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세계를 불안에 떨게 한 ‘위기의 13일’

↑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쿠바로 향하는 소련 선박을 검색하는 미국 구축함

 

by 김지지

 

인류의 생명을 볼모로 한 미소 양국의 핵 도박에 전 세계 공포 느껴

1962년 10월 22일 오후 7시, 케네디 미 대통령이 TV와 라디오를 통해 “소련이 쿠바에 장거리 미사일 기지를 건설 중”이라며 “미국과 서방 세계의 안전을 위해 쿠바에 무기를 운반하는 선박에 대해 해상 봉쇄를 단행한다”고 발표했다. 1주일 전부터 미국의 극소수 정책 입안자들끼리만 대책을 논의해오던 ‘쿠바 미사일 위기’의 실체가 마침내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미국의 대쿠바 정책이 이렇게 가까스로 가닥을 잡긴 했지만 미국은 “평화냐 전쟁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여전히 곤혹스러웠고 세계는 인류의 생명을 볼모로 한 미소 양국의 핵 도박에 공포를 느꼈다. 케네디는 사안의 중대성을 의식해 ‘봉쇄(blockade)’ 대신 ‘격리(quarantine)’ 표현을 쓰긴 했지만 그것이 사실상 봉쇄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미국이 쿠바에 건설 중인 소련 미사일 발사 기지를 처음 포착한 것은 케네디의 중대 발표가 있기 8일 전인 10월 14일이었다. 그날 미국의 U2정찰기가 촬영한 항공사진을 분석한 결과, 쿠바 서쪽 4곳의 야자나무 숲속에서 소련의 미사일 기지가 건설 중이고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일류신28 폭격기가 조립중인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훗날 알려진 바로는 당시 쿠바에는 미사일 162기와 핵탄두 90기가 있었다. 미국과 145㎞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미국 동부의 주요 도시를 사정권에 넣을 수 있는 미사일 기지가 건설 중이라는 사실에 미 정부는 경악했다. 1961년 4월 17일 쿠바 망명객들을 훈련시켜 쿠바의 피그만 침공을 지원했다가 실패의 쓴잔을 마셨던 미국으로서는 이런 쿠바의 움직임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의 U2정찰기가 1962년 10월 14일 촬영한 쿠바 내 트레일러와 미사일 격납고 사진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이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기로 결심한 것은 1962년 5월이다.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피그만 침공을 받았던 쿠바의 카스트로가 흐루쇼프에게 쿠바 방어를 요청한 상황에서 미국의 전복공작으로부터 카스트로 정부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피그만 침공 실패로 국제적 망신을 당한 케네디는 카스트로 전복에 집착했다. 동생 로버트 케네디를 책임자로 하는 스페셜 그룹을 만들어 카스트로 전복(몽구스작전)에 전력을 투입했다. 1962년 2월에는 쿠바에 대해 전면적 경제봉쇄를 단행했다.

둘째, 미국에 대한 핵전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소련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은 물론 각종 중거리 미사일과 핵탄두 숫자에서 미국에 한참 모자랐다. 게다가 미국은 1962년 4월 이탈리아와 터키에 소련을 겨냥한 중거리 탄도미사일 주피터를 배치하는 것으로 소련을 위협했다. 이런 이유로 흐루쇼프는 미국에서 멀지 않은 쿠바에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함으로써 미국에 대한 핵전력 열세를 만회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셋째, 흐루쇼프는 쿠바 배치 미사일과 서베를린을 맞교환할 수 있다는 계산을 했다. 동독 내에 위치한 서베를린은 소련에게는 큰 골칫거리였으며 미소 냉전의 최전선이었다.

흐루쇼프와 카스트로는 1962년 7월 쿠바 미사일 배치를 위한 비밀협약을 맺었다. 카스트로는 미국이 터키와 이탈리아에 미사일을 배치했으니 양자 외교의 합법적 행위의 일환으로 공개적으로 배치하자고 제안했으나 흐루쇼프는 이를 거부하고 비밀 배치를 단행했다. 곧이어 흐루쇼프는 쿠바에 미사일 발사대를 설치하고 핵탄두와 미사일 부품들을 위장 반입해 현지에서 조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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