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연인과 부부 ⑱] 고려 말 공민왕의 애달픈 사랑… 고락 함께 한 원나라 출신 노국 공주가 결혼 16년 만에 생긴 아이 낳다 죽자 국정 등한시 하고 변태적 행동에 빠져

↑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를 그린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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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고려시대 33명 왕 중에서 태조 왕건 다음으로 유명한 왕이 31대 왕 공민왕(재위 1351~1374)이다. 고려말 100년에 걸친 원나라(몽골)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과감하게 ‘반원(反元) 자주 정책’을 단행한 개혁군주 이미지에 원나라 출신 부인(노국대장공주)과의 애틋한 사랑, 요승으로 알려진 신돈의 등용 등 드라마틱한 요소들이 많기 때문이다. 공민왕의 아버지는 충숙왕(제27대)이고 동복형은 충혜왕(제28대)이며 2명의 조카(충혜왕의 아들)는 충목왕(제29대)과 충정왕(제30대)이다. 공민왕은 2명의 조카 뒤를 이어 제31대 왕으로 즉위해 원나라의 몰락을 지켜봤다.

 

■결혼과 즉위

공민왕(1330~1374)이 태어난 무렵은 1259년부터 1356년까지 97년간 계속된 원나라의 고려 지배 기간이어서 원나라의 내정간섭이 한창이었다. 많은 고려 왕족들이 볼모로 원나라에서 생활하고 고려 왕들은 원나라 공주와 결혼해 부마(임금의 사위)가 되었다. 공민왕도 관례에 따라 11살 때인 1341년부터 원나라 수도 연경(지금의 북경)에서 생활했다. 그러던 중 친형 충혜왕(28대)이 재위 5년 만인 1344년 사망했다. 7살의 조카가 충목왕(29대)으로 즉위하고 공민왕은 강릉대군으로 봉해졌다. 그런데 충목왕도 후사를 보지 못한 채 즉위 4년 만인 1348년 11살의 나이로 병사했다. 충목왕에게는 한 살 아래 이복동생이 있었으나 10살에 불과해 대신들은 삼촌인 공민왕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하지만 원나라가 충목왕의 이복동생을 충정왕(30대)으로 세워 공민왕의 즉위는 성사되지 않았다.

두 번이나 조카에게 밀려난 터라 왕위가 사실상 물건너 간 것으로 보이는 상태에서 공민왕은 1349년(충정왕 1년) 원나라 공주인 노국대장공주와 원나라에서 혼인했다. 고려사에는 사후에 노국대장공주로 추증된 그녀의 본명은 보탑실리이며 원나라 왕족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언제 태어나고 어떻게 살았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아버지가 원나라 위왕 보루 테무르라는 사실은 확인된다. 원사(元史) 제왕표에 의하면 위왕의 왕위는 아무케에서 시작해 아들 보루 테무르에게 세습된 것으로 나타난다. 아무케는 세조 쿠빌라이의 종손이면서 원나라 무종과 인종 황제의 이복형제였던 터라 원나라의 여러 왕 중에서 위상이 높은 편이었다. 아무케의 딸이 충숙왕(공민왕의 부)의 제2비인 조국장공주였기 때문에 노국대장공주는 그녀의 조카이면서 며느리였다.

공민왕이 연경에서 신혼을 즐기고 있을 무렵 고려에서는 나이가 어린 충정왕을 둘러싸고 외척과 부원배(附元輩)들이 전횡을 일삼아 국정이 문란하고 사회가 혼란스러웠다. 부원배는 원나라를 이용해 자기 이익을 꾀하는 사람들이다. 날이 갈수록 혼란이 가중되자 1351년 10월 원나라 순제(=혜종)가 국정 문란의 책임을 물어 13살의 충정왕을 즉위 3년만에 폐위시키고 21살의 공민왕을 고려 제31대 왕에 봉했다. 결과적으로 노국대장공주와의 혼인이 고려왕으로 즉위하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셈이 되었다. 공민왕은 1351년 12월 노국대장공주와 함께 고려로 금의환향해 즉위했다.

