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역사상 첫 3선 대통령에 당선된 룰라… 과거 대통령 재임(2003~2010년) 때 실용정책 펼쳐 경이적인 경제성장과 빈부격차 해소 두 마리 토끼 잡았으나 부정부패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해
2022년 10월 31일 · zznz

↑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시우바
by 김지지
‘룰라’로 널리 알려진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전 대통령이 2022년 10월 30일 치러진 브라질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에서 50.9%의 득표율로,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을 힘겹게 따돌림으로써 브라질 역사상 첫 3선 대통령이 됐다. 룰라의 77년 삶을 쫓아가본다.
2002년 네 번째 도전 만에 대통령 당선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시우바(1945~ )는 빈농 출신 8남매 가정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중퇴한 후 구두닦이를 하다가 금속공장에 들어갔다. 14살 때 공장에서 사고로 왼쪽 새끼손가락이 잘리고 26살 때인 1971년 같은 공장에서 만나 결혼(1968년)한 만삭의 부인이 간염에 걸렸는데도 치료를 받지 못해 뱃속의 아이와 함께 떠나보내야 했던 아픔을 겪었다.
룰라는 1975년 10만명의 노조원을 둔 금속노조위원장에 당선되고 1980년 2월 산별노조와 좌파 지식인들을 규합해 노동자당(PT) 창당을 주도했다. 창당 후 브라질 사상 최대 규모의 파업을 주도하면서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었다. 이 과정에서 한 달간 투옥되기는 했지만 사실 그는 정치투사는 아니었다. 노조활동을 할 때도 허황된 슬로건이나 거창한 정치담론을 싫어했다. 그렇다고 자신의 뿌리를 잊지는 않았다. 거리의 언어로 노동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1984년부터는 대통령 직선제 쟁취 운동을 전개하고, 1986년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데뷔했다.

1989년 대통령 직선제가 관철되자 세 차례(1989, 1994, 1998) 대선에 도전했으나 모두 2위에 머무르는 고배를 마셨다. 절치부심 끝에 네 번째 도전한 2002년 10월 27일 대선에서 섬유재벌을 러닝메이트로 지명하고 온건중도적인 공약을 내걸어 61.3%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3전 4기 만에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가 당선되자 국내외 여론은 그가 급진 좌파에 치우친 정치를 펼칠 것으로 우려했다. 증시는 급락하고 환율은 급등했다. 외국 투자자들은 철수를 서둘렀고 부자들은 돈을 외국으로 빼돌리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룰라는 2003년 1월 취임하면서 두 가지를 약속했다. 하나는 “외채를 모두 상환하겠다”는 선언이고 다른 하나는 “브라질 사람 중 굶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대선 공약의 재확인이었다. 당시 브라질은 국제통화기금(IMF)에서 34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아논 상태였고 브라질 인구 1억 7600만 명 중 25%나 되는 4400만 명이 절대 빈곤층이었다.
취임 후 룰라는 포퓰리즘 정책을 펼칠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이념보다는 먹고 사는 현실이 중요하다며 실용적 전략을 펼쳤다. 선거 때 섬유재벌을 러닝메이트로 지명하고 취임 후 구 여권 인사를 중앙은행 총재로 임명한 데서 알 수 있듯 이념보다는 실용을 중시했다. 노동자당 내 급진 세력의 반시장주의 정책을 과감히 물리치고 ‘룰라노믹스’로 불리는 시장 친화적 정책을 선택했다. 좋든 싫든 신자유주의 노선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브라질의 현실을 감안한 행보였다. 집권 초기 측근의 뇌물 비리 등이 터졌을 때는 “부패 척결을 위해 필요하면 내 살부터라도 도려내겠다”며 청렴한 정치 문화 구축에 앞장섰다.

전통적 지지층이 “개혁의 배신자” 비난 퍼부었으나 흔들림 없이 자기길 걸어
그의 실용주의 노선은 전임 대통령 엔리케 카르도수 정부가 1999년 외환위기 후 시행하고 있는 정책들을 과감하게 계승하고 자유무역 등 시장경제적 기조로 이어져 기업과 외국 자본의 투자환경을 개선하는데 크게 효과가 있었다. 이는 당시 많은 남미 국가에서 새로 집권한 좌파 정부가 포퓰리즘으로 치달았던 것과는 다른 길이었다. 룰라의 전통적 지지층이 “개혁의 배신자”, “회색분자”라고 비난을 퍼부었으나 룰라는 흔들림이 없이 자기 갈길을 갔다.
