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인천농민 신형준의 ‘세상 바투보기’] 영국 내셔널 갤러리의 10분짜리 동영상을 감상한 뒤 밀려온 슬픔 혹은 안타까움… 내가 586세대를 혐오하고 연민하는 이유

↑ 독일의 무명화가가 그린 ‘호퍼가 여성의 초상화(Portrait of a Woman of the Hofer Family)’

 

어릴 적, 신라의 천재 화가 ‘솔거와 소나무’ 이야기를 들으셨을 겁니다. 솔거가 벽에 소나무를 그렸더니, 새들이 날아와 앉으려다가 떨어졌다는.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서기전 5세기, 그리스에는 제욱시스(Zeuxis)라는 천재 화가가 있었답니다. 그가 포도나무를 그리면 새들이 날아와 앉으려다가 부딪혔다고 합니다.

서양미술사에서는 제욱시스의 이야기를 ‘2차원 회화 공간에 3차원 현실 세계를 담으려는 인간의 꿈을 담은 설화’라고 해석합니다. 현실(풍경)을 2차원 화폭에 완벽하게 담으려는 인간의 욕망은 이제는 별 대단한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근대 이전까지는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세계적 미술사학자 곰브리치의 표현을 잠깐 비틀어 표현한다면, 회화사는 ‘현실 풍경을 화폭에 완벽하게 담으려는 인간의 여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19세기 들어 이것이 이뤄지자, 고대나 중세 때처럼 다시금 ‘주관’이 화폭에 개입합니다. 인상파나 점묘파, 입체파, 야수파 등이 이 시기 이후 등장한 것은 결국 ‘화폭에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별 어렵지 않게 느껴지면서, 화폭에 화가의 주관적 시선이 담기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독일 화가 요한 게오르크 힐텐스페르거의 그림 ‘제욱시스의 포도와 새’(1842년)

 

파리(fly)를 그림으로써 2차원 화폭에 3차원 현실을 충실하게 재현

영국 내셔널 갤러리는 명화들을 10분 정도 분량에 담아 유튜브에서 설명합니다. 그들도 조회 수를 올리려 노력할 수밖에 없기에 제목은 ‘낚시성’으로, 신문기자들 표현을 빌자면 섹시하게 잡습니다. 어젯밤, 내셔널 갤러리 유튜브 사이트를 둘러보는데, 제목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왜 여인의 머리에는 파리가 앉았을까?’ 1470년경 독일 남부 슈바벤 지역에서 그린 어느 여인의 초상화를 설명하면서 제목을 이리 붙인 것입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여인의 오른쪽 머리 위로 파리 한 마리가 앉아 있습니다. 동영상을 해설하는 미술사가가 설명하듯, 당시 초상화 한 점을 그리는 것은 돈이 꽤나 드는 일이었습니다. 한데 더럽게 파리라니! 21세기에도 돈 1만 원 주고 증명사진을 찍을 때 파리가 화면에 담기면 ‘뽀샵’을 해달라고 하는 판인데요. 초상화 주인공은 화가에게 항의하지 않았을까요? 저라면 바로 항의했을 겁니다. 지워달라고 하든, 초상화 값을 치르지 않겠다고 이야기 하든. 이 장면에서, 미술사가는 제욱시스와 포도나무 이야기도 곁들이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화가는, 파리를 그림으로써 2차원 화폭에 3차원 현실을 충실하게 재현한 화가의 회화적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제야 저 역시 파리가 갖는 의미가 이해가 됐습니다.

 

동영상을 다 감상한 뒤 저는 뭔지 모를 슬픔 혹은 안타까움 같은 게 밀려와

한데, 동영상을 다 감상한 뒤 저는 뭔지 모를 슬픔 혹은 안타까움 같은 게 밀려왔습니다. 저런 이야기, 지적으로 성숙할 시기인 10대 후반, 20대 초중반에 많이 많이 들었어야 했는데…. 저를 포함한 80년대 학번들 대부분이 그럴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읽은 책이라고는 ‘사회 변혁을 위한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대학 1학년 때 제가 독일 언론인 출신 C. W. Ceram(독일인이므로 ‘체람’이라고 불러야 할 터인데, 우리에게는 영어식 ‘세람’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의 ‘낭만적인 고고학 산책’을 들고 다닐 때 어느 동급생은 “왜 이런 후진 책을…”이라고 이야기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게 우리의 독서는, 지식을 향한 창은 편중돼 있었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읽은 ‘사회 변혁서’는 원서를 제대로 번역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마르크스라는 이야기만 나와도 잡혀가던 때, 그들이 쓴 원서를 읽는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지요. 대부분 마르크스나 레닌의 저작을 일본인들이 ‘나름 해석하고 짜깁기’해서 쓴 해설서를 읽는 수준이었습니다. 정신적으로 가장 성장할 시점에 이런 식으로 배우고 생각했으니, 교양이나 지성의 측면에서 제대로 클 리가 있을지요. 그러니 1989년 6월, 중국에서 천안문 사태가 터졌을 때 제가 재학했던 서울대 동양사학과 재학생 상당수는 “서구에 편중된 언론 보도에 우리가 휘둘릴 필요가 없다. 간교한 서구 언론…” 운운했던 것이겠지요.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나대는’ 586을 제가 혐오하는 것은 이런 까닭입니다. 지적·정신적으로 가장 커가야 할 시기에 ‘가장 교조적으로’ 공부했던 세대였으며, 그런 지적 악습을 이후에도 답습한 세대라는 점에서 말입니다. 물론 저 역시 이 범주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 했습니다. 한데, 이것이 우리 세대만의 잘못일지요. 잘못되고 편중된 지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던 ‘시대 탓’도 분명 있을 겁니다. 그 점에서 저는 제 동년배, 그리고 저 스스로에게 연민을 보내는 것이고요. 유튜브 동영상 한 편 보면서 별 오만 잡생각을 하고 있지요? 할 일이 없나 봅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 세대는 제발 586과는 달리 넓게 읽고, 깊게 사유했으면 합니다. 제가 본 동영상을 한 번 감상해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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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신

이 그림에 대한 내셔널 갤러리의 설명을 여기에 옮기겠습니다. 유럽산 전나무 바탕에 유화로 그렸습니다. 53.7(세로) x 40.8㎝(가로) 크기입니다. 그림 한편에 ‘호퍼(Hofer)가 출신’이라고 적혀 있는데, 호퍼라는 성은 독일 남부에서 아주 흔한 성씨여서, 이 여인이 누구인지는 확정하지 못 한답니다. 화가 역시 1470년대에서 슈바벤 지역에서 활동한 화가이지만, 누군지는 모르고요. 여인은 물망초 가지를 들고 있는데, 이는 결혼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죽음이나 떠나감의 상징입니다. 여인이 결혼을 앞두고 있었는지, 죽음 혹은 이별을 앞둔 사람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답니다.

※‘바투보기’는
가까이에서 정밀하게 바라본다‘는 뜻이다. 고유어 ‘바투(두 대상이나 물체의 사이가 썩 가깝게)’와 ’보기‘를 합친 필자의 造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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