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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동두천 소요산] 기암괴석은 없어도 원효대사의 로맨스 생각하며 걷는 능선길과 조망이 일품이지요

↑ 공주봉 오르다가 데크에서 바라본 의상대(오른쪽)와 그 뒤 백운대 능선

 

by 김지지

 

☞ 내맘대로 평점(★5개 만점). 등산요소 ★★★ 관광요소 ★★★

☞ 9.2㎞(아스팔트길 3㎞ 포함)에 5~6시간

☞ 일주문~자재암~하·중·상 백운대~칼바위~나한대~의상대~공주봉~일주문

 

2022년 9월 추석 연휴 때 아내와 함께 경기 남양주 예봉산(683m)과 운길산(610m)을 연계하는 13㎞의 산행을 하고도 연휴 마지막날이 되니 또 다시 몸이 근질근질했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는데 불현듯 경기 동두천시 소요산이 떠올랐다. 전국의 많은 산을 오르고 서울에서 멀지 않은데도 이상하게 소요산(587m)과는 인연이 없었다. 가을단풍이 멋지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급경사에 험산이라는 풍설이 산행 의지를 꺾은 것 같다. 다른 이유도 있다. 경기 동부권에 소요산 정도 높이에 교통 편하고 산세 수려하고 조망이 트인 산들이 제법 많다 보니 우선 순위에서 자꾸 밀린 것도 작용했을 것이다. 나보다 전국 산을 더 많이 주유한 대학친구도 40여년 전 대학생 때 가본 게 마지막이라니 유인(誘引) 요소가 떨어지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소요산은 엄연히 산림청, 블랙야크, 월간산이 지정한 100대 명산이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직접 확인할 생각으로 2022년 9월 12일 아내와 함께 소요산으로 떠났다. 전철로 서울 시청역에서 1호선 종착역인 소요산역까지는 1시간30분 정도 걸리므로 교통 사정은 좋은 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승용차를 이용했다. 이른 아침 출발하면 길이 막히지 않고 산행 후 귀로도 편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소요산 등산로

 

■소요산 개요

소요산(587m)의 으뜸 매력은 화려한 가을 단풍이다. 여름철에는 발을 담가 쉬기에 적당한 계곡도 제법 발달했다. 암릉 바위 틈에 뿌리내린 노송들은 저마다 이리 휘고 저리 틀어져 소나무 특유의 모습을 자랑한다. 동두천시가 소요산의 이런 점을 내세워 “경기의 소금강(금강산)”이라고 자랑하지만 사실 그 정도는 아니다. 요즘은 전국 지자체마다 ‘00 소금강’ ‘00 금강산’이라며 지역 산을 홍보하는게 유행이다. 소요산은 가운데 계곡을 둘러싸고 능선과 봉우리들이 둘러쳐져 있어 원점산행이 적격이다. 산행은 하백운대~중백운대~상백운대~칼바위~나한대~의상대~공주봉으로 이어지는 500m대 높이의 능선을 따라 걷는 식으로 진행된다. 다만 상중하 세 곳 백운대는 봉우리라기보다 능선의 한 지점이므로 사실상 봉우리는 나한대, 의상대, 공주봉 정도다.

산세는 웅장하지도 않고 기암괴석도 없다. 다만 계곡과 폭포가 적당히 발달하고 조망도 그런대로 트여있다. 능선은 숲의 연속이다. 능선을 따라 부챗살로 도는데 5~6시간은 잡아야 한다. 산행 중 상대적으로 힘든 코스는 자재암→하백운대, 칼바위→·나한대·의상대, 의상대~공주봉 세 곳이지만 나무데크가 워낙 잘 되어 있어 크게 힘들지는 않다.

