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허균 표준 영정
by 김지지
허균(1569∼1618)은 명문가 출신이지만 풍운아의 삶을 살았다. 자유분방하고 직선적이고 개혁적 기질이 뚜렷했다. 타협하지 않고 세상을 바꿔보려 했지만 결국에는 역적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와 능지처참으로 생을 마쳤다. 능지처참은 대역죄를 저지른 죄인을 죽인 뒤 시신의 머리, 몸, 팔, 다리를 토막 쳐서 각지에 돌려 보이는 극형이다. 허균의 이런 비극적인 생애는 그 스스로의 표현대로 ‘불여세합(不與世合)’하는, 즉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강한 기질과 혁신적인 사상, 그리고 자유분방한 행동가적인 면모에서 기인한 측면이 크다. 당대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신분적 특권을 누리기보다 넘어서고자 했던 허균을 가리켜 ‘하늘이 내린 괴물(天生一怪物)’이라 했다. 허균의 이런 기질 때문에 오늘날 그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다. 한편에서는 재능과 문장과 식견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인륜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을 좋아해 행실을 더럽혔다는 등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신분적 특권 연연해 하지 않고 기질이 원하는 방향으로 삶 맡겨
허균은 1569년(선조 2) 경상도 관찰사 허엽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은 명문가였다. 아버지 허엽은 사간원과 홍문관의 요직을 맡아 정사에 몰두하면서 2번의 결혼으로 3남 3녀의 자녀를 얻었다. 전처 청주한씨와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고 후처 강릉김씨와의 사이에 2남 1녀(허봉, 허난설헌, 허균)를 두었다. 허균의 큰형(허성)과 둘째형(허봉)은 부친과 더불어 조정의 명신으로 활약하고 누나 중 한 명인 허난설헌은 조선시대 최고 여류 시인이었다. 허균이 태어난 강릉 사천면 외가 부근에는 조그마한 야산이 있었다. 마치 이무기가 기어가듯 꾸불꾸불한 모양이라고 해서 교산(蛟山, 蛟는 이무기란 뜻)으로 불렸다. 야산의 능선은 바다로 사라지고 백사장에 커다란 바위들이 앉아 있는데 지금은 이무기가 튀어나와 바다로 사라졌다고 해서 ‘교문암(蛟門岩)’이라 이름이 붙여졌다. 허균이 자신의 호를 교산이라 한 것은 고향에 대한 향수 때문이겠지만 연구자들은 이상을 펴지 못한 채 처형된 허균의 삶과 결국에는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를 연결지어 해석하기도 한다.

허균은 둘째형(허봉)의 친구이면서 당시(唐詩)의 대가인 이달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이달은 시재가 뛰어났지만 서얼이라는 이유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스승이 처한 답답한 현실은 허균에게 서얼의 설움을 깨닫게 해주었다. 허균은 명문가에서 태어난 덕에 얼마든지 입신양명할 조건을 갖추었으나 자신의 신분적 특권에 연연해 하지 않고 자신의 기질이 원하는 방향으로 삶의 방향을 틀었다. 첫 번째 선택은 자유분방한 삶이었다.
28세 때인 1597년(선조 30) 문과 중시에 장원하고 다음해부터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나 파직과 복직이 되풀이되는 삶의 연속이었다. 황해도 도사 시절인 1599년 한양에서 데리고 온 기생·무뢰배들과 어울렸다는 이유로 6개월만에 파직된 이래, 불교를 믿는다는 등 각종 이유로 수안군수, 삼척부사, 공주목사직에서도 파직되는 등 모두 6차례 파직과 복직을 반복했다. 유배를 떠나기도 했는데 유배지에서도 조선시대 ‘미식(美食)의 기록’이라 할, 자신이 예전에 먹었던 팔도의 별미를 열거한 ‘도문대작’을 저술할 정도로 태평했다. ‘도문대작’은 21세기 요리연구가 백종원이 “책에 적힌 레시피대로 따라해봤더니 맛있더라”며 찬사를 보낼 정도로 내실 있는 요리책이다.
그가 어울린 부류 중에는 기생과 서얼도 많았다. 그는 기생을 가까이 할 때마다 세간의 눈총을 받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기생과 어울렸다. 그의 문집에도 그와 정신적인 교감을 나눴다는 여러 기생들이 등장한다. 전북 부안 기생 이매창이 죽었을 때는 추모시를 짓기도 했다.

