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인류 최초로 달 유인(有人) 기지 건설을 목표로 한 달탐사선 ‘아르테미스 1호’ 발사 성공… 익스플로러1호(1958년)에서 아폴로17호(1972년)까지 미국의 우주 개발 여정

↑ 아폴로 11호에서 나와 표면을 밟고 있는 버즈 올드린을 선장 닐 암스트롱이 촬영한 사진. 암스트롱은 인류 최초로 달을 밟고도 달에서 찍힌 사진이 없다.

 

by 김지지

 

2022년 11월 16일 마네킹(더미)을 실은 아르테미스 1호가 발사에 성공했다. 이로써 1972년 아폴로 17호 이후 50여년 만에 인류가 다시 달에 발을 내딛기 위한 대장정을 시작했다. 아르테미스 프로젝트의 목표는 지금껏 인간이 한 번도 밟아본 적이 없는 달의 남극에 기지를 건설하는 것이다. 프로젝트는 1단계 달 궤도 무인(無人) 탐사, 2단계 유인(有人) 궤도 탐사, 3단계 달의 남극에 기지 건설, 마지막으로 달 궤도에서 화성 등으로 갈 우주 관문 설치 등 장기 플랜으로 이어진다. 1950년대 후반부터 아폴로 17호가 마지막으로 달에 착륙하고 지구로 귀환한 1972년까지 있었던 미국의 우주 개발 여정을 알아본다.

 

케네디 대통령, “인간을 달에 착륙시키겠다” 특별교서 발표(1961년 5월)

냉전이 최고조에 달하던 1957년 10월 4일, 구 소련이 인류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는데 성공하자 미 전역이 발칵 뒤집혔다. 교육제도를 자성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군사기술까지 소련에 추월당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다행히 미국도 3개월 뒤인 1958년 1월 31일 미 최초의 인공위성 ‘익스플로러 1호’를 발사함으로써 고조되었던 불안감을 떨쳐내고 새로운 우주비행 계획을 수립하는 작업에 착수할 수 있었다.

미 최초의 인공위성 익스폴로러 1호

 

미국은 1958년 7월 29일 미 항공우주국(NASA)을 설립하고 곧이어 인간을 우주로 보낼 1인승 유인 우주비행 프로그램의 첫 단계로 ‘머큐리 프로젝트’(1958~1963)를 발표했다. 1959년 4월에는 존 글렌(1921~2016)과 앨런 셰퍼드(1923~1998) 등 유인 우주선에 탑승할 7명의 우주비행사도 선발했다. 그러던 중 1961년 4월 12일 소련의 유리 가가린(1934~1968)이 ‘보스토크 1호’를 타고 108분 동안 인류 최초로 유인 우주비행에 성공함으로써 또 다시 미국을 경악케 했다. 미국은 한 발 늦긴 했으나 20여일 뒤인 1961년 5월 5일 ‘머큐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앨런 셰퍼드(1923~1998)가 ‘프리덤 7호’를 타고 미국인 최초로 14분 47초 동안 우주비행을 하는데 성공했다. 셰퍼드는 탄도비행의 정점인 지상 185㎞의 고공을 향해 날았다가 발사 8분 후 다시 대기권으로 진입해 귀환했다. 다만 셰퍼드의 비행이 유리 가가린의 궤도비행보다 한 단계 아래인 탄도비행이었기 때문에 구겨진 자존심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다. 탄도는 발사물이 공중을 날아가 포물선 궤도를 그리며 목적물에 이르기까지의 길이나 곡선을 뜻하기 때문에 셰퍼드는 지구를 돌지 못했다. 조바심이 난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 5월 25일 “1960년대가 끝나기 전 인간을 달에 착륙시키고 무사히 귀환시키겠다”는 특별교서를 발표하는 것으로 우주계획 의지를 천명했다.

미국은 두 차례의 유인 우주계획(머큐리, 제미니)에 더해 세 차례의 무인 달 탐사 계획(레인저, 서베이어, 루나 오비터)을 수립, 인간의 달 착륙 계획을 구체화했다. 더불어 우주비행사를 달에 착륙시켰다가 지구로 안전하게 귀환시키는 ‘아폴로 프로젝트’도 수립했다. 그러나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게 45t의 아폴로 우주선을 지구 중력에서 벗어나게 하는 강력한 로켓 개발이었다. 적당한 착륙 지점을 선정하기 위해 달 자체에 관한 충분한 사전지식을 모으고 달 환경에 적합한 장비 개발도 못지 않게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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