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축구계의 ‘검은 거미손’ 레프 야신 은퇴 경기

↑ 래프 야신

 

레프 야신(1929~1990)은 전 세계 축구 골키퍼들의 영원한 우상이다. 골키퍼로서는 완벽한 189㎝·82㎏의 체격에 동물적인 반사신경과 순발력까지 갖춰 도무지 틈을 주지 않았다. 유난히 팔과 손가락이 길고 검은색 유니폼을 자주 입어 ‘검은 거미손’으로 불렸다. 오늘날 뛰어난 골키퍼를 지칭하는 ‘거미손’, ‘문어발’, ‘신의 손’ 등의 별명도 모두 그에게서 비롯되었다.

야신은 소련 모스크바의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10대 초반부터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육상, 권투, 농구 등 각종 운동을 섭렵했다. 1949년 군 복무를 마치고 디나모 모스크바에 입단한 그에게 주어진 역할은 아이스하키팀의 골키퍼였다. 1950년부터는 축구팀 골키퍼도 병행했으나 당시 디나모 축구팀에는 명골키퍼가 따로 있어 후보 요원으로 활약했다. 그러던 중 1953년 주전 골키퍼가 부상으로 클럽을 떠나면서 야신은 24살의 늦은 나이에 디나모팀의 골문을 책임지는 주전 수문장으로 데뷔했다.

그는 탁월한 점프력과 순발력, 동물적인 반사신경의 소유자였다. 차분하면서도 너그럽기까지 해 동료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웠다. 디나모 모스크바의 골문은 점차 철옹성으로 변해갔다. 1954년에는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1956년 멜버른 올림픽, 1960년 유럽챔피언컵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1963년에는 골키퍼로는 사상 처음으로 유럽 최우수선수(발롱도르)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으며 이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그해 야신은 소련 리그에서 27경기 동안 불과 6실점 밖에 하지 않는 우주방어를 펼쳤다.

1958년 스웨덴 월드컵부터 1970년 멕시코 월드컵까지 4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출전해 스웨덴 월드컵(1958년)과 칠레 월드컵(1962년)에서는 팀을 8강에, 영국 월드컵(1966년)에서는 팀을 4강에 올려놓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월드컵 본선에는 총 13게임에 출전, 4게임 무실점의 기록을 세웠다. 북한이 돌풍을 일으킨 1966년의 영국 월드컵에서 북한을 3-0으로 물리칠 때도 수문장은 야신이었다. 그러나 야신에게도 씻을 수 없는 흑역사가 있다. 1962년 칠레 월드컵이다. 소련은 콜롬비아전에서 후반 23분까지 4-1로 크게 리드했다. 그러나 야신은 8분 만에 3골을 허용했다. 콜롬비아 선수의 코너킥이 그대로 골문으로 빨려 들어가도 막지 못했다. 소련은 개최국 칠레와의 8강전에서 1-2로 패했다. 야신은 패배의 책임을 홀로 뒤집어썼다. 소련 팬들은 야신이 월드컵 경기 중 뇌진탕에 걸린 몸으로 버텼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야유를 쏟아냈다.

은퇴 경기는 동서 냉전이 한창이던 1971년 5월 27일 모스크바에서 펼쳐졌다. 레닌스타디움에서 유럽올스타 팀을 상대로 벌어진 은퇴 경기에는 세계 축구계를 호령해온 펠레, 에우제비오, 베켄바워 등이 참석해 경기장을 꽉 메운 10만 명의 관중과 함께 마지막 경기를 축하해주었다.

그때까지 야신의 기록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국가대표로 뛴 17년 동안 A매치(국가대표 간 경기) 78경기에서 70골(평균 실점률 0.89)을 허용하고 270회의 페널티킥 상황에서 무려 150개의 슈팅을 막아냈다. 디나모 모스크바 주전 선수로는 326경기에 출장, 160번의 클린시트와 254골 허용함으로써 5번의 리그 우승과 3번의 FA컵을 팀에 안겨주었다. FIFA는 이런 야신의 공적을 인정해 월드컵 최고의 골키퍼를 가리는 ‘야신상’을 제정, 1994년 미국 대회부터 주인을 가리다가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부터는 명칭을 골든글로브로 바꿔 부르고 있다. 2020년 매년 유럽 최고 축구선수에게 ‘발롱도르’를 수여하는 프랑스풋볼이 ‘역대 베스트11’을 선정했을 때 야신에게 골키퍼 장갑을 선물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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