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쿠바로 향하는 소련 선박을 검색하는 미국 구축함
by 김지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2년 10월 6일 러시아가 핵무기를 우크라이나에 사용할 가능성을 거론하며 이를 ‘아마겟돈(Armageddon)’에 비유했다. 아마겟돈은 선과 악이 싸우는 ‘최후의 전쟁’을 뜻하는 기독교 용어로, 인류 종말을 초래할 정도의 대규모 전쟁을 가리킬 때 쓰인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뉴욕에서 열린 민주당 선거자금 모금 행사에서 “(우크라이나) 상황이 계속 이대로 가면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이래 처음으로 우리에게 핵무기 사용의 직접적 위협이 있는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바이든이 언급한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해 알아본다.
인류의 생명을 볼모로 한 미소 양국의 핵 도박에 전 세계 공포 느껴
1962년 10월 22일 오후 7시, 케네디 미 대통령이 TV와 라디오를 통해 “소련이 쿠바에 장거리 미사일 기지를 건설 중”이라며 “미국과 서방 세계의 안전을 위해 쿠바에 무기를 운반하는 선박에 대해 해상 봉쇄를 단행한다”고 발표했다. 1주일 전부터 미국의 극소수 정책 입안자들끼리만 대책을 논의해오던 ‘쿠바 미사일 위기’의 실체가 마침내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미국의 대쿠바 정책이 이렇게 가까스로 가닥을 잡긴 했지만 미국은 “평화냐 전쟁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여전히 곤혹스러웠고 세계는 인류의 생명을 볼모로 한 미소 양국의 핵 도박에 공포를 느꼈다. 케네디는 사안의 중대성을 의식해 ‘봉쇄(blockade)’ 대신 ‘격리(quarantine)’ 표현을 쓰긴 했지만 그것이 사실상 봉쇄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미국이 쿠바에 건설 중인 소련 미사일 발사 기지를 처음 포착한 것은 케네디의 중대 발표가 있기 8일 전인 10월 14일이었다. 그날 미국의 U2정찰기가 촬영한 항공사진을 분석한 결과, 쿠바 서쪽 4곳의 야자나무 숲속에서 소련의 미사일 기지가 건설 중이고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일류신28 폭격기가 조립중인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훗날 알려진 바로는 당시 쿠바에는 미사일 162기와 핵탄두 90기가 있었다. 미국과 145㎞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미국 동부의 주요 도시를 사정권에 넣을 수 있는 미사일 기지가 건설 중이라는 사실에 미 정부는 경악했다. 1961년 4월 17일 쿠바 망명객들을 훈련시켜 쿠바의 피그만 침공을 지원했다가 실패의 쓴잔을 마셨던 미국으로서는 이런 쿠바의 움직임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이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기로 결심한 것은 1962년 5월이다.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피그만 침공을 받았던 쿠바의 카스트로가 흐루쇼프에게 쿠바 방어를 요청한 상황에서 미국의 전복공작으로부터 카스트로 정부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피그만 침공 실패로 국제적 망신을 당한 케네디는 카스트로 전복에 집착했다. 동생 로버트 케네디를 책임자로 하는 스페셜 그룹을 만들어 카스트로 전복(몽구스작전)에 전력을 투입했다. 1962년 2월에는 쿠바에 대해 전면적 경제봉쇄를 단행했다.
둘째, 미국에 대한 핵전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소련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은 물론 각종 중거리 미사일과 핵탄두 숫자에서 미국에 한참 모자랐다. 게다가 미국은 1962년 4월 이탈리아와 터키에 소련을 겨냥한 중거리 탄도미사일 주피터를 배치하는 것으로 소련을 위협했다. 이런 이유로 흐루쇼프는 미국에서 멀지 않은 쿠바에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함으로써 미국에 대한 핵전력 열세를 만회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셋째, 흐루쇼프는 쿠바 배치 미사일과 서베를린을 맞교환할 수 있다는 계산을 했다. 동독 내에 위치한 서베를린은 소련에게는 큰 골칫거리였으며 미소 냉전의 최전선이었다.
흐루쇼프와 카스트로는 1962년 7월 쿠바 미사일 배치를 위한 비밀협약을 맺었다. 카스트로는 미국이 터키와 이탈리아에 미사일을 배치했으니 양자 외교의 합법적 행위의 일환으로 공개적으로 배치하자고 제안했으나 흐루쇼프는 이를 거부하고 비밀 배치를 단행했다. 곧이어 흐루쇼프는 쿠바에 미사일 발사대를 설치하고 핵탄두와 미사일 부품들을 위장 반입해 현지에서 조립했다.