 

■개혁군주

공민왕의 즉위 시기는 고려가 원나라의 내정 간섭을 받은 지 90년이 지났을 때다. 그동안 원나라는 쌍성총관부(함남 화주=영흥)와 동녕부(서경=평양)를 설치해 고려 영토를 빼앗고 수도 개경에는 정동행성이라는 기구를 설치해 끊임없이 고려의 내정을 간섭했다. 그 과정에서 원나라를 이용해 자기 이익을 꾀하는 부원배들이 득세했다. 부원배 배후에는 고려 말 공녀로 뽑혀 원나라 11대이자 마지막 황제인 순제(=혜종, 재위 1333~1370)의 후궁을 거쳐 마침내 1339년 제2황후 자리에 오른 기황후가 있었다.

황후에 오르기 1년 전 황태자를 생산한 기황후에게는 고려에 기철 등 5명의 오빠가 있었다. 동생이 황후에 오르자 기씨 집안은 하루아침에 고려 왕실에 버금가는 지위로 뛰어올랐다. 특히 기철은 원나라 관직과 함께 고려의 정승으로 신분이 수직상승했다. 기철 등 5형제는 물론 친인척들도 황후를 등에 업고 갖은 횡포와 악행을 일삼았다. 충혜·충목·충정 등 임금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공민왕은 즉위 후인 1352년 2월, 강력한 ‘반원(反元) 자주정책’을 표명했다. 그것은 원나라의 간섭을 배제하고 고려를 개혁하려는 시도인 동시에, 자주국가로서 고려의 독립을 꾀하는 신호탄이었다. 공민왕은 먼저 고려 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린 몽고 풍습의 혁파를 단행했다. 당시 대표적인 몽고 풍습으로는 변발(辮髮), 호복(胡服) 등이 있었는데, 이 풍습을 금지시켰다.

그러던 중 1352년 9월 조일신의 난이 일어났다. 조일신은 공민왕이 세자 때부터 공민왕을 보필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공민왕을 따라 귀국한 후 1등 공신에 책봉되자 전횡을 일삼았다. 공민왕이 반원 자주정책을 시행할 때는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 기철 등 부원배들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했다. 급기야는 공민왕이 거처하던 이궁(離宮)을 포위하고 왕을 협박해 스스로 정승이 되어 수하 사람들에게 요직을 안배했다. 공민왕은 사태를 지켜보다가 조일신 일당을 잡아들여 참수함으로써 조일신의 난을 평정했다.

한편 부원배들의 권력은 1353년 기황후의 아들이 원나라 황태자로 책봉되면서 더욱 강력해졌다. 그들은 기황후의 권세를 믿고 공민왕을 무시하거나 왕 위에 군림하려 했다. 결국 공민왕은 기황후와 부원배의 눈치를 보며 반원 운동을 멈추고 때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1356년 5월, 기철 등 기황후 세력을 일제히 처단함으로써 반원 정책을 본격적으로 재가동했다. 원나라 연호를 폐지하고 관제를 문종(제11대 왕) 때의 제도에 맞춰 복구하고, 원나라의 내정 간섭 기구였던 정동행중서성이문소를 폐지했다. 100년 이상 존속했던 쌍성총관부도 공격해 옛 고려 영토를 되찾았다.

공민왕이 이처럼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원 정책을 펼치는데도 노국대장공주는 공민왕 곁에서 묵묵히 왕의 정책을 지지함으로써 공민왕의 정치적 입지를 든든하게 뒷받침했다. 공주는 공민왕과 살았던 16년 간, 원나라 공주임을 드러내거나 원나라를 비호하지 않았다.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를 그린 초상(세로 99.2㎝, 가로 82.5㎝, 화폭 65.4㎝). 조선의 태조가 종묘 경내에 사당을 짓고 영정을 봉안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광해군 때 다시 그렸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홍건적의 난

한편 중국에서 시작한 홍건적의 난이 고려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홍건적의 중심 세력은 백련교와 미륵교를 신봉한 한족 중심의 농민들이었는데 머리에 붉은 두건을 썼다고 해서 홍건적으로 불렸다. 홍건적은 만주로 진출했다가 원나라 군대에게 쫓기게 되자 퇴로를 한반도로 잡아 1359년(공민왕 8년) 고려를 침범했다. 이들은 남하해 서경(평양)까지 함락했으나 고려군의 반격으로 대부분 궤멸되었다.

