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충정공 민영환 동상 충정로 이전] 을사조약에 울분 참지 못해 자결한 민영환의 순국(殉國), 전국적으로 연쇄 순국 투쟁 불러

↑ 조선말, 궁중화원이나 유명화가에 의해 제작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민영환의 초상(왼쪽)과 육군부장 제복 차림의 민영환 사진

 

by 김지지

 

1905년 11월 18일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분노한 민영환은 단도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결했다. 고종은 민영환에게 ‘충정(忠正)’ 시호를 내렸고, 서울시는 해방 직후인 1946년 10월, 민영환의 별장이 있던 지역의 도로에 민영환의 시호를 따서 충정로 1,2,3가로 개명했다. 그곳의 일제 지명은 죽첨정(竹添町) 1,2,3 정목(丁目)이었다. 현재 충정로는 충정로 사거리부터 서대문역 교차로까지, 약 800m 길이의 왕복 8차선 도로다. 충정공 동상도 1957년 서울 종로구 안국동 사거리에 처음 세워졌는데 동상은 1970년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옆으로, 2003년 다시 종로구 조계사 옆 구 우정총국 터 근처로 옮겨졌다. 그러다가 2022년 8월 30일 충정로의 일부인 서대문구 종근당 건물 앞으로 옮겨져 비로소 이름의 주인을 찾았다.

충정로로 옮겨진 민영환 동상

 

자유와 독립 회복 촉구하는 유서 남겨

1905년 11월 18일 새벽 2시에 체결된 을사조약은 연쇄적인 순국 투쟁을 불러왔다. 최초 순국자는 돈의문 밖 배씨 성을 가진 평민이었다. 그는 며칠을 통곡하다가 자살했다. 상류계층인 사대부의 순국 중 국내·외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순국과 항거의 도화선이 된 죽음은 민영환(1861~1905)의 자결이었다. 민영환은 경기도 용인에서 을사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바로 상경해 전 좌의정 조병세와 대책을 논의했다. 조병세는 고령으로 낙향했다가 소식을 듣고 79세 노구를 이끌고 상경한 터였다. 두 사람은 11월 27일 조병세를 소두(疏頭·상소문에서 맨 먼저 이름을 올린 사람)로 하고 관료들이 연명한 상소문을 가지고 궁궐로 들어가 을사5적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를 호소했다. 일제가 고종을 협박해 두 사람을 궁궐에서 쫓아냈으나 조병세는 대한문 밖에서 석고대죄하며 상소 항쟁을 계속했다.

민영환은 계속된 상소 활동으로 쇠약해진 몸을 추스리기 위해 서울 공평동에 사는 의관 이완식의 집을 찾아갔으나 국권 침탈의 울분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비장한 결심을 했다. 그리고 11월 30일 아침 6시쯤 단도로 자신의 배를 찔렀다. 칼이 작아 깊이 들어가지 않자 다시 목을 찔러 자결했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다음날 유족이 시신에 수의를 갈아입히려고 할 때 옷소매에서 서구식 명함 앞뒷면에 한자로 깨알같이 적어놓은 유서 몇 장이 발견되었다. 한 장은 “영환은 죽어도 아니 죽는다(死而不死)”면서 백성들에게 자유와 독립을 회복할 것을 촉구하는 유서였고 다른 한 장은 청국·영국·미국·프랑스·독일 공관 앞으로 보낸 유서 겸 편지였다. 민영환의 자결 후 을사조약에 서명한 하야시 곤스케 일본공사를 비롯해 각국 공사들이 조문했다. 백성들도 남녀노소와 신분의 구분 없이 영전에서 곡을 했으며 기생도 수십 명이 몰려와 땅을 치며 통곡했다. 고종도 한참 동안 목 놓아 울었다.

민영환이 유서를 적어놓은 서양식 명함

 

민영환의 순국은 백성들의 추모 열기를 뜨겁게 하고 반일 의식을 부추겼다. 5번이나 상소를 올린 의정부 참찬 이상설은 맨상투에 흰 명주 저고리만을 걸친 채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국가와 백성을 이 지경에 빠뜨렸으니 만 번 죽어도 마땅하다”며 땅에 머리를 내리찧었다. 유혈이 낭자한 그 현장을 지켜본 사람 중에는 민영환의 집에 조문을 갔던 김구도 있었다. 고종은 민영환에게 ‘충정(忠正)’ 시호를 내리고 최고 훈장을 추서했다.