하백운대~중백운대 능선에서 바라본 나한대 의상대 공주봉(왼쪽부터)

 

■들머리~일주문~자재암

산행은 주차장에서 시작한다. 2000원을 받는 주차장은 의외로 길고 넓다. 동두천시가 안내하는 코스는 난이도에 따라 4개다. 1코스는 5.7㎞에 1시간 30분, 2코스는 6.5㎞에 2시간, 3코스는 7㎞에 3시간 30분, 4코스는 8.1㎞, 4시간이다. 이중 이번에 4코스를 걸어보니 일반 등산객에게 4시간은 다소 무리다. 동두천시 제작 지도로 총거리를 계산해보니 9.25㎞다. 주차장에서 일주문까지 아스팔트길이 왕복 3㎞이므로 순수 산행 거리는 6.25㎞다. 우리 산행 방식이 여유있게 산세를 구경하며 걷는 것이이서 점심·휴식을 포함해 6시간 걸렸다.

주차장에서 일주문까지 1.5㎞ 아스팔트길을 걷는데 20분 정도 걸린다. 중간에 요석공원이 있고 그 옆에 50㎝ 정도 높이의 요석공주 별궁지(別宮址) 표석이 세워져 있다. 안내판에는 소요산에서 이뤄진 원효대사와 신라 요석공주 간의 사랑 이야기가 적혀있다. 자세한 내용은 이 글 아래에서 소개한다. 일주문 현판에는 ‘소요산 자재암’이라고 씌어있다. 현판 뒤에는 ‘경기소금강’이라는 편액이 하나 더 걸려 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곧바로 원효폭포다. 폭포 옆에 원효굴이 있으나 이름만 굴일 뿐 깊숙하지 않다.

본격 산행은 일주문에서 100m 정도 올라간 곳의 삼거리에서 시작한다. 왼쪽은 자재암~하백운대(1.1㎞)로 이어지고, 오른쪽은 공주봉(1.3㎞)으로 오른다. 우리는 자재암 방향이다. 삼거리에서 왼쪽 백팔계단으로 올라가면 최근 만든 금강문이 있고 문을 지나면 곧바로 원효대로 불리는 전망대다. 수년 전에는 금강문 자리에 해탈문이 있었다. 전망대에 서면 계곡 건너편에 삐죽이 솟아있는 암봉이 보이는데 일부 블로그에 따르면 관음봉이란다.

소요산 일주문

 

원효대에 설치된 안내판에 “원효대사가 정진 중에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좌정하고 수도하던 장소”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수년 전 안내판에는 “이곳에서 수도하던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자살하려고 절벽으로 뛰어 내리려 하는 순간 문득 도를 깨우쳤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 온다”고 되어있다. 전망대(원효대)를 지나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추담선사 부도탑이 나오는데 설명이 없다. 추담선사(1898~1978)는 만년에 자재암 주지로 있으면서 많은 중창불사를 통해 현재의 자재암을 일군 고승이다. 부도탑 지나면 곧바로 자재암이다. 삼거리에서 15분 거리다.

자재암에는 대웅전, 삼성각, 요사채 2동이 있다. 답답하고 안타까운 것은 불교용품을 파는 함석판 가건물이 요사채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자재암 전경을 망가뜨리는 흉물로 보인다. 자재암 경내 끝에는 석굴을 파서 만든 나한전이 있고, 그곳에 부처님과 16나한이 모셔져 있다. 나한전 옆에는 석간수인 원효샘이 있다. 원효대사가 기거하면서 단물이 솟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이다. 나한전 옆에는 청량폭포도 있다. 사람이 서 있는 위치보다 아래로 떨어지는 게 특이하다. 청량폭포 이름도 얼마전까지는 옥류폭포였다. 이처럼 명칭과 유래에 상상의 스토리를 입혔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렇더라도 부침개 뒤집듯 수시로 바꾸는 건 스스로 격을 떨어뜨리는 것이니 신중해야 한다.