그러나 2년 뒤인 1361년(공민왕 10년) 10월, 20여만 병력이 다시 고려를 침공하면서 고려는 바람 앞의 등불 신세가 되었다. 홍건적이 1차 때와 달리 파죽지세로 남진을 거듭하며 황해도까지 내려오자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 혜비 이씨(제2비), 명덕태후(공민왕 모친) 등과 함께 11월 19일 수도인 개경을 빠져나왔다. 홍건적은 11월 24일 개경을 함락한 뒤 약탈과 살인을 일삼았다. 공민왕은 충북 음성과 충주를 거쳐 12월 15일 경북 복주(안동)에 도착했다. 다행히 정세운을 총사령관으로 한 고려군이 1362년 1월 17일 개경을 포위하고 다음날 새벽 이성계가 개경에 입성하는데 성공함으로써 홍건적의 제2차 침입도 마무리되었다.

공민왕은 공로를 인정해 정세운을 크게 치하했으나 이 때문에 1년 뒤 흥왕사 변란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던 아찔한 순간을 경험했다. 공민왕이 원나라에서 볼모 생활을 할 때부터 정세운과 함께 공민왕 곁을 지켰던 김용이 정세운의 공적을 시기해 일으킨 반란이 흥왕사 변란이다.

홍건적 상상화 (출처 중국 사이트)

 

■흥왕사 변란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성에 있는 궁궐이 완전히 불타버리자 공민왕은 지금의 임진각 근처에 있는 흥왕사에 머물렀다. 그런데 1363년(공민왕 12년) 윤3월 1일 밤, 공민왕의 목숨을 노린 50여 명의 무리가 김용의 사주를 받아 흥왕사의 공민왕 침전으로 들이닥쳤다. 내시는 잠을 자던 공민왕을 다급하게 등에 업고 노국대장공주의 침실로 들어가 담요로 공민왕을 덮어 숨겼다. 그 위험천만한 순간에 공주는 피하거나 숨지 않고 문 앞을 가로막고 지켰다. 남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공민왕 침실에는 공민왕과 용모가 비슷한 또 다른 내시가 누워있다가 무리들의 칼을 맞고 절명했다. 무리들은 나중에 공민왕이 아닌 것을 알고 노국대장공주 침실로 달려갔으나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노국대장공주가 아무리 원나라와 연결고리가 약해졌다 한들 엄연한 원나라의 공주였기에, 그녀까지 해치진 못하고 물러났다. 결국 공주는 무리들이 침전에서 떠날 때까지 밀실 앞을 떠나지 않음으로써 공민왕을 무사히 지켜냈다.

 

■공민왕 폐위공작

그런데 다음 해, 또 다른 변란이 일어났다. 1364년(공민왕 13년) 원나라 황제가 기황후의 뜻에 따라 공민왕을 폐하고 충선왕(제26대)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왕으로 책봉한다고 하자 이를 구실로 원나라에 있던 최유가 원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로 쳐들어온 것이다. 최유는 흥왕사의 변란으로 위기에 처한 김용이 고려에서 내응하리라 믿고 오빠(기철 일당)들을 죽여 공민왕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던 기황후를 꼬드려 고려를 침략했다. 최유 군대는 평안도 지방까지 쳐들어왔으나 최영·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 대패해 원나라로 도주했다가 원나라 황제에 의해 강제로 고려로 보내져 처형되었다.

최유의 난을 계기로 고려에서 기씨 집안의 영향력이 완전히 몰락하고 고려는 원나라로부터 본격적으로 벗어나기 시작했다. 한편 공민왕의 장인인 보루 테무르는 공민왕 폐위 공작을 저지하기 위해 원나라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기황후에 맞서 싸웠다. 이처럼 장인과 노국대장공주는 곤경에 처한 공민왕이 정치적 안정을 찾아가는데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했다.

