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과 부부 (21)] 세기의 ‘로맨스’인가 ‘스캔들’인가… 대영제국 왕위(王位) 포기하고 심프슨 이혼녀를 선택한 에드워드 8세 영국왕의 사랑 이야기
2022년 12월 18일 · zznz

↑ 월리스 심프슨과 에드워드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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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1936년 12월, 두 번이나 이혼한 월리스 심프슨과 결혼하기 위해 대영제국의 왕위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에드워드 8세의 퇴위 방송이 워낙에 충격적이어서 전 세계 신문과 잡지들이 이 소식을 도배했다.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그들이 어떻게 만나 사랑을 나누고, 영국 왕실·정부의 끈질긴 반대와 국민의 실망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결혼하게 되었는지 그 지난했던 과정을 살펴본다.
■에드워드 8세
에드워드 8세(1894~1972)는 증조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 시기인 1894년 6월 태어났다. 출생 무렵 그는 할아버지 에드워드 왕세자(에드워드 7세)와 아버지 앨버트 윈저(조지 5세)에 이어 왕위 계승 서열이 세 번째였다.

에드워드는 13세이던 1907년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고 한때는 옥스퍼드대학도 다녔으나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다. 1914년 1차대전이 발발했을 때 영국 근위대 장교로 임관했으나 전선 배치를 거부당하자 “내가 전사한들 어떻다는 말인가. 형제가 4명이나 되지 않는가”라고 군에 항의한 끝에 전투에 참전했다. 그는 용맹함과 냉정함으로 전투에서 여러 일화를 남겼다. 1918년 종전 후에는 주로 여행을 하며 20~30대 시절을 보냈다. 1936년 1월 왕위에 오를 때까지 18년 동안 영 연방 국가들을 포함해 세계 45개국을 여행한 거리가 320만㎞나 되었다.
왕세자는 키가 작았지만 잘생긴 외모에 뛰어난 패션 감각으로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플레이보이 기질까지 갖춰 뭇 여성들과의 스캔들로 각종 화제와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아버지 조지 5세는 이런 에드워드의 여성 행각을 역겨워했다. 아들이 왕위를 물려받는 것도 원치 않았다. “내가 죽은 후, 아들은 12개월 안에 스스로를 망칠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아들을 불신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1차대전에 참전하고 대공황기에 임금노동자 클럽을 방문하거나 실업자 구제 계획을 구상하는 등의 행보를 보여 국민들로부터 인기가 많았다.

■월리스 심프슨
월리스 심프슨(1896~1986)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태어나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자랐다. 어렸을 적 이름은 베시 월리스 워필드였다. 태어난지 수개월만에 아버지가 죽어 불안정한 소녀시절을 보내고 청소년기에는 어머니마저 재혼해 친척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했다. 여학교를 졸업하고 20살이던 1916년 11월 미 해군 중위 조종사와 결혼했으나 남편이 군대 업무로 바빠 부부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1918년 전쟁이 끝난 후에도 남편의 술주정과 질투 그리고 사랑 없는 결혼 생활이 이어져 남편과 별거를 선언하고 중국으로 떠나 1924년부터 2년간 머물렀다.
그 무렵 심프슨 앞에 새로운 남자가 나타나는데 선박 중계인이었던 어니스트 심프슨이었다. 둘 다 이혼 전의 만남이었기 때문에 둘의 만남은 불륜이었다. 결국 그녀가 택한 결론은 이혼과 새로운 인생의 개척이었다. 1927년 12월 남편과 이혼한 그녀는 어니스트 심프슨을 따라 영국으로 건너가 1928년 7월 런던에서 결혼했다. 이후 이름은 월리스 심프슨으로 바뀌었다. 부부는 런던의 사교계를 드나들었다. 심프슨은 뼈가 앙상하고 각이 져 미인은 아니었지만 타고난 패션 감각과 당당하고 솔직한 태도로 남자들의 시선을 끌어 단숨에 사교계의 별로 떠올랐다.