자재암 옆 청량폭포

 

■자재암~상백운대

자재암에서 하백운대까지 올라가는 0.65㎞ 급경사 길은 소요산에서 가장 힘든 코스다. 숨이 차 헐떡거리고 얼굴에 송글송글 땀이 맺힌다. 자재암에서 계곡 쪽으로 올라가 선녀탕을 거쳐 바로 중백운대로 올라갈 수 있으나 대부분 하백운대로 올라간다. 하백운대는 나한전 왼쪽의 돌계단으로 오른다. 곧이어 데크계단이 나타나는데 계속 가파른 급경사다. 데크가 끝난다 싶으면 다른 데크가 기다리고 또 끝난다 싶으면 또 다른 데크의 연속이다. 과거 데크 없던 시절에는 전국 유명산마다 급경사 길을 올라가야 해서 힘들었다. 소요산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렇게 데크를 완벽하게 설치해 놓으니 힘들었던 산을 남녀노소 누구나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소요산에는 급경사 곳곳마다 한결같이 데크가 조성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소요산은 대표적인 데크 수혜 산이다. 데크가 끝난 막판 지점에는 급경사 돌길과 흙길이 이어진다.

원효대(왼쪽)와 자재암에서 하백운대 오름길

 

자재암에서 40분을 올라가니 하백운대(440m)다. 봉우리가 아니라 능선이 지나가는 둔덕이다. 사방이 나무여서 조망은 없지만 안내판과 방향표지목은 자세하고 친절하다. 하백운대는 입장료를 내지 않고 주차장 아래 왼쪽에서 올라오는 등산객과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하백운대에서 중백운대까지는 20분 정도 걸리는 오르막이다. 자재암~하백운대 코스만큼 급경사는 아니다. 중간중간 조망이 트이는데 앞으로 우리가 가야할 나한대, 의상대, 공주봉이 저 멀리서 고개를 내밀고 있다. 암릉 바위 틈에 뿌리 내린 소나무가 매력적이다. 선명한 초록에 반질반질하다. 길게 늘어진 낙락장송 가지도 계곡 쪽으로 뻗어있다.

중백운대(510m) 역시 능선의 한 지점이다. 중백운대에서 상백운대(559m)로 이어지는 능선길은 하백운대~중백운대 코스에 비해 완만하고 호젓하다. 중백운대~상백운대 능선에 선녀탕과 선녀폭포를 지나 자재암으로 내려가는 안내목이 세워져 있다. 중백운대~상백운대는 20분이면 족하다. 동두천시 설명에 따르면 조선 태조가 ‘왕자의 난’으로 실각한 후, 소요산 아래에 별전을 짓고 머물며 자주 백운대에 올라 경치를 즐기며 회한을 달랬다고 하는데 조선왕조실록에 근거한 것이다.

중백운대(왼쪽)와 상백운대

 

■칼바위~나한대~의상대~공주봉~원점회귀

상백운대 지나면 곧바로 칼바위(530m) 능선이 시작된다. 500m 거리의 크고작은 편마암 길을 천천히 지나는데 20분 정도 걸린다. 칼바위 능선을 걷는 것은 소요산 산행의 색다른 재미다. 다만 날선 느낌을 주는 ‘칼바위’라는 이름과 달리 험하거나 위험하진 않다. 물론 조심하지 않으면 삐끗하거나 다칠 수도 있다. 울퉁불퉁 바위 위를 걷는 것이어서 속도도 느리다. 칼바위 능선에는 바위 틈에 뿌리 내린 후 온갖 비바람을 견디면서 구불구불해진 노송들이 줄지어 서 있다. 중간에 칼바위를 피하는 우회길이 있으나 우리는 칼바위 능선을 즐기려고 일부러 칼바위를 고집했다.

소요산 칼바위 능선

 

칼바위 능선을 지나 안부로 내려가면 선녀탕으로 이어지는 하산로 안내도가 있다. 흙길이지만 급경사여서 만만치 않다. 안부에서 길게 뻗어올라간 0.6㎞의 급경사 데크를 타고 20분 쯤 올라가면 소요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나한대(571m)다. ‘나한’이란 불교를 수행해 해탈의 경지에 이른 수행자를 뜻한다. 나한대 바로 아래 안내판에 나한대 방향 표시가 없고 <의상대 우회 → 0.2㎞>로만 되어 있어 나한대를 거치지 않고 의상대로 우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안내판 왼쪽 바로 위가 나한대이므로 나한대를 넘으면 의상대로 바로 이어진다. 우리도 모르고 지나쳤다가 누군가 알려주어 나한대를 거쳐 의상대로 진행했다. 동두천시가 무슨 생각으로 안내판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궁금할 뿐이다. 나한대에서는 지척의 의상대가 한 눈에 바라보이고 하·중·상백운대와 공주봉도 조망할 수 있다.