 

■노국대장공주와 장인의 죽음

노국대장공주는 결혼한 지 10년이 될 때까지 아이가 없었다. 대신들이 후궁을 들일 것을 건의하고 노국공주가 이에 동의해 공민왕은 1359년 당대 최고 학자였던 이재현의 딸(혜비 이씨)을 비(妃)로 들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5년 후 노국대장공주가 임신에 성공해 1365년 2월 아이를 낳는 과정에서 그만 죽고 말았다. 공민왕에게 노국대장공주는 생의 반려자이자 정치적 동지이자 분신이었기 때문에 공민왕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같은해 7월 장인마저 기황후 세력의 반격으로 죽임을 당했다. 장인의 죽음은 노국대장공주의 죽음과는 또 다른 위기를 공민왕에게 안겨주었다. 그것은 후원자의 상실에 그치지 않고 기황후와 황태자의 복귀를 의미했기 때문에 정치적 압박이 대단히 컸다. 공민왕으로서는 다시 기황후를 의식해야 했고 폐위 공작에 대한 악령이 되살아날 수밖에 없었다.

장인의 죽음이 정치적 곤경을 불렀다면 공주의 죽음은 사랑하는 이와의 아픈 작별이었다. 노국대장공주를 향한 공민왕의 애틋한 사랑은 남은 삶을 송두리 채 망가뜨릴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공민왕은 공주를 장사 지낸 후 신하들에게 공주의 공로를 세 가지로 토로했다. 원나라 시절부터 고락을 함께 하고, 홍건적의 난 때 피난을 함께 했으며 흥왕사 변란 때 목숨을 걸고 공민왕을 몸으로 막아주었다는 것이다.

원나라 공주 출신이 방패가 되어 권문세족들의 반발을 누르고 있었던 노국공주의 죽음은 연인·동지와의 작별이면서 공민왕 개혁정책의 동력이 크게 약화하고 고려의 몰락이 가속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공민왕은 노국공주 사후, 영정을 직접 그려 벽에 걸고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대하듯 밤낮으로 마주앉아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눴다. 술을 마시면 주변의 내시들에게 매질 하는 등 주벽이 심해졌다. 그러다가 정신이 들면 노국공주를 생각하며 울기를 반복했다. 정치에는 관심을 끊은 채 공주의 영전(影殿)을 더 화려하고 크게 증축하는 일에만 몰두했다. 이 때문에 역사서에 기록된 공민왕의 일생은 노국공주의 죽음을 기점으로 확연하게 나뉜다.

노국대장공주 상상화 (출처 위키피디아 중국어판)

 

■공민왕릉

공민왕은 한 나라의 왕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 아내의 영혼을 위한 전례 없는 사업을 일으켰다. 먼저 착수한 것이 공주의 무덤이다. 개성직할시 개풍군 해선리 봉명산 남쪽의 무선봉 중턱에 자리잡은 무덤(정릉)은 9년에 걸친 축조 끝에 완성되었다. 정릉을 지은 뒤에는 정릉 곁에 자신이 죽은 뒤 묻힐 수릉(壽陵·생전에 만들어놓은 무덤)인 현릉을 나란히 만들게 했다. 고려시대 학자인 이색의 ‘목은집’에는 “공민왕이 후에 자신의 능을 서쪽에 지을 것이니 공주의 릉을 동쪽으로 조금 옮겨서 한 치의 치우침이 없도록 만들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먼저 숨진 노국공주의 능을 만들 때 이미 쌍릉을 기획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훗날 ‘영혼의 통로’로 불릴 조그만 구멍을 두 능 사이에 낸 것이다. 구멍은 높이 40㎝ 정도의 작은 문 아래에 어른 주먹 하나가 들어갈 만한 크기로 만들어졌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이 구멍이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영혼이 오고가는 세계이자 공민왕의 절대 사랑이 만들어낸 희대의 걸작이라고 설명한다. 쌍릉은 고려시대 왕과 왕비를 합장한 유일한 능으로 공민왕릉 혹은 현정릉으로 불리고 있다. 봉분 높이는 6.5m이고 직경은 약 1.3m이며 두 능 사이 간격은 0.5m다. 북한에서는 공민왕릉이 고려 왕릉 중에서도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하고 축조 방법에서도 고려 말 왕릉의 완성된 형식임을 인정해 국보 123호로 지정했다. 공민왕은 쌍릉이 완성되자 수시로 이곳을 찾았다. 자신이 묻힐 내부를 돌아보고 아내의 능 주위를 거닐었으며 때로는 능에서 유숙했다.