민영환의 피묻은 옷과 칼은 민영환 집 뒷방에 봉안되었다. 방문을 잠가둔 지 7개월이 지난 1906년 7월 어느 날 가족이 문을 열어보니 4줄기, 9가지, 48잎사귀가 돋은 푸른 대나무가 마룻바닥 틈으로 솟아올라 있었다. 이 사실이 대한매일신보 7월 17일자에 보도되면서 경향 각지에서 인파가 밀려들었다. 이후 대나무는 민영환의 피에서 자라났다고 해서 ‘혈죽(血竹)’으로 불렸다. 민영환의 집은 혈죽을 구경하고 그의 넋을 기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문인들은 시를 짓고 노래를 지어 민영환의 충절을 되새겼다. 박은식도 ‘혈죽기편’을 지어 당시 상황을 기록했다. 민영환의 가족은 혈죽을 광목천에 싸서 다락방에 몰래 보관하다가 1962년 고려대 박물관에 기증했다.

애국계몽단체인 대학구락부에서 일본인이 운영하는 사진관에 의뢰해 촬영한 혈죽 사진(왼쪽)과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혈죽도(1906.7.17)

 

민영환의 부인이 광목천에 싸서 다락방에 몰래 보관해왔던 혈죽. 바깥 오동나무에는 조동처가 쓴 글이 있는데 “이 혈죽이 1906년 2월 자라나서 9월에 시들었다”고 되어있다.

 

민영환의 자결, 순국 투쟁 연쇄적으로 불러일으켜

민영환이 목숨을 끊자 민영환과 함께 상소운동을 펼친 조병세와 전 이조참판 홍만식도 민영환이 자결한 다음날(12월 1일) 순국에 동참했다. 뒤를 이어 전 대사헌 송병선이 순국하고 학부주사 이상철과 시위대 군인 김봉학 등 각계각층에서도 순국이 이어졌다. 민영환의 집 행랑에 거처하던 인력거꾼은 뒷산에서 소나무에 목을 매 자결했다. 이렇게 자결한 사람이 1905년 11~12월에만 10명이 넘었다.

조병세는 거듭된 상소에도 일본 헌병에 의해 강제로 가마에 태워지자 국난을 바로잡을 수 없음을 통분하고 가마에서 극약을 마셔 자결했다. 당시 종로 네거리에서 거행된 장례식에는 수천 명의 군중이 우국충정의 정신을 기렸다. 홍만식은 을사조약 전에도 두 차례 자살을 기도했었다. 1884년 동생 홍영식이 갑신정변의 주모자로 사형을 당하고 이에 충격을 받은 아버지까지 자살하자 그 역시 자살을 기도한 바 있고 1895년 민비가 시해당한 을미사변 때도 분을 참지 못하고 음독자살을 시도했다. 이후 그는 나라에 큰 죄를 지었는데도 살아 있다며 ‘미사신(未死臣)’을 자처하다가 12월 1일 끝내 자결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했다.

송병선 역시 통분을 참지 못하고 세 차례에 걸쳐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그는 대사헌까지 지낸 후 1877년부터 1903년까지 총 23차례에 걸쳐 관직에 천거되었지만 모두 거부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 진력했다. 을사조약 후에는 제자들과 함께 상경해 고종을 직접 대면한 자리에서 국망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대책으로 을사5적 처단, 인재등용, 나라의 기강 확립 등을 내용으로 하는 ‘십조봉사’를 올렸다. 고종에게서 아무런 언질이 없어 며칠 동안 서울에 머무르며 재차 고종을 독대하고자 했으나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다. 일제는 이런 송병선의 행동을 눈엣가시로 여겨 대전으로 압송했다.

송병선은 12월 29일 유서 성격의 상소를 쓴 뒤 후손과 제자를 모아 “도(道)의 수호를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는 마지막 유지를 남기고 1905년 12월 30일 음독 후 숨을 거두었다. 동생 송병순도 한일합방과 일제의 회유에 항거하며 1912년 자결함으로써 형제 모두 순국열사가 되었다. 김봉학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군인으로서 이를 막지 못한 것을 개탄하며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계책을 짜고 있다가 일이 누설되어 실패하자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고 학부주사 이상철은 12월 3일 원통함을 참지 못하고 자결했다.

