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한동일의 미 리벤트리트 콩쿠르 우승(1965년)은 임윤찬이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2022년)하기 57년 전 일궈낸 한국 콩쿠르 신화의 출발점

↑ 한동일이 케네디 대통령 시절이던 1962년 11월 19일 백악관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출처 위키피디아)

 

by 김지지

 

피아니스트 임윤찬(18·한국예술종합학교)이 2022년 6월 18일 세계적 권위의 피아노 경연대회인 미국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최종라운드에서 5명의 경쟁자를 누르고 최고 점수를 얻어 1위(금메달)를 차지했다. 이 대회 60년 역사상 최연소 우승 기록이다. 이로써 한국은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또다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런 오늘이 있기까지 첫머리를 장식한 인물은 1965년 미 레벤트리트 콩쿠르에서 우승한 한동일이다. 한동일이 어떤 인물이고 어떤 과정을 거쳐 57년 전 세계적 권위의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했는지를 살펴본다.

한동일의 도미 50주년 기념 음반(2004년)

 

미 CBS TV ‘에드 설리번쇼’,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에서 온 피아노 신동”으로 소개

한동일(1941~ )은 한국이 낳은 첫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다. 6·25 직후 혼란스럽던 시절, ‘피아노 신동’으로 불리던 그의 도미 성공담은 어렵고 팍팍했던 한국인들의 가슴 속에 자부심을 심어주고 숨통을 틔워주는 청량제 구실을 했다. 함남 함흥에서 태어난 한동일은 생후 13개월 만에 동요 ‘나비야’를 흥얼거릴 정도로 청감이 뛰어났다. 한동일이 유아였을 때 아버지는 함흥 중앙교회 합창단 지휘자로 활동하며 때때로 합창단과 함께 집에서 연습을 했다. 한동일이 3살 때 합창단의 누군가 집에서 치고 간 피아노 곡을 한동일이 흉내낸 것을 본 아버지는 곧 한동일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그러나 해방 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이 대지주였던 한동일 집안의 재산을 강탈하면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어린 한동일이 치던 피아노도 빼앗아갔다. 결국 한동일 가족은 1946년 월남해야 했고 아버지는 1947년 서울관현악단(서울시향 전신) 창단 멤버로 들어가 한국 최초의 팀파니스트로 활동했다. 집에 피아노가 없어 피아노 교육이 중단된 한동일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이는 당시 이화여대 피아노과 교수 김성복이었다. 한동일은 김 교수의 돈암동 집을 드나들며 피아노를 배웠다.

한동일이 서울사대부속초등학교에 다닐 때이던 1950년 6·25전쟁이 터져 가족은 제주도와 부산에서 피란 생활을 하다가 1953년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배재중 1학년이던 한동일은 학교에 다니며 미 제5공군사령부(지금의 서울대의대 자리) 강당에 피아노가 있는 것을 알고 미군의 협조를 받아 매일 2시간씩 연습을 하는 것으로 피아노에 대한 갈증을 풀었다. 1953년 10월에는 강당에서 미군을 상대로 피아노 연주회를 열었는데 그날 한동일의 음악적 재능을 확인한 제5공군사령관 새뮤얼 앤더슨 사령관이 그 자리에서 한동일의 유학을 돕겠다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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