■왕세자와 이혼녀의 만남과 사랑
에드워드 왕세자와 심프슨 부인이 처음 만난 것은 1931년 1월 10일 런던의 비공식 파티석상에서였다. 당시 왕세자는 37살의 노총각이었고 심프슨은 한 번의 이혼을 겪고 재혼한 유부녀였다. 심프슨은 우아하게 차려입은 푸른 드레스와 능란한 화술로 젊은 왕세자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당시 파티에 참석했던 한 여성은 “그녀의 말은 반짝반짝 빛나고 완전히 새로 세공한 그녀의 보석들 역시 빛이 났다. 대단히 매력적이고 지적이며 아주 미국적인 여성이다”라고 심프슨을 묘사했다. 심프슨은 1931년 1월 13일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3일 전 에드워드 왕세자와의 만남에 대해 “대단히 기쁜 추억이고 구원받은 기분”이라고 썼다. 심프슨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모임에서 왕세자를 만나며 관계를 이어갔다. 1934년 왕세자와 심프슨 사이의 염문설이 런던 사교계의 단골 화젯거리에 오르면서 소문 공장이 심프슨의 과거를 들춰내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이 소문을 진실이라고 믿었지만 심프슨은 아랑곳하지 않고 왕세자의 사저를 종종 방문해 미래의 안주인처럼 행세했다.

■왕실·정부와 국민의 결혼 반대
그러던 중 1936년 1월 20일 부왕 조지 5세가 서거하고 왕세자가 에드워드 8세로 왕위에 올랐다. 에드워드 8세는 즉위 후에도 심프슨과의 결혼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자 전 세계 신문과 잡지들이 왕세자와 심프슨의 기사와 사진을 쏟아내며 스캔들을 경쟁적으로 보도했다. 다만 영국 언론은 정부와 왕실의 간섭에 호응, 불미스러운 스캔들을 보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민들은 참을 수 없었다. 그들 눈에 심프슨은 국왕을 현혹시키는 천하의 요부였다. 심지어 심프슨이 중국에서 남성의 발기부전과 조루 현상을 말끔하게 고쳐주는 고대 중국의 방중술을 배웠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러나 어차피 결혼은 성사될 수 없었다. 영국 성공회 수장이기도 한 국왕은 이혼 전 여성과 결혼할 수 없다는 영국 성공회 교리 때문이다. 심프슨은 1936년 7월 이혼소송을 시작해 10월 27일 이혼 가판결을 받아냈다. 이로써 두 사람의 결혼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으나 여전히 국민 다수는 심프슨이 공식적으로 영국의 왕비가 되어 영국을 대표하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치욕으로 생각했다. 윈스턴 처칠 만 그들 관계를 이해할 뿐 스탠리 볼드윈 총리, 성공회 대주교, 메리 왕비(에드워드 8세 어머니)도 둘의 결합을 반대했다. 특히 볼드윈 총리는 “심프슨과 왕위 중 하나를 선택하라”며 그렇지 않으면 내각이 총사퇴하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국왕은 이처럼 강경한 볼드윈 총리에게 “‘귀천상혼’(貴賤相婚·morganatic marriage·결혼은 하되 심프슨의 신분은 결혼 전 것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하겠으니 왕위에 계속 남아있게 해달라”고 요구했으나, 볼드윈 총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처럼 국민과 정부와 왕실이 결혼을 반대하자 심프슨은 주변의 따가운 눈총을 의식해 1936년 12월 3일 프랑스로 떠났다.