룰라는 좌우를 포용하는 실용적 태도를 견지하고 신자유주의 노선을 채택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좌파 진영의 핵심 정책들까지 포기하지는 않았다. 대선 때 공약인 ‘브라질 사람이면 누구나 배를 곪고 잠자리에 들어서는 안된다’는 ‘포미 제루(Fome Zero) 즉 ’기아 제로‘ 정책은 그의 이념적 성향에 기반한 대표적인 정책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빈곤 가정에 생활보조금을 대대적으로 지원하는 ‘보우사 파밀리아(Bolsa Família)’를 추진했다. 사실 이 정책도 전임 우파 정부가 성안한 정책 가운데 하나로 이를 확대·개편한 것이다. 보우사 파밀리아는 저소득층 가구당 매월 34달러를 지원했다. 다만 아이들이 학교를 중퇴하면 현금 지원도 중단했다. 단기적으로 현금살포지만, 장기적으로 인간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정책으로 브라질의 저소득 계층이 30%가량 감소했다는 통계도 있다. 유엔개발계획(UNDP)도 불평등 수준이 20%가량 감소했다고 평가했다.
당시 브라질은 빚더미에 앉아 있었으나 룰라는 빈곤 퇴치 프로그램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전체 인구의 20%가량인 3000만명이 빈곤선(최저 한도의 생활이 유지되는 수입 수준) 위로 올라섰다. 교육 제도를 뜯어 고치고, 장학금 제도를 만들어 가난한 학생들에게도 고등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보조금은 빈곤층을 경제 소비자로 떠오르게 하고 결과적으로 서민 경제를 살리고 산업을 일으키는데 일조함으로써 복지의 선순환을 이뤄냈다.
룰라는 대통령궁에서도 수시로 나와 대중과 직접 소통했다. 2010년 12월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재임 8년간 670일 가량을 지방에서 보내며 노동자와 빈곤층을 만나 친근하고 직설적 화법으로 그들의 동참을 끌어냈다. 룰라는 화려한 수사를 동원하지 않고 진솔하게 반대파를 설득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15%의 의석을 지닌 노동자당을 이끌고도 12개의 야당과 정책 공조를 통한 연정 대통령의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었던 것도 투사보다는 협상가 기질이 강했기 때문이다.
룰라는 2006년 60.8%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하자 서민과 빈곤층에 나눠줄 성장의 파이를 키워나갔다. 이를 위해 2007년 1차 성장촉진계획(PAC)을 세우고 3년간 2360억 달러를 투입했다. 집권 마지막해인 2010년에는 PAC에 8830억 달러를 쏟아부었다. 이런 행보 역시 좌파 진영으로부터 비판을 받았으나 굽히지 않았다. 외교적으로는 다원주의를 추구했다. 베네수엘라의 반미 사회주의자 우고 차베스 대통령, 볼리비아의 좌파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은 물론 미국 등 선진국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2009년 10월에는 2016올림픽을 유치해 떠오르는 브라질의 위상을 세계에 확인시켰다.

재임 8년 동안 경제 성적표 경이적
룰라는 2010년 12월 31일 퇴임할 때까지 8년 동안 경제성장과 빈부격차 해소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했다. 그 덕에 퇴임시 국민 지지도가 87%에 달할 정도로 국민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았다. 이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지지도였다. 재임 8년 동안의 경제 성적표는 경이적이었다. 국내 총생산(GDP)이 2배 이상 증가해 2009년 스페인을 제치고 세계 8위에 올랐다. 외환위기에 몰렸던 1999년 당시 브라질의 외환보유액 170억 달러를 2010년 10배가 넘는 3000억 달러로 키웠다. 국제통화기금(IMF)에 진 빚도 다 갚아 브라질을 만성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탈바꿈시켰다. 고질적 문제였던 물가와 재정적자도 해결했다. 2000년대 초 연 12%에 달했던 물가상승률은 2010년 6% 이하로 안정되었다. 2003년 12.3%에 달했던 실업률은 2010년 6.9%까지 떨어졌다. 최저임금의 지속적인 인상 등 사회복지정책을 통해 1500만 개 이상의 일자리가 창출되고 빈곤층은 2003년 4400만명에서 2009년 2900만명으로 감소했다. 룰라가 집권한 2003∼2010년 8년간 브라질은 연평균 4%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때는 전 세계 국가 중 가장 늦게 침체기에 들어선 나라 중 하나였고 문 닫은 은행 하나 없이 1년 만에 그 충격에서 벗어났다.
