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독가스 첫 전쟁터(1차대전) 살포와 ‘죽음의 사자’ 프리츠 하버

↑ 1918년 프랑스 Estaires 전투(리스 전투 혹은 제4차 이프르 전투) 도중 독가스로 눈이 먼 영국군

염소가스는 화학전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

1915년 4월 22일 새벽 5시쯤, 프랑스군과 독일군이 대치하고 있는 벨기에 이프르 전선에서 갑자기 황갈색의 안개가 1m 높이로 바람을 타고 독일군 쪽에서 프랑스군 쪽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이 목격되었다. 프랑스군은 독일군이 보병 돌격에 앞서 터뜨린 연막탄으로 생각하고 참호에서 사격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연막탄이라고 생각한 안개가 프랑스군 진지로 다가오는 순간, 참호 속 병사들이 기침·구토와 함께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일부 병사들은 참호 밖으로 뛰쳐나가 무조건 달렸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해 맥없이 쓰러졌다.

갑자기 전쟁터를 죽음의 아수라장으로 만든 황갈색 가스의 정체는 곧 밝혀졌다. 알고보니 연막탄이 아니라 독가스의 일종인 염소가스였다. 염소는 독성이 강하고 고농도로 널리 퍼지는 특성을 갖고 있는 데다 보관과 수송이 편리하고 공기보다 2.5배나 무거워 참호 속의 장병들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이날 하룻동안 독일군이 방출한 가스는 프랑스군 5,000여 명을 숨지게 하고 6,000여 명을 독일군의 포로로 만들었다. 따라서 염소가스는 화학전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고, 이프르는 전쟁터에서 인류 최초로 독가스가 사용된 죽음의 현장으로 기록되었다.

사실 화학전은 독일의 염소가스가 처음은 아니었다. 1899년 유럽 국가들이 질식성 가스와 관련한 헤이그 선언을 통해 ‘질식을 유발하거나 독성을 지닌 가스의 유포를 금지’ 하기로 합의했는데도 프랑스군이 1914년 8월 독일군을 향해 최루 가스탄을 사용한 게 최초였다. 그러자 독일도 1914년 10월 구토를 유발하는 물질을 섞은 포탄을 사용하고 1915년 1월의 동부전선에서는 러시아군을 상대로 최루 가스탄을 사용했다. 그렇다고 해도 사람을 죽일 정도는 아니어서 최초의 독가스는 이프르에서 사용된 염소가스로 기록되고 있다.

 

프리츠 하버는 유럽을 기근에서 구한 ‘수호천사’이면서 독가스 개발한 ‘죽음의 사자’

독가스를 개발한 ‘죽음의 사자’는 독일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의 물리화학부장 프리츠 하버(1868~1934)였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암모니아 합성법’을 개발해 유럽을 기근에서 구했던 ‘수호천사’가 하루아침에 ‘저승사자’로 돌변한 것이다.

프리츠 하버

 

하버의 ‘암모니아 합성법’ 개발은 산업혁명의 여파로 19세기부터 유럽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데도 농작물을 비롯한 식물의 생장에 없어서는 안될 질소가 부족해 식량 생산에 적신호가 켜진 것에 대한 대응책이었다. 식량의 근간인 식물을 구성하는 주된 화학 원소는 탄소, 수소, 산소, 질소, 인이다. 산소와 탄소는 주로 식물의 잎을 통해 빨아들이는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로부터 얻고, 수소는 뿌리를 통해 흡수한 물에서 얻는다. 이 원소들은 광합성을 통해 최종적으로 탄수화물이 되지만 질소와 인은 이산화탄소와 물처럼 흔하지 않아 전반적으로 부족하다. 따라서 생산량을 늘리려면 질소와 인을 비료 형태로 외부에서 공급받아야 한다. 인은 인산염을 포함한 암석을 산으로 처리해서 비료로 얻을 수 있고, 질소는 퇴비나 분뇨 등에서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방식으로 생산되는 질소만으로는 급증하는 인구를 먹여 살릴 만한 식량을 생산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다행히 19세기 초 칠레 사막에서 대량의 무기질산염(칠레초석)이 함유된 광산이 발견되고 이를 수입해 쓴 덕에 19세기 말까지 질소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그러나 칠레초석도 서서히 고갈되어 대안이 나오지 않는 한 유럽은 기근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공기 중 78%나 차지하는 질소를 이용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게 당시 화학자들에게 주어진 시급한 과제였다. 이 난제를 해결한 인물이 바로 하버였다.

하버는 독일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베를린대 등에서 화학과 물리학을 배우고 1891년 유기화학 분야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04년부터는 기체 상태의 질소와 수소를 직접 반응시켜 소량의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연구에 몰두했다. 그리고 1909년 3월 마침내 물을 전기분해해서 얻은 수소와 공기 중의 질소를 반응시켜 질소비료의 원료인 암모니아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후에도 독일 바스프사의 연구원인 카를 보슈와 함께 암모니아를 대량생산하는 공정을 연구해 1913년 9월 하루 20만t의 암모니아를 대량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현대 인류의 가장 위대한 화학적 업적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공기에서 빵을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는 이 ‘암모니아 합성법’으로 단위면적당 식량 생산량은 6배 이상 늘었고 유럽은 마침내 기근 위기에서 벗어났다.