조병세가 자결하기 2년 전인 77세 때 조선후기 초상화가 채용신이 그린 조병세 초상화(왼쪽)와 송병선 초상

 

순국에도 불구하고 당대 평가 마냥 우호적이지 않아

민영환은 민비 집안인 여흥 민씨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 큰아버지 민태호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대원군의 부인 민씨가 민영환의 고모이므로 민영환과 고종은 내외종 간이었고, 민영환의 둘째아버지 민승호가 민비의 부친 민치록의 양자(따라서 민승호는 민비의 양오라비)여서 민영환은 비록 민비와 피를 잇지는 않았지만 민비의 조카였다. 민영환은 20대에 선혜청 당상인 생부 민겸호가 임오군란(1882) 와중에 척살되고 양부인 민태호는 갑신정변(1884) 때 개화당 청년들에게 살해되는 개인적인 비극을 겪었다. 둘째아버지 민승호는 이미 1874년 뇌물로 위장된 폭약 상자를 열다가 일가족과 함께 폭사한 상태였다. 이처럼 민씨 일족의 잇따른 죽음은 그들의 가렴주구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짐작케 해주는 대목이다.

민영환도 민씨 가문의 후광에 힘입어 출세 가도를 달렸다. 생부와 양부의 죽음 후에도 이조참판, 예조판서, 병조판서 등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동학농민운동 때는 내무부 독판으로 진압에 나섰다. 1895년 을미사변 직전에는 주미 전권공사에 임명되었으나 민비의 시해로 부임하지는 못하고 낙향했다. 민비의 죽음으로 고종의 친정 이후 22년간 유지되어온 민씨 일족 세력의 세도정치는 사실상 종언을 고했다.

민영환은 낙향한 뒤에도 고종의 신임이 두터워 두 차례나 세계를 순방했다. 첫 번째는 1896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축하 특명전권대사로 파견된 해외 순방이었다. 특사단은 1896년 4월 1일 인천 제물포를 출발해 군함·상선·열차 등을 갈아타며 상해~요코하마∼밴쿠버∼뉴욕∼런던∼베를린∼바르샤바 등지를 거쳐 5월 20일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10월 21일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장장 6개월 20일 동안 민영환이 거쳐간 나라만 11개국에 달했다. 그때의 견문을 기록으로 남긴 ‘해천추범’은 유길준의 ‘서유견문록’과 더불어 당대 제일의 세계일주 기록으로 평가되고 있다.

민영환은 귀국 후 곧바로 군부대신에 임명되어 조선군의 신식 훈련에 박차를 가하다가 1897년 1월 영국·독일·러시아·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유럽 6개국의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어 1897년 3월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 축하식에 참석하라는 특명을 받았다. 일행은 3월 24일 인천을 떠나 상해∼나가사키∼홍콩∼인도~수에즈운하~오데사항(흑해)∼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거쳐 6월 5일 영국 런던에 도착, 빅토리아 여왕을 알현한 뒤 미국을 거쳐 7월 17일 귀국했다.

1896년 러시아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축하사절로 참석했을 때 러시아에서 촬영한 사진

 

민영환은 두 차례 해외 순방을 하며 각국의 정치·경제·문화·사회·교육·군사상의 발전 등을 눈여겨보았다. 이를 통해 정치제도를 개혁하고 민권을 신장시켜 국가의 근본을 공고히 할 것을 수차례 고종에게 건의했다. 민영환은 1902년 11월 해외 이민사업을 관장하는 ‘수민원’을 설립하고 총재를 맡아 2년간 6,700여 명의 이민자를 하와이로 보내는 데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 후에는 내부대신과 학부대신으로 활동하면서 친일 각료들과 대립하다가 한직인 시종무관장(경호실장)으로 밀려났지만 반일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5년 7개월간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이승만에게 고종의 밀지를 주어 1904년 11월 미국으로 떠나게 한 것도 민영환이었다.

이상의 내용으로만 보면 민영환은 애국·순국 열사로 추앙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당대 평가는 마냥 우호적이지 않았다. 전봉준이 중앙 탐관오리의 대표적 인물로 민영준·고영근과 함께 지목한 인물이 민영환이기 때문이다. 민씨 일가를 부패 지도층으로 몰아붙여야 하는 정치적 입장에 섰던 전봉준의 발언만으로 민영환이 부패한 관리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대한제국을 파멸로 이끈 집단 중 하나인 민씨 일족의 핵심 인물이라는 점에서 전봉준의 지적이 완전히 틀렸다고만 볼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

민영환 장례식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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