유성영화는 ‘재즈 싱어’가 개봉되고 9개월 후인 1928년 7월 6일 개봉된 워너사의 ‘뉴욕의 등불’이었으나 단 두 마디 대사 덕에 영원한 최초는 ‘재즈 싱어’에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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