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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과 부부 ⑰] ‘발레의 신’ 니진스키와 ‘천부적 공연제작자’ 댜길레프의 동성 사랑… 니진스키가 여성과 결혼하면서 맞은 파국은 두 사람 모두에게 치명적 상처 남겨

↑  21살 니진스키(왼쪽)와 39살 댜길레프(19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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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러시아 발레단 ‘발레 뤼스’가 프랑스 파리의 샤틀레 극장에서 창단 후 첫 유럽 공연을 펼친 것은 1909년 5월 18일이었다. 그날은 발레 뤼스가 파리에서 한 달 동안 공연할 ‘러시아 시즌’의 첫 날이었다. 파리 관객들은 러시아의 발레 수준이 높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20세기 들어 발레의 인기가 시들해진 탓에 ‘발레 뤼스’ 공연에 특별히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츨라프 니진스키와 안나 파블로바 등 무용수들이 미하일 포킨이 안무한, 전과는 차원이 다른 발레를 선보이고 화려한 무대장치까지 눈앞에 펼쳐지자 관객들은 감탄사를 쏟아내며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처럼 파리 무용계를 깜짝 놀라게 한 주인공은 ‘발레 뤼스’ 단장 세르게이 댜길레프였다.

세르게이 댜길레프

 

■세르게이 댜길레프와 ‘발레 뤼스’

 

아이디어와 감식안, 조직력과 마케팅 능력 갖춰

세르게이 댜길레프(1872~1929)는 러시아 우랄산맥에 있는 도시 페름에서 부유한 지방 귀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때는 음악가를 꿈꿨으나 상트페테르부르크대에서 법학을 전공(1891~1896)했다. 음악적 감각은 있어 법학도이면서도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아카데미와 음악원에서 수업을 듣고, 작곡가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를 사사했으나 재능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작곡가의 길을 포기했다. 그가 대신 선택한 길은 다른 사람의 재능을 키워주는 예술 후원자 역할이었다.

대학 졸업 후 댜길레프는 유럽과 러시아의 새로운 미술을 선보이는 전시회를 잇따라 기획했다. 대학시절부터 친분이 두터웠던 예술가 친구들과는 1898년 11월 아방가르드 잡지 ‘예술세계’를 창간, 서구의 새로운 예술 조류를 러시아에 소개했다. 머지않아 황제까지 지원에 나서면서 ‘예술세계파’로 불린 댜길레프와 친구들은 문화예술계의 중심으로 진입했다. ‘예술세계’는 1904년 러일전쟁에 따른 후원 중단과 재정난으로 폐간될 때까지 6번의 대규모 전시회를 개최했다.

1904년 ‘예술세계’ 표지(왼쪽)와 1900년 잡지 안에 실린 사진

 

댜길레프는 성격적으로는 괴팍했지만 넘쳐나는 아이디어, 뛰어난 예술가를 알아보는 감식안,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예술가를 한데 모으는 조직력, 예술을 비즈니스로 연결하는 마케팅 능력을 두루 갖춰 문화기획자로 지평을 넓혀나갔다. 그 덕에 러시아 황실과 부유층의 후원을 끌어오고 유럽의 내로라하는 후견인들을 설득해 막대한 제작비를 충당했다.

댜길레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문화예술계의 중심 인물로 부상하자 예술의 중심지 파리로 눈을 돌렸다. 파리에서는 러시아 미술전시회를 개최(1906년)하고 ‘세종 뤼스’(프랑스어로 러시아 시즌)란 타이틀 아래 러시아 작곡가 모데스트 무소륵스키의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를 공연(1908년)하는 것으로 파리 예술계에 이름을 알렸다.