함께 어울린 강변칠우(江邊七友), 대부분 처형당해
허균의 삶에서 또하나 중요한 것은 그 시대 서얼들이 받고 있는 온갖 설움과 아픔에 대한 공감이었다. 그는 스승을 통해 서얼의 차별을 익히 알고 있었다. 사실 서얼은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그다지 큰 차별을 받지 않았다. 그러다가 16세기 이후 조선 사회에 명분과 신분 차별을 옹호하는 성리학 이념이 강하게 정착되면서 적자와 서얼의 차별이 보다 분명해졌다. 차별의 대표적인 사례는 서얼의 과거 응시를 금지해 영구히 등용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허균은 명문가의 능력 있는 젊은이들이 단지 서얼이라는 이유로 양반도 평민도 아닌 반쪽짜리 인생을 살아야 하고 관계에도 진출하지 못하는 현실을 그냥 묵과하지 않았다. 이로인해 맞게 될 정치적 위기는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허균과 친구들은 광해군도 선조와 후궁 공빈 김씨 사이에 태어난 서자인 것에 착안해 광해군에게 서얼허통(庶孼許通) 즉 서얼들도 관직에 등용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들은 스스로를 ‘죽림칠현(竹林七賢)’이라 칭하며 경기도 여주 여강 변에 토굴을 짓고 음풍농월하며 살았다. 역사는 그들을 ‘강변칠우(江邊七友)’라 불렀다. 허균은 벼슬길이 막힌 것을 한탄하며 시와 술로 세월을 보내는 그들과 친밀하게 어울리며 함께 세상을 탓했다.
강변칠우는 나무꾼, 소금장수 따위를 가장해 강도 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1613년(광해군 6) 봄에는 경북 문경새재에서 은을 싣고 가던 상인을 죽이고 수백냥어치 은을 탈취했다. 신출귀몰하는 이들을 잡아 문초하니 고관대작의 서자들이었다. 강도 사건은 ‘계축옥사’로 비화했다. 내막은 이랬다. 당시 실권파인 대북파는 광해군을 옹립하고 소북파는 영창대군을 옹호했다. 대북파는 당시 영의정 유영경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죄목을 달아 사사하고,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선조의 장인)이자 인목왕후의 아버지인 김제남의 뒤를 캤으나 결정적인 구실을 잡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강변칠우가 은상(銀商)을 살해한 죄로 포도청에서 조사를 받았다. 대북파는 강변칠우에게 “김제남의 사주를 받아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실 적자인 영창대군을 옹립할 군자금 마련을 위해 강도짓을 했다”는 허위 자백을 하면 살려주겠다고 꼬드겼다. 곧 그들의 자백에 따라 피비린내가 장안에 진동했다. 역사는 계축옥사 혹은 칠서지옥으로 기록하고 있다. 김제남은 역모죄로 사사되고 영창대군은 폐서인 당해 강화도로 유폐되었다가 8살에 살해당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강변칠우도 1~2명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그해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능지처참의 비참한 최후
허균은 강변칠우와 가까워 요주의 인물로 의심을 받았으나 관련성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자 허균으로서는 자신을 뒷받침해줄 든든한 후원군이 절실했다. 허균이 도움을 청한 인물은 당시 대북세력의 실력자이자 글방 동문인 이이첨이었다. 허균은 이이첨의 후원 속에 집권 대북세력에 적극 협력하면서 대북세력의 행동대장 역할을 했다. 덕분에 광해군의 신임을 받아 호조참의, 형조참의를 거쳐 1617년 정2품 관직인 좌참찬에까지 올라갔다. 1614년과 1615년에는 두 차례나 명나라 사행길도 다녀왔다.
그러자 지나친 자신감이 화를 불렀다. 대북세력의 전면에 나서서 인목대비의 폐비를 주장하는 정치적 무리수를 둔 것이다. 인목대비 폐비는 같은 북인세력인 정온, 남인계 이원익 등 상당수 신료들이 반대한 사안이었다, 한때 허균의 정치적 동지였던 영의정 기자헌까지 폐비에 반대했다가 허균과 사이가 틀어져 유배되었다. 인목대비는 폐위되어 서궁에 유폐되었다. 일견 허균의 승리로 보였으나 실은 몰락의 시작이었다.
허균은 곧 폐비를 반대하는 상당수 여론의 배척을 받았다. 기자헌의 아들인 기준격은 1617년(광해군 9) 12월 허균의 역모를 고발하는 비밀상소를 올렸다. 허균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역모를 도모했다는 상소였다. 허균은 무고함을 주장했으나 인목대비 폐출을 반대하던 각지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수세에 몰렸다. 이런 상황에서 설상가상 허균의 역모를 확증하는 격문이 1618년(광해군 10) 8월 남대문에 붙었다. 그런데 ‘포악한 임금을 치러 하남 대장군이 온다’며 광해군을 비방하고 민심을 선동하는 격문이 허균의 측근이 한 짓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면초가 신세가 된 허균은 결백을 주장하고 모함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를 변호하는 이가 없어 결국에는 1618년 8월 24일(음력) 능지처참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허균의 역모가 사실인지 여부는 오늘날 확인할 수는 없다. 다만 허균의 직선적인 성격과 자유분방한 기질이 다른 관료들의 반발을 사고, 그의 학문과 사상이 당시의 주류 흐름인 성리학과 많은 차이를 보였던 것이 죽음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허균의 죽음에 대해 오늘날 학계의 대체적인 의견은 ‘정치적 음모에 말려들어 억울하게 희생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2022년 ‘허균 평전’을 낸 한영우 교수는 “실록을 면밀히 살펴보면 허균은 실제로 반역을 준비했던 것으로 봐야 한다”며 “허균은 혁명가이자 실학자였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