북한 개성의 공민왕릉

 

공민왕은 공주의 초상화를 모시기 위한 대규모 영전(影殿) 공사에도 집착했다. 공사는 1366년 개성 송악산에 위치한 왕륜사의 동남쪽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공민왕은 거의 완성되어 가던 왕륜사의 영전이 좁다는 이유로 헐고 다른 곳에 새 영전을 짓도록 했다. 1372년 영전의 정문이 완성되었을 때는 장엄하고 화려하지 않다며 헐어버렸는가 하면 영전의 종루가 높고 크지 않다며 고쳐 짓도록 해 백성의 원성을 샀다. 그런데도 공민왕은 멈출 줄을 몰랐다. 게다가 쌍릉과 영전 공사로 국고가 날로 비어가자 노국공주의 죽음을 애도하던 민심도 점차 돌아섰다.

특이한 것은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서울 종묘의 외진 구석에도 공민왕 신당이 있고 그곳에 서로 바라보는 공민왕 부부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는 것이다. 종묘지(宗廟誌)에는 어느날 북쪽에서 회오리 바람이 불어와 공민왕 영정을 떨어뜨리고 갔는데 이를 신기하게 여긴 사람들이 신당을 짓고 영정을 종묘에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울 종묘의 공민왕 신당

 

노국공주가 죽었어도 공민왕에게는 후사를 얻기 위해 노국공주 생전에 받아들인 혜비 이씨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와의 사이에서도 자식은 없었다. 신하들은 비(妃)를 더 들이라고 요구했지만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죽기 전까지는 다른 비를 들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공주 사후, 후사를 위해 들인 비들이 익비 한씨(1366년), 정비 안씨(1366년), 신비 염씨(1371년) 등이다. 제2비였던 혜비 이씨는 공민왕의 애정을 받지 못하고 불행한 삶을 살다가 공민왕 사후, 비구니가 되었다.

 

■신돈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으로 공민왕은 큰 실의에 빠졌다. 국정을 등한시하고, 연회를 즐기는 횟수가 부쩍 늘어났으며 즉위 초의 총기도 사라졌다. 대신 한 중에게 국정을 맡겼는데, 홍건적을 피해 안동으로 피란했을 때 알게된 신돈이었다. 공민왕은 1365년(공민왕 14년) 노국공주가 죽고 얼마 뒤 신돈을 정치 전면에 내세우고 자신은 뒤로 물러서 공주의 명복을 빌기 위한 불사에만 전념했다.

공민왕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신돈의 정책은 급진적이었다. 기득권 세력들인 권문세가, 고위 벼슬아치와 유생 출신 관료들을 몰아냈다. 군사권을 거머쥐기 위해 명망 있는 최영 장군도 조정에서 쫓아냈다. 그 자리엔 추후 조선 건국의 중심 세력이 되는 신진 유학자들을 대거 등용시켰다. 벼슬길은 과거 제도를 통해서만 오르도록 제도를 바꿨다. 농장주들에게는 토지와 노비를 본래 주인에게 되돌려 주게 하고, 강제로 농노가 되었던 양인들에게는 과거 신분을 되찾아주었다.

그러자 기성 세력들이 반발했다. 정치 권력은 물론 경제적 기반까지 흔들리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공민왕에게 신돈을 비하하거나 모함했다. 돈과 여자에 관련된 신돈의 사생활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기성 세력들의 반발이 극심해지자, 공민왕도 서서히 신돈에게서 신임을 거두기 시작했다. 자신에 대한 주변의 공격이 거세지고 공민왕의 신임이 옅어지는 등 궁지에 몰리게 되자 1371년 신돈은 공민왕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수원으로 유배되었다가 이틀 후 죽임을 당했다. 신돈의 도당들도 모두 유배되거나 처형됨으로써 6년간 지속되던 신돈 정권은 종말을 고하고 공민와의 개혁도 원점으로 돌아갔다.

 

■공민왕의 성적 취향

신돈의 제거 후에도 공민왕의 행동에는 변함이 없었다. 즉위 초의 개혁적인 성향은 거의 찾아볼 길 없었고 자주 술에 취해 있거나 노국공주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해 미행을 나가는 일이 잦았다. 그는 원래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는 성품이었기에 별궁 출입은 거의 하지 않았지만 노국공주에 대한 그리움만은 떨쳐내지 못해 급기야 정신병적 증세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변태적인 행동을 자주 했다. 공민왕은 1372년(고려 공민왕21년) 10월 나이가 어리고 용모가 아름다운 미소년들을 선발해 자제위를 설치했다. 김흥경이 총책임을 맡도록 했고 그 아래의 홍륜, 한안 등이 공민왕 침실을 지키도록 한 것으로 보아 친위군 기능도 했다.