룰라는 2010년 11월 그가 발탁한 자신의 비서실장 출신인 노동자당의 지우마 호세프 후보가 브라질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을 보고 그해 12월 말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미 워싱턴포스트지는 퇴임한 룰라의 3대 업적으로 브라질의 세계 8대 경제대국화, 빈곤층 2000만명 이상의 중산층화,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유치를 꼽았다. 재임 기간(2003년~2010년) 세계 유수의 언론은 그를 올해의 인물로, 또 표지 사진의 모델로 선정했다. 당시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그를 두고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정치인”이라고 추켜세웠다.

반면 이 모든 호성적이 2000년대의 원자재 수출 호조와 국제 경기 호황, 여기에 룰라가 추진한 공적자금 지원 및 신용확대 등으로 인한 내수확장의 결과일 뿐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비판자들은 ‘브라질 코스트’로 알려진 고비용 구조는 여전하고 고임과 높은 세율, 부족한 인프라, 관료 부패 등 브라질의 경쟁력을 갉아먹는 난제들도 전혀 해결하지 못했다며 룰라의 업적을 평가절하했다. 무엇보다 경제성장에 주력했던 탓에 범죄와의 전쟁에서는 실패했다는 평가는 뼈아픈 지적이었다.
실제로 집권 후 전 세계에 불어닥친 농산물·원자재 가격 급등과 잇따라 터진 대형 유전은 경기 호황의 바탕이 되었다. 당시 중국을 휩쓴 개발붐은 국제 원자재 수요를 폭증시켰고, 세계 2위의 철광석 수출국이었던 브라질은 큰 부를 누렸다. 대폭 늘린 복지 지출을 감당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부정부패 혐의로 580일 복역했으나 실형 무효 판결 받아
문제는 룰라 퇴임 후 국제 경기가 침체기에 접어들고, 원자재 가격이 하락하면서 자원 수출에 크게 의존하는 브라질 경제가 큰 타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호세프 대통령 취임 후 브라질 경제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런데도 당시 집권 노동자당은 복지 지출 규모를 유지했다. 결국 국가 채무가 늘고 재정 적자가 급증했으며 실업률이 급등했다. 삶이 팍팍해진 민심은 싸늘해졌다.
이런 와중에 브라질 사법 당국이 2014년 3월부터 국영 석유회사인 ‘페트로브라스’와 관련한 정치권 인사들의 뇌물수수, 돈세탁 등 비리 혐의에 대해 이른바 ‘라바 자투(Lava Jato·세차용 고압 분사기)’라는 이름의 고강도 수사를 시작했다. 수사가 확대되면서 호세프가 소속된 집권 노동자당의 핵심 인사들과 호세프 측근들의 연루 혐의가 줄줄이 드러났다. 2021년 2월 수사가 종료될 때까지 295명이 체포되고, 278명이 유죄를 선고받았다. 뇌물의 총 규모만 약 3조7000억 원이었는데 그중 1조 원이 국고로 환수되었다.
호세프와 룰라도 수사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호세프 대통령은 선거 직전 정부 재정적자를 감추기 위해 국가회계를 조작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2014년 재임을 위해 경제성적표를 좋게 보이려 이런 편법을 썼으며 그 결과 재선에 성공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석유 공기업 페트로브라스 관련 비리 혐의로 기소 위기에 처한 룰라를 구하느라 면책특권이 있는 수석장관에 임명해 여론도 악화했다. 여기에 최악의 경제 상황이 더해져 민심이 들끓었다. 2015년 브라질 GDP는 전년 대비 4%포인트 줄었고, 실업률은 2.6%포인트 늘었으며 물가는 8% 올랐다. 국가 채무는 1년 만에 21%가 느는 등 경기 침체가 이어지며 국민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그런 시기에 부패 혐의가 드러나자 여론이 폭발했다. 2016년 3월 호세프 탄핵을 위한 시위엔 브라질 전국에서 300만명이 모였다. 결국 호세프 대통령은 2014년 10월 재선에 성공하고도 2016년 8월 31일 의회 표결로 탄핵되어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이로써 브라질 좌파 정권도 14년 만에 좌초했다. 호세프의 탄핵은 재정회계법을 명백히 어긴데다, 이러한 위법을 통해 대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민이 등을 돌린 결과였다.