문제는 하버가 맹목적인 애국자였다는 사실이었다. 하버는 1914년 8월 1차대전이 발발하자 전쟁을 지원하는 화학 부서의 책임을 맡아 가스 무기 개발을 서둘렀다. 그리고 폭탄 제조에 필수적인 질산을 대량생산하고 지루한 참호전을 타개할 목적으로 독가스를 개발했다.

독가스를 사용한 것에 온갖 비난이 쏟아지자 하버는 “독가스도 폭탄과 다를 바 없다”며 “독가스가 독일군의 승리를 앞당겨 전쟁을 빨리 끝낼 것이고 그런 점에서 더 인간적”이라고 큰소리쳤다. 평소 “평화 시엔 인류에, 전시엔 조국에 봉사한다”는 신조를 갖고 있던 하버로서는 당연한 태도였다.

하버와 달리 역시 유대인이고 화학박사였던 그의 부인 클라라 하버는 독가스 사용에 부정적이었다. 이프르 전선의 대량 살상 후 하버가 개선장군처럼 집으로 돌아오자 클라라는 1915년 5월 2일 새벽, 긴 작별의 글을 남기고 권총으로 자살했다. 그런데도 하버는 그날 아침 서둘러 러시아 전선으로 달려가는 비정한 모습을 보였다. 다만 클라라의 죽음을 하버의 독가스 사용에 대한 항의로 해석하는 의견이 다수이긴 하지만 클라라의 집안 내력에서 자살의 원인을 찾는 사람들도 있다.

 

영국·프랑스도 독가스 사용해 전(全) 전선으로 확대

독일이 비인간적인 무기를 사용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영국·프랑스·러시아로 구성된 3국 협상 측은 물론 중립국들까지 독일에 비난을 퍼부었다. 이 때문에 독일군은 한동안 독가스 사용을 망설였다. 그러다가 연합군도 독일이 먼저 독가스를 사용했다며 독가스를 사용하기 시작해 바야흐로 독가스는 전(全) 전선으로 확대되었다.

독일군에 이어 독가스를 사용한 국가는 영국이었다. 영국군은 독일의 독가스 공격 후 특별 화학부대를 창설하고, 1915년 9월 24일 가스 분무기로 400여 통의 염소가스를 살포했다. 그러나 영국군의 독가스는 바람의 방향을 잘못 예측해 독일군보다 오히려 자국군을 더 많이 죽여 실패로 돌아갔다. 그 후 바람의 영향을 덜 받는 대포를 이용한 방법이 고안되어 더 효과적이고 더 넓은 범위에서 사용되었다.

염소가스 다음으로 널리 쓰인 독가스는 염소가스보다 10배나 더 독성이 강한 포스겐이었다. 포스겐은 갓 베어낸 건초 냄새와 비슷해 농촌 출신의 군인들이 자기도 모르게 깊은 숨을 들이쉬게 해 더욱 치명적이었다. 포스겐은 독일군과 연합군 양측 모두 사용했다. 독일군은 독성이 더 강하고 겨자향이 나는 겨자가스도 개발해 1917년 7월 동부전선에서 러시아를 상대로 사용했다. 겨자가스는 노출된 지 몇 시간 만에 온몸은 물론 심지어 내장 안에까지 수포가 생기게 해 치명적이었다. 그러나 겨자가스를 사용할 때는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 겨자가스는 독성이 완전히 사라지려면 몇 주나 걸리기 때문에 겨자가스 사용 후 바로 적의 참호를 점령했다고 해도 오염된 적의 참호에서 아군이 가스에 노출되는 사태가 벌어지곤 했다.

전쟁 기간 다른 독가스들도 개발되었지만 염소가스, 프로겐, 겨자가스 등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전쟁 기간 독일은 6만 8,000t, 프랑스는 3만 6,000t, 영국은 2만 5,000t의 독가스를 사용해 모두 10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 10배가 넘는 군인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끔찍한 고통 속에 살았다. 방호 마스크가 일찍부터 개발되지 않았으면 이보다 훨씬 더 많은 병사들이 죽었을지 모른다.

종전 후 하버는 전범으로 지명수배되어 중립국인 스위스로 피신했으나 ‘암모니아 합성법’ 개발에 공로가 있다며 1918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는 기쁨을 누렸다. 하버는 독일이 패전에 따른 엄청난 전쟁배상금에 휘청거리자 또다시 조국에 도움을 주겠다며 바닷물에서 금을 채취하는 기술을 연구했다가 해수의 금 함량이 생각보다 훨씬 적다는 것을 알고 중단한 적이 있다. 하버는 이렇게 조국을 위한 일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팔을 걷어붙였으나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히틀러 정권 하에서는 냉대를 받았다. 20여 년간 근무했던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에서 쫓겨나자 결국 조국을 등졌으나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다가 1934년 1월 29일 스위스의 한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최후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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