나한대에서 의상대까지는 0.2㎞에 10분 거리다. 물론 살짝 내려갔다가 다시 살짝 올라가야 한다. 의상대(587m)는 거대 암릉으로 이뤄진 소요산의 주봉이다. 사방팔방 막힘이 없다. 가까이는 동두천시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고 우리가 지나온 하·중·상 백운대 능선이 길게 뻗어있다. 멀게는 감악산, 왕방산, 불곡산, 도봉산, 북한산 등이 조망된다는데 우리같은 아마추어 산행객 눈에 보일리 없다. 원효의 전설이 깃든 소요산의 최고봉 이름이 왜 의상대일까. 알려진대로 원효보다 8살 아래 의상은 원효와 당나라 유학길에 동행했다가 원효는 해골물을 마시고 도중에 되돌아왔고 의상은 유학을 끝까지 마쳤다. 이후 원효는 민초들에 섞여 살았지만 의상은 유학파 국사(國師)의 높은 지위를 누렸다. 우리나라 산들엔 원효봉(대)과 의상봉(대) 이름이 많다. 서울 북한산과 부산 금정산에도 원효봉과 의상봉이 나란히 마주보고 있다. 위에서 소개했듯이 원효대는 자재암 가기 전 전망대를 이른다.

공주봉에서 내려다본 동두천시

 

의상대에서 공주봉(526m)까지는 1.2㎞에 20~30분 걸린다. 이곳 역시 안부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간다. 공주봉에는 넓은 나무데크가 있어 쉬어가기에 좋다. 요석공주 이름에서 따왔을 공주봉에 서면 저 멀리 ‘불수도북’의 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들어온다는데 여전히 내 눈엔 보이지 않는다. 불수도북은 서울을 에워싸고 있는 북동쪽의 불암산 수락산 도봉산 북한산을 말한다. 동두천 시내가 가까이 내려다보인다. 공주봉 하산길도 가파르지만 흙길이어서 나무데크는 없다. 중간 쯤 넓고 편평한 바위 쉼터가 있는데 청초한 색의 소나무 몇 그루가 자라고 계곡 건너편으로 상중하 백운대 능선이 올려다보인다. 앉아서 감상하는 맛이 제법 쏠쏠하다. 공주봉에서 1㎞ 급경사 길을 걸어내려가니 물이 콸콸콸 쏟아지는 계곡이고 다시 0.4㎞를 걸어내려가면 들머리였던 일주문이다. 공주봉에서 1시간 정도 걸린다.

공주봉에서 하산하다가 만난 바위 쉼터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원효(617~686)는 천촌만락(千村萬落)을 돌아다니면서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노래와 춤으로 교화했다. 고려 중기 문신인 이인로(1152~1220)의 ‘파한집’에 “원효가 백정 노릇하고 술장사하는 시중 잡배들 속에 섞여 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원효의 행동은 파격 그 자체였다. 원효의 거침없고 적극적인 성격은 요석공주와의 만남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다만 요석공주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신라 태종무열왕(재위 654~661년)의 둘째 딸이라고 하지만 정확하지 않다. 그런데도 원효가 열반하고 수백년 후 기록된 각종 문헌에는 태종무열왕의 딸로 기록되어 있다.

이종상 화백이 제작한 원효대사의 영정. 표준영정으로 지정될 만큼 그 가치를 인정 받는다.

