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이사벨1세-페르난도2세의 스페인왕국, 유대인 추방을 골자로 한 ‘알함브라 칙령’ 선포

↑ 알람브라 칙령 사본

 

1492년 3월 31일, 스페인 왕국의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이 ‘유대인 추방’을 골자로 한 ‘알함브라 칙령(Alhambra Decree)’을 선포했다. 1월 2일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이슬람인 그라나다를 몰아내고 스페인 왕국을 수립하고 3개월이 지난 뒤였다. ‘빈부귀천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유대인은 모두 떠나라. 이 신성한 땅에서!’라고 선언한 칙령에서 명시한 유대인들의 죄는 “신성한 가톨릭 교리와 신앙 깊은 교도들을 무너뜨리려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 무렵 스페인 왕국 인구 700만 명의 6.5%가 유대인이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주로 상업이 발달한 도시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도시인구의 1/3을 차지했다. 유대인 숫자가 유럽에서 가장 많았는데 이유는 8세기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했던 이슬람들이 500년 이상 유대인에게 관용을 베풀어 유대인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11세기 초 북아프리카에서 발흥한 교조주의 이슬람이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한 후 유대인들에게 개종을 강요하며 학살하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은 북부 스페인 왕국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14~15세기 스페인 왕국의 경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던 중 이사벨 여왕의 카스티야와 페르난도 왕의 아라곤이 수립한 연합왕국이 이베리아반도 영토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불안이 팽배했다. 왕실은 불안한 민심을 수습하고 기독교 국가의 위엄을 세우려는 의도로 기독교로의 종교 단일화를 제시했다. 이면에는 경제적 이유도 있었다. 전쟁으로 바닥난 국고를 채우는 데는 유대인 추방과 재산 몰수가 묘책이었다. 콜럼버스 신항로 탐사에 들어갈 왕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도 한몫했다.

추방령에 따라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은 유대인은 4개월 이내에 스페인을 떠나야 했다. 재산을 처분해서 가지고 나가는 것은 허용하면서도 화폐와 금, 은 등 귀중품은 가져 나갈 수 없다고 발표했다. 결국 재산은 놔두고 몸만 빠져나가라는 소리였다. 유대인들은 수레나 나귀에 짐을 싣고 태어난 나라를 떠났다. 그렇게 추방된 유대인은 17만명이나 되었다. 1480년 이래 종교재판을 피해 빠져나간 사람까지 합치면 약 26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10여 년 사이에 스페인을 떠났다. 당시 스페인에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이 빠져나갔는지는 학자에 따라 13만~80만 명까지 다양하다. 그 무렵 인구 3만이 넘는 도시가 흔치 않은 유럽에서, 26만 명은 대단한 숫자였다.

전문가들은 유대인이 스페인에 많았던 이유로 세 가지를 꼽는다. 첫째, 스페인 지역이 로마가 가장 먼저 식민화하고 본토와 같이 대우한 곳이어서 유랑 민족에게 기회가 많았다. 두 번째 이유는 구약성서의 12예언서 가운데 하나인 오바댜서 1장 20절에 나오는 “…예루살렘에서 스바랏으로 잡혀갔던 사람들은 남쪽 유다의 성읍을 차지할 것”이라는 구절의 ‘스바랏’을 스페인 지역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이슬람의 관용이었다.

1492년 8월 2일 세비야 근처 항구에서는 마지막으로 추방되는 유대인 무리가 배 위로 탑승하는 동안, 또 다른 세 척의 선박이 그 옆에서 출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선단이었다. 추방되는 유대인들의 후손을 위해 콜럼버스가 발견하게 될 신대륙이 피난처를 제공하게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출항이었다. 사실 콜럼버스의 계획은 몇몇 유력한 ‘마라노’(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들의 도움을 받아 실행될 수 있었다. 그의 배들은 유대인들에게서 압류한 돈을 가지고 건조되었고, 그의 선원 중에는 종교재판의 마수에서 자유를 얻고자 하는 적잖은 마라노들이 끼여 있었다.

스페인 영토에서 추방당한 유대인(세파르딤)의 30%는 굶어죽거나 노예로 팔렸다. 살아남은 유대인 중 10만 명은 값을 지불하고 인근 포르투갈로 입국했다. 하지만 그것도 5년간의 체류에 불과했다. 포르투갈의 마누엘1세 왕이 1496년 12월 포르투갈 내 유대인들과 무어인들에게도 추방령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1년의 여유 기간이 주어졌다. 그 사이 많은 유대인들이 강제로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했다.

포르투갈을 떠난 유대인들의 다음 행선지는 종교의 자유가 있고 비교적 안전한 북해 연안의 네덜란드였다. 그곳에는 1290년 영국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터를 잡고 상업과 교역 그리고 모직물 산업을 발달시킨 곳이었다. 이처럼 많은 유대인들이 네덜란드로 이주하면서 이베리아반도의 경제력이 중부 유럽으로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을 반겨 맞았던 오스만제국으로 향하고 또 나머지는 모로코와 알제리 등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베네치아 등으로 이주했다. 네덜란드의 유대인들 중 일부는 대거 잉글랜드로 이주해 새로운 세상에서 꿈을 펼쳤다. 경제학자 리카도와 영국 총리를 지낸 벤자민 디즈레일리 등의 조상이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또는 이탈리아를 거쳐 영국에 유입된 세파르딤(스페인계 유대인)이다. 위장 개종을 통해 눌러앉았던 5만여명의 유대인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계속되는 색출작업에 사로잡혀 처형당하거나 마땅한 선박도 없이 탈출하다 바다에 빠져 죽었다.

추방된 유대인들은 당시 스페인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고급 인력들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카스티야에서 재정과 금융을 장악하고 각 지방의 행정기관과 왕실의 요직에도 진출해 있었다. 당시 의사는 대부분 유대인이었으며 세금을 징수하는 사람도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주 납세자도 유대인이었다. 따라서 유대인 추방은 고급두뇌와 핵심 인재의 유출이었다. 결국 유대인 추방은 스페인 경제에 치명적이었다. 유대인들이 떠난 뒤 내수 부진과 더불어 국제교역 감소는 스페인 경제를 피폐케 했다. 이는 국고 수입 감소로 직결되어 스페인 왕국은 중남미에서 대량의 금과 은을 지속적으로 가져왔음에도 수 차례 파산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유대인은 크게 두 종류로 구분된다. ‘세파라디’와 ‘아슈케나지’이다. 세파라디는 이베리아반도에 살았던 유대인을 지칭하는데 ‘스페인계 유대인’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당시 유럽 대륙 내 물류의 수송 경로였던 라인강 변에도 상업과 유통에 종사하는 유대인들이 몰려 살았다. ‘독일계 유대인’이라는 뜻의 ‘아슈케나지’다. 12세기 십자군 전쟁 때 십자군들이 라인강 변을 타고 진군하면서 유대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하자 아슈케나지들이 대부분 동구와 러시아로 피난 가서 슬라브 민족과 같이 살았다. 이들은 오랫동안 슬라브 민족과 함께 살면서 피가 섞여 피부색이 검붉은 중동인에서 하얀 피부로 변해 세파라디와 쉽게 구별된다. 19세기 말 무렵 세계 유대인 인구 1127만 명 중 러시아에 가장 많은 390만 명이 살았고, 다음으로 폴란드에 131만 명, 헝가리에 85만 명이 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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