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로버트 고더드, 세계 최초 액체로켓 발사 성공

↑ 로버트 고더드가 1926년 3월 16일 자신이 만든 액체추진로켓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로버트 고더드(1882~1945)는 러시아의 콘스탄틴 치올콥프스키, 독일의 헤르만 오베르트와 더불어 근·현대 로켓 발달에 기여한 ‘로켓의 아버지’로 불린다. 치올콥스키는 로켓의 반동력을 이용한 우주 탐험에 관한 논문(1903)으로 현재 대부분의 우주 발사체가 채택하고 있는 다단계 로켓의 개념을 제시했다. 현대 로켓의 추진제로 대표되는 액체산소와 액체수소를 추진제로 검토하다가 연구비 부족으로 이론을 실천하지는 못했으나 그의 이론적 성과는 훗날의 로켓 개발에 크게 기여했다.

오베르트는 1923년 ‘행성 공간으로의 로켓’이라는 논문을 발표해 독일 과학계에 큰 충격을 주고 훗날 V2 개발의 산실이 되는 독일우주여행협회를 1927년 결성해 근대 로켓 개발자로 이름을 날렸다. 당시 독일은 1차대전 후 베르사유 조약이 명시한 독일 재무장 금지 조항에 로켓이 빠져 있는 것을 알고 오베르트를 중심으로 로켓 연구에 박차를 가해 2차대전 때 사용된 V2 로켓을 개발할 수 있었다.

고더드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우스터에서 태어나 어려서 아버지가 선물한 허버트 조지 웰스의 과학소설 ‘우주 전쟁’을 읽으면서 우주 비행을 꿈꿨다. 우스터공과대를 졸업하고 클라크대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해 클라크대 교수로 임용되었다. 1914년 7월 로켓사에서 중요한 이정표로 기록되는 다단계 점화 특허와 가솔린, 액체, 이산화질소로 구성된 액체로켓에 관한 특허를 획득했다.

로켓은 원리상 외부에서 공기를 흡입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필요한 연료와 이를 산화시키는 데 필요한 산화제를 모두 내부에 탑재하고 이것을 연소시켜 추력을 낸다. 이때 사용하는 추진제의 종류에 따라 화약 같은 것을 사용하는 고체연료 로켓과 알코올, 액체수소, 가솔린, 액체산소 등의 산화제를 사용하는 액체연료 로켓으로 나뉜다. 다단계 로켓은 초고도에 이르기 위해서 사용된 로켓의 일부 구조물 등을 버리기 위해서 사용하는 방법이다.

연료와 산화제를 섞은 후 엔진 크기에 맞춰 모양을 만드는 고체연료는 취급이 용이하고 장기 저장성이 좋으며 저비용이 장점이다. 하지만 일단 점화한 후에는 출력을 조절하기 어렵고 폭발의 위험성 때문에 큰 출력을 얻는 게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고체연료는 잘 포장한 형태로 중․저출력이 요구되는 단사정 유도탄에서 많이 사용한다. 발사 시기를 조절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액체연료 로켓보다 자유롭다.

반면 산소를 채워서 발사하는 액체연료는 대량생산과 저장이 용이하지 않다는 것이 단점이나 큰 출력을 낼 때 유리하다. 일반적으로 대륙간 탄도미사일이나 인공위성 등을 쏠 때는 큰 출력을 낼 수 있는 액체연료 로켓을 주원료로 삼고, 순간 가속력을 크게 할 수 있는 고체연료를 보조엔진으로 삼는다.

고더드는 1919년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정리해 ‘초고도에 도달하는 방법’이란 제목의 논문을 스미스소니언협회지를 통해 발표했다. ‘엔진의 추진력을 충분히 높여 준다면 로켓이 달까지 갈 수 있다’는 내용의 논문은 훗날 로켓 과학의 선구적인 결과물로 인정받았지만 당시만 해도 언론과 과학자들로부터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달나라 가는 로켓 일은 잘되냐”고 비아냥거리는 동료도 있었다. 뉴욕타임스는 1920년 1월 13일자 기사에서 “고등학생 수준 이하의 지식으로 논문을 썼다”며 “공기가 없는 곳에선 추진할 수 없기 때문에 로켓의 우주 비행은 불가능하다”고 논문을 혹평했다.