■에드워드 8세 왕위 포기하고 사랑 선택
그러자 에드워드 8세도 사랑하는 심프슨과의 결혼이 왕실과 국민의 반대로 무산될 것 같자 왕위를 포기하고 사랑을 선택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즉위 후 1년이 채 되지 않은 1936년 12월 10일, 퇴위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공식적으로 퇴위를 공식화했다. 하원의장이 대독한 칙어를 통해 “나 자신과 내 후손의 왕위를 포기한다는 취소할 수 없는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다음날(12월 11일)에는 BBC 라디오를 통해 “사랑하는 여성의 도움이 없는 한 왕으로서의 막중한 책임과 의무를 다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며 자신의 퇴위 이유를 분명히 했다. 이로써 에드워드 8세는 영국 역사상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난 최초의 왕이 되었다. 심프슨은 프랑스에서 라디오 방송을 듣고 감격의 울음을 터뜨렸다. 왕위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아버지이자 에드워드 8세의 동생인 앨버트 왕자(조지 6세)가 물려받았다. 조지 6세는 형에게 윈저공, 심프슨에게 공작부인 칭호를 내렸다.
윈저공은 오스트리아 빈으로 건너가 몇 개월 간 그곳에서 머무르며 심프슨 부인의 이혼 절차가 완전히 끝나기를 기다렸다. 심프슨은 윈저공에게 보낸 1937년 1월 1일자 편지에서 “당신이 우는 것을 차마 들을 수 없어요. 곧 저에게 와주세요”라고 간청했다. 윈저공은 4월 14일자 편지에서 “몇 달이 지난 뒤에는 반드시 행복이 가득한 날이 올것으로 확신한다”고 썼다. 이혼은 마침내 1937년 5월 3일 성사되었고 두 사람은 5월 4일 재회했다.
■결혼 생활
두 사람은 1937년 6월 3일 프랑스 투르 지방의 고성(古城)에서 결혼했다. 심프슨은 결혼식에도 자기 색을 맘껏 드러냈다. 자신의 푸른 눈동자에 맞춰 순백의 전통 웨딩드레스 대신 푸른색 드레스를 입었다. 연미복에 미소를 머금은 윈저 공이 푸른색 드레스를 입은 심프슨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사진은 세기의 로맨스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하지만 결혼식은 쓸쓸했다. 하객은 단 16명, 그중 5명은 기자였다. 영국 왕실에서는 단 한 사람의 하객도 참석하지 않았다. 윈저공의 어머니 메리 왕비는 심프슨에게 ‘윈저 공작부인’ 이외의 어떤 왕실 존칭도 허락하지 않았다. 윈저 공작 부부의 영국 정착도 금지했다. 부부는 프랑스에 살며 전 세계를 떠돌아다녔다. 그런 와중에 윈저공이 또 다시 국민의 지탄을 받는 일이 벌어졌다. 윈저공이 1937년 9월 독일을 방문해 히틀러와 호화로운 만찬을 즐기고 히틀러를 추켜세웠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의 야욕이 드러난 1939년에는 ‘영국과 독일이 친선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발언해 국민의 분노를 샀다. 훗날 BBC에서 만든 다큐멘터리 ‘에드워드 8세 영국의 나치 왕’에 따르면 에드워드 8세는 자신의 아버지가 윈저 왕조로 이름을 바꾸기 이전에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의 독일 혈통에 대해 큰 자부심이 있었으며 어렸을 때부터 독일에 관심이 많았고 이로 인해 친독일 성향이 있었다.

윈저공은 2차대전이 발발했을 때 프랑스 주둔 영국군 본부에서 영관급 장교로 복무했다. 그러나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되자 중립국인 스페인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그의 유일한 지지자 윈스턴 처칠 총리의 도움으로 1940년 8월 바하마 총독으로 부임해 5년간 머물렀다. 1945년 종전 후에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유럽과 미국 등지를 오가며 사회 유명인으로서 여유로운 삶을 살았다. 다만 동생 조지 6세의 장례식(1952)과 어머니의 장례식(1953) 때 등 몇 차례만 홀로 영국을 방문했을 뿐 영국 땅은 밟지 못했다. 그렇게 영국 주변을 맴돌기만 하던 두 사람은 1967년에야 비로소 공식적으로 왕실의 초대를 받아 왕실 모임에 참석했다.