공민왕은 자제위 소속 젊은이들이 젊고 예쁜 시녀들과 난삽한 음행을 하도록 하고 자신은 문틈으로 그것을 엿보곤 했다. 마음이 통하면 홍륜 등을 자기 침실로 불러들였다. 다만 공민왕이 직접 이들과 동성애를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공민왕은 후사를 얻기 위해서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홍륜과 한안 등을 시켜 왕비와 성관계를 맺도록 하고 그들 사이에 아들이 생기면 자기 자식으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정비, 혜비, 신비 등은 죽음을 각오하고 자제위와의 잠자리를 거부했다. 익비 한씨도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공민왕의 강압에 어쩔 수 없이 자제위 멤버들과 관계를 가졌다. 자제위 중에서도 홍륜은 재미가 붙어 왕명을 빙자해 자주 익비를 찾았고 익비는 결국 임신했다. 이런 역사 기록에 대해 조선 왕조를 개창한 정치 세력들이 고려 말의 역사를 편찬하면서 새 왕조 창업을 정당화 하려고 의도적으로 폄훼했다는 의견이 있는 반면 그렇게 보기에는 기록이 너무 구체적이고 사실적이어서 믿을만 하다는 반론도 있다. 기록을 그대로 믿고 따른다면 공민왕은 관음증과 성도착증 성향을 갖고 있는 왕이 된다. 영화 ‘쌍화점’(2009년)은 이런 당시 상황에서 모티브를 삼은 것으로 영화배우 주진모는 공민왕, 조인성은 홍륜, 송지효는 익비를 연상시킨다.

영화 ‘쌍화점’ 포스터

 

■죽음과 후계자

익비의 임신 소식은 1374년(공민왕 23년) 9월 21일 내시 최만생을 통해 공민왕에게 전해졌다. 최만생이 공민왕에게 “익비께서 회임하신 지 5개월이 되었습니다”라고 아뢰었을 때 공민왕은 기뻐하면서 누구와 관계했느냐고 물었다. 최만생이 홍륜이라고 사실대로 말하자 공민왕이 “내일 창릉을 참배하는 자리에서 홍륜의 무리를 죽여 입을 봉하겠다. 너도 이 계획을 알고 있으니 마땅히 죽음을 면치 못할 줄 알아라”며 최만생에게 겁을 주었다.

자신도 죽인다는 공민왕의 말을 듣게 된 최만생이 바로 홍륜 등 자제위 멤버들과 만나 위급한 사태를 전하자 그들은 공민왕을 시해하기로 모의했다. 다음날(22일) 공민왕이 술에 취해 침전에서 잠이 들었을 때, 최만생과 홍륜이 무리를 이끌고 들어가 칼을 휘둘렀다. 공민왕은 저항 한 번 못하고 44세 나이로 어이없는 죽임을 당했다. 공민왕의 측근인 이인임이 최만생을 잡아들여 문초한 끝에  홍륜 등이 범인인 것을 알고 체포해 처형했다.

공민왕이 시해되고 이틀 후, 공민왕의 어머니 명덕태후와 재상들이 모여 누구를 차기 왕으로 세울 것인지 논의했다. 태후는 종친에서 왕을 세우고자 했고 이인임은 공민왕의 아들로 알려진 강녕대군 우(모니노)를 내세웠다. 모니노는 공민왕이 신돈의 집에 들렀을 때 만났던 신돈의 몸종 반야로부터 낳은 자식이라는 설과 신돈의 아들이라는 설로 나뉜다. 무엇이 진실이든 공민왕은 1373년(공민왕 22년) 7월 모니노를 다음 후계자로 확정하고 이름을 우라고 개명하면서 강녕대군으로 책봉했다. 논란 끝에 모니노가 제32대 왕인 우왕으로 즉위한 것은 공민왕이 시해되고 사흘 후인 1374년 9월 25일이었다. 이때 나이 10살이었다.