 

세상이 알아주든 말든 홀로 로켓 개발에 몰두

그래도 고더드는 “모든 이상은 그것을 처음 이룬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농담처럼 들린다”고 담담하게 응수하며 연구를 계속해 1925년 12월 최초의 액체로켓인 5.5㎏의 로켓을 하늘로 쏘아 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공식적인 자료는 남아 있지 않아 로켓사는 1926년 3월 16일을 우주 여행의 첫걸음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날 미국 매사추세츠주 오번에서 고더드가 발사한 높이 1.2m, 지름 15㎝의 ‘넬’이라 불린 액체연료 로켓은 발사 후 2.5초 만에 최고시속 90㎞의 속도로 최고높이 12.3m에까지 치솟아 올랐다가 55.2m 떨어진 배추밭에 낙하했다. 이 로켓의 비행 장면은 고더드의 아내가 카메라에 담을 계획이었지만 필름이 떨어져 사진은 남기지 못했다.

역사상 최초로 성공한 이 액체연료 로켓 발사는 인류 역사상 큰 획을 그은 대사건이었지만 고더드는 “계속 진행 중. 발표할 것이 하나도 없음”이라며 실험 결과에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1929년 7월 17일에는 고도계, 온도계, 기록용 카메라를 탑재한 로켓이 18.5초 동안 27m 높이로 치솟은 후 52m를 날아가 떨어졌다. 소음이 컸는지 주민들이 항의하고 경찰과 신문기자가 달려오는 해프닝이 있었다. 이튿날 지역신문은 ‘고더드 로켓, 달로부터 38만 4,080㎞(달과 지구 사이 거리에서 52m를 뺀 것) 근처까지 접근하다’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하며 조소를 보냈다. 뉴욕타임스는 여전히 진공 중의 로켓 추진 가능성을 부정하며 고더드를 망상가로 취급했다.

세상이 알아주든 말든 고더드는 홀로 로켓 개발에 몰두했다. 1935년 3월 28일에는 자이로스코프 제어장치를 장착한 로켓을 평균시속 880㎞의 속도로 1,400m 상공에 올려 보냈고 5월 31일에는 길이 4.6m, 무게 39㎏의 로켓을 음속보다 빠르게 2,286m 상공으로 쏘아올렸다. 미국 정부가 여전히 고더드의 로켓 연구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을 때 독일은 엄청난 위력을 지닌 V-2 로켓을 개발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고더드는 2차대전의 종전을 목전에 둔 1945년 8월 10일 사망해 그 후로는 잊힌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1959년 미 의회가 고더드의 역할을 재평가한 덕에 NASA 내에 고더드우주비행센터가 설립되고 1966년 미 정부가 고더드의 미망인에게 214개의 특허 사용료로 100만 달러를 지급했다. 이것을 기금으로 설립된 것이 클라크대 고더드기념도서관이다. 1967년에는 고더드가 발사 실험을 하던 뉴멕시코주 로즈웰에 고더드고등학교가 설립되고 1992년에는 고향에 고더드초등학교가 생겼다.

뉴욕타임스는 1969년 7월 17일자 신문에 ‘A Correction’이라는 제목의 정정 기사를 실었다. 고더드를 조롱한 49년 전의 사설을 뒤늦게 바로잡고 사과한다는 내용이었다. “계속된 조사와 실험이 17세기 뉴턴의 연구 성과를 확인해주었다. 그리고 오늘날 진공상태뿐만 아니라 대기에서도 로켓이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입증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당시의 잘못을 사과한다.” 그날 아폴로 11호가 발사되고 3일 후 달에 착륙했다. 타임지는 1999년 고더드를 ‘20세기 최고 지성인 20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 공로를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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