룰라는 재임 중 뇌물 수수 및 돈세탁 혐의로 2016년 9월 기소되었다. 2017년 7월 1심에서 9년 6개월, 2018년 1월 2심에서 징역 12년 1개월을 선고받아 2018년 4월 구속수감되었다. 룰라는 이전에도 부패 의혹을 받은 전력이 있었다. 2004년 브라질을 떠들썩하게 한 ‘멘살렁 스캔들’이다. ‘멘살렁’은 포르투갈어로 ‘매달 받는 많은 액수의 용돈’이라는 뜻이다. 당시 룰라의 노동자당은 소수당이었다. 따라서 연정을 해야 했는데 그러러면 다른 당 소속 국회의원들의 협조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그들에게 뇌물을 지급했다.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기업에 손을 벌렸다. 룰라와 노동자당은 국정을 이끌기 위해선 불가피했다고 변명했지만, 노동자당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상처가 생겼다. 룰라의 도덕성을 의심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그런데도 룰라는 2018년 대선을 앞두고 각종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렸다. 당시 여론조사 결과 옥중의 룰라는 33%의 지지를 받아 15%의 지지율로 2위를 차지한 사회자유당의 보우소나루 후보를 크게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출마자격을 박탈당해 2018년 10월 선거에서는 ‘열대의 트럼프’로 불린 극우 성향의 자이르 보우소나루가 55%의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다.
보우소나루는 2019년 1월 집권 이후 △소수자를 향한 혐오 발언 △70만명이 사망한 코로나19 방역 실패 △아마존 열대우림 훼손 등 갖은 논란에 휩싸였다. 부유층 감세와 민영화를 추진해 빈곤층 역시 크게 늘었다. 특히 코로나19 사태를 경시해 마스크 착용과 백신 접종을 거부하고, 경제적 피해가 크다는 이유로 사회적 격리도 반대해 브라질에서 코로나19 확진자와 사망자가 급증하도록 함으로써 국내외에서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브라질의 트럼프’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 ‘증오 정치’로 보수의 아이콘을 자처하며 강력한 지지 기반을 구축했다.
룰라는 2019년 4월 연방대법원이 2심 재판의 유죄 판결만으로 피고인을 수감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단하고, 2019년 7월 수사 당국자들이 룰라의 출마를 막기 위해 사건을 담당한 판사와 검사가 서로 담합했다는 내용의 텔레그램 대화가 유출되면서 복역 580일 만인 2019년 11월 8일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2021년 3월에는, 2심 무효 판결까지 받아 모든 정치적 권리를 회복하고 단숨에 차기 대선 유력 주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언론은 2심 무효 판결을 한 연방대법원 에드송 파싱 판사에 대해 곱지않은 시선을 쏟아냈다. 그는 대선 당시 호세프 지지 연설을 했던 룰라 측 사람이었다. 브라질의 연방 대법원 판사는 총 11명인데 대통령이 추천하고 상원의 승인을 통해 임명된다. 그중 룰라·호세프가 추천한 판사는 7명이나 되었다. “연방 대법원이 정파적 결정을 했다”는 비판이 나온 이유다.
룰라 진영은 룰라가 기득권층에 의한 사법 전쟁의 희생자라는 내용의 ‘위기의 민주주의’(2019년)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등 여론전을 펼치며 결속을 강화했다. 그리고 마침내 룰라는 12년만에 다시 대통령으로 돌아왔다.

룰라 승리의 의미와 앞날
룰라의 승리로 사상 최초로 중남미 주요 6개국(브라질·멕시코·아르헨티나·콜롬비아·칠레·페루)에 모두 좌파 정권이 들어서는 제2 ‘핑크 타이드(PINK TIDE)’가 완성되었다. ‘핑크타이드’(분홍 물결·Pink tide)는 1990년대 중남미에 온건 좌파 정권이 연달아 출범한 현상을 가리킨다. 빨강이 상징하는 정통 사회주의 좌파보다 연성 성향이었다는 뜻에서 ‘핑크’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1990년대 말~2000년대 말 중남미 10개국 정권을 좌파 정당이 잡아 반미 연합을 형성했던 것을 ‘핑크타이드 시즌1’로 부른다면, 10여 년 만에 ‘시즌2’가 본격화한 셈이다. 룰라는 당선 확정 기자회견에서 “두 개의 브라질은 없다. 증오로 물든 시간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국민 통합부터 호소했다. 가난과 기아 퇴치를 골자로 한 공공부문 개혁도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이라며 완수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경제 성장, 차별·불평등 극복, 여성 안전과 노동권 보장, 아마존을 비롯한 환경과 원주민 보호 등도 차례로 언급했다.
문제는 12년 전 ‘마법’이 앞으로도 통할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브라질의 2023년 경제성장률이 0.6%에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이다. 또 최대 교역국인 중국 경제가 주춤하면서 원자재 수출에도 어려움이 예상된다. 보수 세력이 득세하고 있는 의회와 상대해야 하는 등 보우소나루 정부 아래에서 강화된 정치 양극화와도 맞서야 한다. 특히 대선에서 가까스로 승리한 데서 보듯 그를 바라보는 국민 시선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게 가장 큰 걸림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