그러나 훗날 이성계 등 조선의 개국 세력들은 우왕을 공민왕의 아들이 아닌 신돈의 아들로 규정, 가짜왕을 버리고 진짜왕을 세운다는 뜻의 ‘폐가입진(廢假立眞)’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우왕과 그의 아들 창왕(제33대 왕)을 폐위시킨 뒤 사사했다. 고려는 공민왕이 사망하고 18년이 지난 1392년 멸망했다.

 

■고려 왕과 결혼한 역대 몽골 공주

고려는 25대 임금 충렬왕(재위 1274~1308)부터 31대 임금 공민왕(재위 1351~1374)까지 약 100년 간 모든 임금들이 몽골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 기간 5명의 고려 왕이 7명의 공주를 포함해 8명의 몽골 여인과 혼인했다. 충선왕(26대)은 2명, 충숙왕(27대)은 3명의 몽골 여인과 결혼했다. 고려 왕실과 몽골 황실이 혼인을 맺은 것은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세계 제국을 건설한 몽골(원)은 치열한 항쟁을 펼쳤던 고려를 혼인 관계를 통해 세력권 안에 묶어놓으려 했고 고려는 몽골제국의 우산 아래서 평화를 누리고자 했다.

몽골 공주와 고려 왕족 간의 첫 결혼은 1274년 원나라 수도 연경에서 이뤄졌다. 16살의 신부는 원 황제 쿠빌라이의 딸이었고 38살의 신랑은 고려 원종의 장남이었다. 신랑은 혼례를 치르고 두 달 뒤 고려 국왕으로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충렬왕이다. 충렬왕은 쿠빌라이 황제의 사위(부마)라는 신분 덕분에 원 황실의 서열에서 7번째로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 고려 학자 이재현에 따르면 “제국대장공주(충렬왕의 비)는 성격이 엄격하고 분명하여 좌우에서 모시는 사람들에게 과오가 있으면 털끝만큼도 용서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그녀는 남편 충렬왕에게도 욕을 퍼붓고 심지어 지팡이로 때리기도 했다. 하지만 공주는 진심으로 고려의 장래를 걱정했다고 한다.

충선왕(재위 1298, 1308~1313)은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 사이에서 태어나 왕위를 이어받았다. 쿠빌라이 황제의 외손자라는 배경 덕분에 몽골 황실에서도 세력을 떨쳤던 그는 1296년 원나라 진왕 카말라의 딸인 보탑실련(계국대장공주)과 혼인했다. 진왕 카말라는 쿠빌라이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성종 테무르의 큰 형이었기 때문에 원 황실에서 세력이 강력했다. 충선왕은 아버지 충렬왕처럼 여러 여자들과 잠자리를 하면서도 보탑실련 공주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보탑실련 공주가 원 황실에 편지를 보내 이 같은 사실을 알리는 바람에 즉위 8개월 만에 폐위되고 말았다. 왕위는 다시 충렬왕에게로 돌아갔으나 원나라 성종 황제가 죽은 뒤 무종 황제를 옹립하는 과정에서 충선왕이 큰 공을 세우면서 1308년 심양왕에 봉해졌고, 같은 해 충렬왕이 죽자 다시 왕위에 올랐다. 계국대장공주는 1315년 한을 품은 채 원나라에서 사망했다. 남편 충선왕과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충숙왕(재위 1313~1330, 1332~1339)에게 시집 온 3명의 몽골 공주는 더욱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충숙왕은 충선왕과 몽골여인 야속진 사이에서 태어나 왕위를 이었다. 야속진은 몽골 공주 출신은 아니었다. 충숙왕에게는 5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2명은 고려인, 3명은 몽골인이었다. 그중 고려인(제1비, 공원왕후홍씨)에게서 태어난 두 아들이 훗날 28대, 31대 왕으로 즉위할 충혜왕과 공민왕이다. 충숙왕과 결혼한 몽골의 복국장공주는 1319년 갑자기 사망했는데 충숙왕에게 맞아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충숙왕의 두 번째 몽골여인인 조국장공주는 아이(용산원자)를 낳다가 사망했는데 그녀의 죽음도 석연치 않다. 세 번째 부인 경황공주(숙공휘녕공주)도 불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충숙왕의 아들인 충혜왕(재위 1330~1332, 1339~1344)에게 겁탈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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