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관동대지진… 비극적 ‘천재(天災)’였으나 ‘인재(人災)’로 둔갑시켜 조선인 대학살 벌여

↑ 대지진으로 파괴된 시가지

 

by 김지지

 

2022년 8월 10일 일본 도쿄 중의원 제1의원회관에서 한 편의 영화가 상영되었다. 재일교포 오충공 영화감독이 연출한 ‘감춰진 손톱자국-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이었다. 감독은 도쿄 인근의 아라가와강 제방에서 학살당한 조선인들의 유골이 발굴된 것을 계기로 학살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동포들의 증언을 모아 조선인 학살의 참상을 다뤘다. 일본 국회의사당 의원회관에서 조선인과 중국인 학살 문제를 기록한 영화를 상영하는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관동대지진에 대해 알아본다.

 

도쿄의 60%, 요코하마의 80% 잿더미로 변해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44초, 일본이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대재앙이 도쿄와 요코하마가 포함된 관동 지방 전역을 강타했다. 매그니튜드 7.9로 기록된 ‘관동대지진’이었다. 점심을 준비하던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나왔고 도시는 불길에 휩싸였다. 한순간의 대지진으로 도쿄의 60%, 요코하마의 80%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일본 기상청 발표에 따르면 9만 9,300여 명이 사망하고, 4만 3,400여 명이 행방불명되었으며, 10만 3,700여 명이 부상했다. 사망자 중에는 불에 타 죽은 사람만 3만 8,000여 명이나 되었다. 가옥은 25만 4,400여 채가 파괴되고 44만 7,100여 채가 불에 타 사라졌다. 도쿄 앞바다에는 해저가 융기해 10m 높이의 해일까지 몰려왔다.

누가 뭐래도 ‘천재(天災)’였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천재’가 ‘인재(人災)’로 둔갑해 관동 지방 전역에서 조선인을 상대로 한 대참살이 벌어진 것이다. 참살을 주도한 것은 국민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일본 정부였다. 경찰은 지진 발생 직후 통신이 두절되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지진 당일 저녁부터 “조선인이 살인·방화를 하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유포했다. 다른 소문도 빠르게 퍼져나갔다. “후지산이 폭발했다”, “오가사와라 제도가 바닷속에 잠겼다”는 등 불안감을 자극하는 온갖 소문에 일본인들은 이리저리 휩쓸렸다. 공포와 혼란에 휩싸인 그들을 가장 흥분시킨 것은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 “조선인들이 시내 곳곳에 불을 질렀다”는 괴소문이었다.

곧 일본도와 죽창으로 무장한 3,600여 개의 자경단이 조직되어 거리를 활보하며 학살을 자행했다. 그들은 각지에서 통행인을 검문하며 조선인이 발음하는데 서투른 ‘주고엔 고짓센(15엔 50전)’, ‘파피푸페포(ぱぴぷぺぽ)’를 발음하게 하거나 “에도 시대 노래를 불러 보라”고 요구했다. 발음이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센징(鮮人·조선인)이다”라는 외침과 함께 폭행과 살인이 자행되었다.

자경단

 

일본 정부는 9월 2일 6시부로 계엄령을 선포하며 “조선인이 각지에서 방화하고 있으며,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뿌리는 자가 있으니 엄밀하게 단속하라”는 전문을 전국에 발송했다. 이에 따라 일본의 군부와 경찰이 “불령선인들을 수색하고 선량한 조선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인을 검속했다. 이렇게 검속된 조선인만 6,200여 명이나 되었다. 신문들도 계엄사령부가 제공하는 유언비어를 확인 없이 퍼나르는 데 혈안이었다. 도쿄일일신문(9.3)은 “불령선인 각소에 방화, 제도(帝都)에 계엄령 선포”라고 제목을 달고 도요하시일일신문(9.5)은 “대화재의 원인은 지진도 있지만 일면에는 불령선인 수천 명이 폭탄을 투하하고 시중에 방화한 데 있다”고 보도했다. 이 때문에 주로 조선인이 희생되었지만 일본의 저명한 아나키스트 부부와 노동조합 간부들도 살해되었다. 경찰은 자경단이 조선인을 죽이거나 학살해도 말리지 않고 방조했다.

관동대지진
‘괴이한 조선인’ ‘불령선인 경계’ 등 선정적인 제목의 당시 신문 기사들

 

차마 인간이 한 일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잔인한 일이 곳곳에서 자행돼

학살의 실상은 끔찍했다. 일본의 시민단체 ‘조선인 유골을 발굴해 추도하는 모임’이 2013년 발간한 3권의 증언 자료집에 따르면 “손에 쥔 죽창과 칼로 조선인의 몸 이곳저곳을 찔렀는데 신음과 고성이 섞인 처참한 광경이었다”, “10명이 피투성이가 된 조선인을 철사로 묶고 한 되나 되는 석유병을 부어 불을 붙였다. 몸부림치며 뒹굴자 이번엔 부지깽이로 짓눌렀다”, “10명씩 조선인을 묶어 세워 군대가 기관총으로 쏴 죽였다.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은 선로 위에 늘어놓고 석유를 부어 태웠다”는 등 차마 인간이 한 일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잔인한 일이 곳곳에서 자행되었다.

그런데도 이 소식은 조선총독부의 철저한 통제에 가로막혀 한국 언론에는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1923년 9월 1일부터 11월 1일까지 게재 금지 조치를 한 조선일보·동아일보의 관동대학살 관련 기사는 모두 602건이었고 압류 조치는 18회였다.

몇 명의 조선인이 학살되었는지는 일본 정부의 진상 은폐로 정확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 희생자 수를 가장 축소한 발표가 233명(일본 사법성), 850명(조선총독부)이었다.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신문은 1923년 12월 5일자에서 조선인 희생자가 관동 지역 조선인 1만5000여 명 중 6,661명이라고 보도했다. 이 숫자는 그 해 10월 조선인 유학생 등이 ‘재일본 간토 지방 이재동포 위문반’이라는 이름으로 간토 일원의 학살 현장 등을 은밀히 조사해 살아남은 조선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 등을 토대로 집계한 것이다.

일본에서 간행된 <관동대지진-조선인 학살의 참상의 진실>

 

일본의 한 교수가 당시 일본 사법성의 ‘진재 후에 있어서 형사범 및 이에 관한 사항 조사서’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방화·살인·강도·강간 등을 저질렀다고 기록된 조선인 ‘범인’ 120명 중 115명은 ‘성명 불명(不明)’이었고 나머지는 ‘소재 불명’이거나 ‘도망’ 혹은 ‘사망’이었다. 소문의 실체가 없었음이 확인된 것이다. 일본에서 간행된 당시 판결 자료집에 따르면, 1심 판결문 중 조선인 학살 관련 피고인은 모두 102명이었다. 이 중 81명은 집행유예, 5명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고작 16명이었다. 상고심에서 조선인 학살자의 최고 실형은 징역 2년 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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