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피에트 몬드리안
by 김지지
추상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네덜란드 출신 화가 피터르 몬드리안(1872~1944)의 한 작품이 77년간 거꾸로 걸려 있었다는 주장이 최근 미술계에서 나왔다. 올해 몬드리안 탄생 150주년을 맞아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대규모 전시가 기획됐는데, 옛 자료를 검토하던 한 큐레이터가 1944년 화가의 작업실을 찍은 사진에 등장한 그림의 모습을 토대로 “그림이 뒤집혔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문제의 그림은 1941년작 ‘뉴욕 시티1’으로 빨강·파랑·노랑·검정색의 접착테이프가 불규칙한 격자무늬를 이룬 모양이다. 주장이 옳다면, 1945년 뉴욕현대미술관(MoMA) 첫 전시 당시부터 누구도 ‘오류’를 눈치채지 못한 셈이다. 몬드리안 개인사와 화풍을 알아본다.

부단히 변화하는 형태들 속에 감춰진 불변의 실재를 포착
20세기 추상화의 두 축은 피에트 몬드리안의 ‘차가운 추상’과 바실리 칸딘스키의 ‘뜨거운 추상’이다. 몬드리안이 엄격하고 질서 정연한 구도 위에 절제된 색의 사용으로 이지적인 추상을 추구했다면 칸딘스키는 특별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화면을 구성했다. 이들 말고 1명의 추상화가를 더 꼽으라면 ‘절대주의 추상’으로 유명한 카지미르 말레비치가 있다. 몬드리안(1872~1944)은 네덜란드에서 태어났다. 칼뱅파 초등학교 교장인 아버지가 종교적 환상에 매달려 가족을 돌보지 않은 탓에 집안은 가난을 면치 못했다. 경제적 어려움과 교육 부족, 그리고 절제된 금욕주의적 성장 배경은 어린 몬드리안을 자기만의 세계로 이끌었다. 몬드리안의 그림은 30대 중반이던 1907년 큰 변화를 겪었다. 형태보다 원색을 대담하게 사용하는 후기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접한 것이 계기였다.
1909년 가입한 ‘신지학 협회’도 화풍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신지학은 신의 심오한 본질이나 행위에 관한 지식을 신비적 체험이나 특별한 계시에 의해 알아가고자 하는 종교철학이다. 몬드리안은 신지학의 영향을 받아 모든 사물 속에는 그것을 관통하는 보편적인 본질이 내재해 있으며, 그 본질은 궁극적으로 조화로운 상태를 이루고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는 사람들이 쉽게 알아볼 수 없는 사물의 본질을 작품을 통해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화가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몬드리안은 1911년 프랑스 파리로 활동지를 옮겨 그곳에서 새로운 조형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비구상적 경향의 ‘나무’ 연작은 그 첫 시도였다. 몬드리안의 화폭에 등장하는 나무들은 서서히 형체가 사라지고 미로와 같은 선들로 구성되었다. ‘꽃피는 사과나무’(1912)는 몬드리안의 그림이 조용하면서도 단순한 추상적 표현으로 들어선 출발점이었다.
비대칭성의 균형과 조화 강조
몬드리안에게 자연은 불쾌하고 무질서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준 것은 1차대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몬드리안은 전쟁의 혼란기에 절실히 요구되는 조화와 질서를 예술 속에서 구현하고자 했다. 이른바 ‘신조형주의’다. 몬드리안은 이런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네덜란드 동료들과 결성한 ‘데 스테일(신조형주의·De Stijl)’ 그룹을 결성했다. 네덜란드어인 데 스테일은 ‘양식(The Style)’이라는 뜻으로 실제의 자연에는 없는 정확하고 기계적인 질서 창조를 지향점으로 삼았다. 몬드리안이 1920년 발간한 저서 ‘신조형주의’는 그 이론적 해명이다. 데 스테일은 이후 추상미술과 디자인은 물론 건축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신조형주의에 따라 몬드리안이 눈에 보이는 대상의 재현을 사실상 거부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이었다. 화면의 기본적 구조는 수직과 수평의 선으로 구획하고 분할된 면은 3원색(빨강, 노랑, 파랑)과 3비색(흰색, 검은색, 회색)으로 채웠다. 몬드리안은 남성적이고 역동적인 의지를 나타내는 수직선과 여성적이고 평온함을 나타내는 수평선이 적절한 위치에서 서로 교차할 때 ‘역동적인 평온함’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수직과 수평은 ‘구성 요소 상호 간의 순수한 관계만이 순수한 미를 낳는다’는 자신의 이념을 표현한 것이다.