윈저공은 1972년 2월 프랑스에서 죽은 뒤 영국 윈저성 묘지에 묻혔다. 심프슨은 1986년 4월 프랑스에서 죽어 윈저성에 함께 안치되었다. 심프슨은 죽기 전, 자신이 1930년대 주고받았던 편지들을 공개하도록 유언을 남겼다. 심프슨이 에드워드 8세 왕으로 하여금 왕위를 포기하도록 종용했을 것으로 생각한 당시 국민들의 판단이 사실은 편견이라는 것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편지는 1986년 4월 영국 ‘데일리 메일지’에 공개되었다.
윈저공은 영국 국민에게 실망을 안겨주었지만 시대를 앞서간 패션의 선구자로 전세계 패션계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실제로 윈저공은 남성복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로 연구되고 있다. 오늘날 격식 있는 정장 스타일을 ‘윈저 패션’이라고 하거나, 큰 매듭의 좌우대칭을 갖춘 타이 매듭을 ‘윈저 노트(knot)’라고 부르는 것은 ‘윈저공’에서 나온 패션 용어다. 정장 셔츠 스타일 중에서도 칼라가 넓게 벌어져있는 스타일의 셔츠를 ‘윈저 칼라 셔츠’라고 부른다.
■사후 공개된 편지와 경찰 보고서
심프슨 사후 공개된 경찰보고서와 편지들에 따르면 1930년대 영국 국민들이 알고 있던 심프슨의 이미지와 실제 모습이 많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이 결혼하기 전, 볼드윈 총리는 경찰에 심프슨의 뒷조사를 지시했다. 그 때 작성된 조사보고서는 2003년 비밀해제되어 세상에 공개되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요원들이 심프슨의 방탕한 행적 등 흠을 찾아내기 위해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그때 작성된 보고서에는 심프슨 부인에 대해 “매우 성실” “스스로 일을 하려 하는 여인” 등 좋은 평판이 기록되어 있다. 심프슨 부인과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은 “심프슨 부인을 알게 되면 에드워드 왕이 왜 그녀에게 빠져들었는지를 금방 알게 된다”고 말했다는 기록도 있다. 물론 심프슨을 나치의 스파이, 유태인 등으로 추정하는 보고도 있고 심프슨이 에드워드 왕세자와 열애하는 와중에 또 다른 남자를 만났다는 보고도 있다.
경찰 요원은 심프슨 부인의 전 남편인 어니스트 심프슨도 만났는데 전 남편은 “에드워드 왕이 1936년 초 아내와 사랑에 빠졌으며 결혼하고 싶다고 알려왔다. 충격을 받았지만 결국 이혼에 동의했다. 하지만 나는 영국관리들에게 내 아내를 설득시켜서 에드워드 왕의 왕위를 지키는 게 나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아내의 심리를 알기 때문이다. 확신하건대 내 아내는 에드워드 왕이 자기를 좋아하는 것 만큼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심프슨 부인과 에드워드 8세가 주고받았던 편지 100통을 근거로 이들의 사랑을 재구성한 ‘왕관포기’(1995년 출간)에 따르면, 1936년 9월 심프슨이 에드워드에게 보낸 한 편지에는 에드워드를 사랑하면서도 에드워드의 삶에 암적인 존재가 되어서는 안되고 그의 퇴위만은 막아야 한다는 절박감에 중국으로 피신을 결심하고 중국행에 필요한 티켓까지 구입한 것으로 나온다. 심지어 “당신과 함께할 때보다 남편 어니스트와 함께 하는 시간이 훨씬 마음이 편합니다.”라는 마음에도 없는 절교의 편지를 보내 에드워드가 스스로 자신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게 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편지를 받자마자 파리의 호텔로 전화를 걸어 “당신도 진정으로 헤어질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 당장 편지 내용을 뒤엎지 않으면 나는 목을 매고 말겠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