 

원효가 열반하고 수백년 후 활동한 일연(1206~1289)의 ‘삼국유사’ 권4 의해5 ‘원효불기’에는 요석공주와의 만남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원효가 어느 날 거리에서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허락해줄 것인가? 내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찍을 터인데”라고 미친 듯이 노래했다. 이 사실을 알게된 태종무열왕은 ‘자루 없는 도끼’에서 ‘도끼’가 남편을 잃은 과부를 뜻하고, ‘하늘을 받칠 기둥’은 현인을 뜻한다고 생각해 궁중 관리에게 칙명을 내려 원효를 찾아 데려 오라고 했다.  마침 그에게는 남편이 백제와 전투에서 전사한 후 홀로 요석궁에 살고 있는 공주가 있었다. 관리는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를 지나는 원효를 만났는데 원효는 일부러 물에 뛰어들어 옥을 적셨다. 관리는 원효를 궁으로 데려가 옷을 갈아입히고 말리게 하면서 궁에 머물게 했다. 그러던 중 공주가 임신해 아들을 낳았으니 신라 10현의 한 명이자, 대학자로 이름을 떨친 설총이다. 다만 원효가 언제 요석공주를 만났는지 그 정확한 시기는 알 수가 없다. 기록을 통해서 그 시기가 무열왕 때이며, 원효가 37세에서 43세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야사에 따르면 원효는 어느날 홀연히 요석궁을 떠나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소요산에 은거지를 마련해 수행에 전념했다. 이 사실을 알게된 요석공주가 아들 설총을 데리고 소요산으로 찾아와 산 아래에 별궁을 짓고 원효가 수도하는 원효대를 향해서 삼배를 올렸다. 하지만 둘은 끝내 함께 하지 못했다. 그 때의 별궁터가 일주문 아래에 표시된 요석궁지(瑤石宮址)다.

다만 둘의 사랑 얘기는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후세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원효에 관한 가장 정확한 자료로 꼽히는, 9세기 초 원효대사의 손자 설중업이 원효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보이는 서당화상비(誓幢和上碑)와 10세기 말 중국 송대의 승려가 저술한 중국과 한국의 고승 전기인 ‘송고승전(宋高僧傳)’의 원효전에도 요석공주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일연도 삼국유사에서 ‘향전(鄕傳)’이라는 책을 인용하면서 원효와 요석공주의 로맨스를 소개하고 있지만 일연 스스로 기이한 일이라고 기록했다.  삼국사기 ‘설총전’에도 설총의 어머니가 공주였다는 기록은 없다.

일주문 아래 요석공원과 요석공주 별궁지(왼쪽)

 

■자재암 

자재암 창건에 관해서는 7세기 중반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으나 정확한 연대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자재암 본사인 남양주시 봉선사에서 간행된 ‘봉선사본말사지’(2015년 간)에는 신라 태종무열왕 1년(654년)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원효가 소요산 아래에 초막을 짓고 수행에 정진하고 있을 때, 나물을 캐다 길을 잃었다는 아름다운 한 여인이 나타나 원효를 유혹했다. 원효가 “나는 이미 자재무애(自在無碍)의 경지에 이르렀다”며 유혹을 물리쳤으나 뒤늦게 그 여인이 관세음보살이었음을 깨닫고 자재무애의 수행을 쌓았다는 뜻에서 그곳에 절을 짓고 자재암이라 했다는 설명이다. 자재무애란 행동이나 생각에 막힘이나 걸림이 없고, 번뇌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상태를 뜻한다.

그런데 전국 산을 돌아다니다 보면 원효가 창건했다는 절이 너무 많다. ‘원효’를 직접 편액으로 끌어다 쓰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여러 연기담(緣起談)을 내세워 원효와의 인연을 알리는 사찰이 전국적으로 100여 군데에 이른다. 고승과 인연을 내세워야 사격(寺格)이 높아지기 때문일 것이다. 원효 창건 후 잇따른 화재로 소실과 중창이 반복되다가 1950년 6·25전쟁으로 또다시 폐허가 되자 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 말까지 현재 대웅전과 요사채를 건립했다.

소요산 자재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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