몬드리안은 특수한 대상이 아니라 보편적인 조형 원리를 추출하는 데도 관심이 많았다. 부단히 변화하는 형태들 속에 감춰진 불변의 실재를 포착하는 게 목적이었다. 몬드리안의 그림에서 또 하나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비대칭성의 균형과 조화다. 중심축을 기준으로 서로 대칭으로 배치할 때 균형이 이뤄진다고 생각한 다른 화가들과 달리 몬드리안은 비대칭 속에서 조화와 균형을 찾았다. 이 비대칭의 균형은 수백 년 동안 군림해온 대칭 개념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했다. 이는 회화뿐 아니라 1920년대 건축, 인쇄, 응용미술 전반에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오늘날 몬드리안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격자형 그림은 1920년에 처음 발표된 ‘검정, 빨강, 회색, 노랑, 파랑의 구성’을 필두로 해서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1930)까지 다양하다. ‘구성’ 연작은 물체가 지닌 일체의 대상성과 구상성을 철저히 배제하고, 수평선과 수직선만으로 화면을 분할해 크고 작은 정사각형과 직사각형을 공간에 배치하는 그림이다.
말년의 대표작은 ‘브로드웨이의 부기우기’
몬드리안의 예술 세계가 또다시 변화를 맞은 것은 2차대전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1940년이었다. 뉴욕은 몬드리안을 경악케 했다. 자신의 그림처럼 수평(가로)과 수직(세로)의 선으로 반듯하게 구획 정리된 맨해튼 시가지, 꺼지지 않는 네온 불빛이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건물들, ‘옐로 캡’으로 불리는 노란 택시들이 지나다니는 거리는 밝고 활기에 넘쳤다. 전통에 지배당하고 있는 유럽의 곡선 건축과 녹색의 공원에서 염증을 느꼈던 몬드리안에게 기하학적 질서로 가득 찬 뉴욕은 신조형주의의 이상향이자 마음의 안식처였다. 하지만 몬드리안은 자신의 그림과 맨해튼이 다르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즉 소리가 없는 그의 그림과 달리 자동차 소리 등 온갖 소음이 뉴욕의 바둑판 같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소음으로 가득 찬 뉴욕의 거리는 나치를 피해 온 그에게 소음이 아니라 삶의 활기로 느껴졌다. 그때 그의 눈과 귀에 들어온 것이 재즈 음악 ‘부기우기’였다. 몬드리안은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초반에 걸쳐 미국에서 대중화된 부기 음악의 경쾌함과 즉흥성에 감흥을 받았다. 부기우기 음악을 접한 후 극도로 색채에 예민하고 수직과 수평에 대해서 엄격했던 몬드리안의 작품에 새로운 변화가 생겨났다. 빠르고 짧은 리듬이 자유롭게 변주되는 재즈처럼 그의 그림에도 예전에 없던 길게 이어지는 색띠 속에 작고 빠르게 반복되는 색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몬드리안은 그동안 추구해온 검정색의 수직선과 수평선을 과감히 지워버리고 무수한 노란색 직사각형과 정사각형, 그리고 소수의 회색 정사각형과 직사각형으로 정사각형의 화면을 분할해 그림을 그렸다. 그 대표작이 ‘브로드웨이의 부기우기’(1942~1943)다. 그림을 흰색과 교차하도록 함으로써 마치 명멸하는 거리의 불빛 같은 느낌을 준 부기우기 그림은 뉴욕에 대한 몬드리안의 찬가였다. 몬드리안은 이 작품을 완성한 후 급하게 다시 한 점을 더 그리다가 1944년 2월 1일 숨을 거뒀다. 이 미완성작이 마름모의 캔버스 위에 검정색의 수직선과 수평선 대신 정사각형과 직사각형의 조각들을 사용해 승리의 기쁨과 축제의 분위기를 나타낸 ‘빅토리 부기우기’다.

몬드리안 사후에도 그의 작품은 미학적 공간 연출을 위한 가구 디자인에서부터 건축, 그래픽디자인, 전자 제품, 의류, 영화, 음악 등 대중문화까지 파고들었다. 이브 생로랑은 1965년 ‘몬드리안 룩’을 발표해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2011년 프라다, 2012년 셀린까지 현대 패션의 흐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