미 정부, 기지 공격하자는 강경파와 외교적으로 철거시키자는 온건파로 갈려
미 정부는 소련 미사일이 쿠바에 배치된 것을 알게 되자 10월 16일 아침 국가안전보장회의를 긴급 소집했다. 그 자리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 비상실행위원회(EXCOMM·엑스콤)가 설치되었고 엑스콤은 연일 비밀 대응책을 논의했다. CIA 분석에 따르면, 미사일 발사대는 앞으로 10일 후면 거의 완성될 예정이었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쿠바의 핵 공격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다. 엑스콤은 미사일 기지를 즉각 공격하자는 강경파와 외교적으로 철거시키자는 온건파로 갈렸다. 케네디는 결정은 못했지만 “미국이 애매한 태도를 보이면 소련은 베를린을 비롯한 그밖의 지역에서 또 다른 모험을 시도할 것”이라는 견해에는 동의했다. 그것은 전쟁을 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공중 폭격과 해상 봉쇄를 두고 엑스콤은 여전히 둘로 갈렸고 케네디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미국의 B-47, B-52, B-58 등의 폭격기가 세계 곳곳에 분산된 기지에서 폭탄을 장전한 채 대기하고, 100여기의 B-52는 수백만t의 폭발력을 지닌 폭탄을 탑재한 채 대서양 상공을 비행했다. 케네디가 마침내 ‘해상 봉쇄’로 최종 결정을 내린 것은 10월 20일이었다. 그리고 10월 22일 대국민 발표를 했다. “기습작전으로 쿠바의 미사일 기지와 핵병기를 무조건 파괴할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미 전략공군사령관의 의견이 케네디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10월 24일부터 함정 180여 척, 군용기 1100여 기가 동원될 해상 봉쇄는 미 해군이 소련 선박을 정지시켜 무기 탑재 여부를 검색하는 방법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는 미소 간에 심각한 무력충돌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었다. 10월 23일 흐루쇼프가 쿠바에 대한 미국의 해상 봉쇄를 해적행위로 비난하며 소련 선박에 미국의 봉쇄를 무시하라고 지시하면서 긴장이 더욱 고조되었다. 소련 선박은 서서히 쿠바로 다가가고 있었고 소련 잠수함도 카리브해로 모여들었다. 중재에 나선 우 탄트 유엔 사무총장이 미국에는 ‘해상 봉쇄 해제’, 소련에는 ‘미사일 반입 중지’를 호소했으나 “미사일 철거가 우선”이라는 케네디의 거부로 합의를 끌어내지 못했다.
긴장이 더욱 고조되고 있던 10월 26일 쿠바의 카스트로가 쿠바 주재 소련 대사관을 찾아가 미군의 침공이 현실화될 경우 핵 선제공격을 하자고 요청했다. 하지만 그 무렵 흐루쇼프는 이미 미국과의 타협을 결심하고 있었다. 그날 흐루쇼프는 텔렉스 용지로 약 2m에 달하는 장문의 편지로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보장하면 미사일을 철거하겠다”는 뜻을 케네디에게 전했다. 27일에는 “터키의 미국 핵미사일 기지와 쿠바의 미사일을 서로 맞바꾸자”는 두 번째 편지를 케네디에게 보냈다.

쿠바로 향하던 소련 선박의 귀환으로 ‘위기의 13일’ 막 내려
이처럼 화해가 모색되던 10월 27일 쿠바 상공을 정찰비행 중이던 미국의 U2기가 쿠바에 설치된 소련의 지대공 미사일에 격추되면서 사태는 다시 긴박하게 돌아갔다. 공군이 보복공격을 주장했으나 케네디가 응하지 않아 파국까지는 가지 않았다. 훗날 알려진 일이지만 10월 27일 핵전쟁이 일어날 뻔한 위기의 순간도 있었다. 미 구축함이 소련 잠수함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소련 잠수함이 핵무기를 탑재한 사실도 모르고 폭뢰를 투하하자 전쟁이 일어난 것으로 착각한 소련 잠수함이 핵어뢰를 장착하고 대응태세에 돌입했던 것이다. 이 같은 위기상황에서 케네디는 흐루쇼프의 두 가지 제안 중 두 번째 편지는 거부하고 첫 번째 편지를 받아들인다는 답장을 보냈다. 흐루쇼프가 받아들일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케네디로서는 실패로 끝나면 공중 폭격을 주장하는 군부의 목소리를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위기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그러던 중 10월 28일 흐루쇼프가 모스크바 방송을 통해 미사일 철거와 쿠바로 향하던 소련 선박 16척의 귀환을 명령했다. 이로써 세계를 불안에 떨게 했던 ‘위기의 13일’이 가까스로 막을 내렸다. 미국은 다시는 쿠바 침공을 하지 않겠다고 공개 선언했다. 사태는, 쿠바에 남아 있던 소련 폭격기들이 떠나고 미국이 ‘격리’를 완전히 해제한 11월에 가서야 종결되었다. 미 여론은 케네디 대통령의 지도력에 박수를 보냈고 민주당은 11월의 중간선거에서 승리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63년 워싱턴과 모스크바 사이에 핫라인이 개설되고 핵전쟁을 피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1963년 8월 ‘제한적 핵실험 금지조약’(모스크바 조약)이 체결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