댜길레프가 다음 목표로 삼은 것은 러시아인들로 구성된 발레단 창단이었다. 다양한 분야에 걸쳐 예술가들의 능력을 한 무대에 집결시키는 데는 발레만 한 장르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무용수이면서 안무가인 미하일 포킨을 비롯해 바츨라프 니진스키와 안나 파블로바 등 뛰어난 무용수들을 끌어모았다.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에게는 쇼팽의 피아노곡 ‘레 실피드’를 발레 음악으로 편곡해줄 것을 요청하는 것으로 자신의 사단에 합류시켰다.

 

과거의 전통 거부하고 새로운 춤 추구

댜길레프는 이처럼 분야별 최고 인물들을 끌어모은 후 1909년 프랑스어로 ‘러시아 발레’라는 뜻의 ‘발레 뤼스’를 파리에서 창단했다. ‘발레 뤼스’는 과거의 전통을 답습하는 작품들을 거부하고 새로운 춤을 추구했다. 하지만 당시 파리의 문화예술계 인사들에게 발레는 시효가 끝난 낡은 예술 형식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화려함의 극치를 달렸던 러시아 발레도 고전주의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쇠퇴하고 있었다. 다만 마린스키 황실발레단에서 길러진 무용수들의 기량만큼은 세계 최고를 자랑했다. 댜길레프는 이들을 믿고 ‘벨 에포크(좋은 시절)’가 만연한 파리로 날아간 것이다.

댜길레프는 1909년 마린스키 황실극장의 휴가 기간에 맞춰 5월 18일~6월 18일 파리 샤틀레 극장에서 오페라와 발레로 ‘러시아 시즌’을 개최했다. 발레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황실발레단(현 상트페테르부르크 발레단)과 모스크바 볼쇼이 황실발레단 단원들을 기용했지만 그중 주역은 파블로바, 니진스키, 마신, 발랑신 등이 소속된 마린스키 발레단원들이었다. 발레 뤼스는 ‘러시아 시즌’에서 포킨이 안무한 ‘아르미드의 별장’ ‘레 실피드’ ‘클레오파트라’ 등을 선보였다. 그중에서도 파리 관객을 열광시킨 것은 음악, 무대예술, 무용 등 여러 장르의 예술을 결합한 ‘레 실피드’였다. 이후 ‘레 실피드’는 러시아 발레의 창세기이자 현대 발레의 출발점으로 인정받았다.

파리 샤틀레 극장

 

1910년 5~6월의 ‘러시아 시즌’은 더 큰 환호를 받았다. 무엇보다 오늘날 ‘발레의 신’으로 추앙받는 바츨라프 니진스키가 자기 기량을 제대로 펼쳐보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각별했다. ‘러시아 시즌’에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작품은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작곡하고 포킨이 안무한 ‘세헤라자데’(1910년 6월 4일 초연)였다. 특히 광란의 장면에서 노예와 후궁들이 춤추는 변화무쌍한 군무, 황금노예(니진스키)가 춤을 추는 솔로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니진스키는 스트라빈스키가 작곡하고 포킨이 안무한 ‘불새’(1910.6) 초연에서도 주역을 맡아 명성을 이어갔다.

 

발레가 종합예술로 자리매김한 전환점

공연의 잇따른 성공은 댜길레프의 인생 행로는 물론 니진스키와 스트라빈스키의 삶까지 바꿔놓았다. 오늘날 ‘발레 뤼스’는 여흥거리로 전락했던 발레가 다른 예술 장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종합예술로 자리매김하게 된 전환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발레 뤼스’는 1911년 4월~12월 몬테카를로, 로마, 파리, 런던에서도 공연을 가졌다. 로마를 제외한 세 도시는 발레 뤼스가 문을 닫을 때까지 중심지가 되었다.

‘발레 뤼스’ 공연에 유럽 예술가들도 열광했다. 장 콕토, 모리스 라벨, 에릭 사티, 파블로 피카소, 나움 가보, 마르크 샤갈 등 많은 예술가들이 발레 뤼스의 깃발 아래 앞다퉈 몰려들었다. 특히 프랑스 작가 콕토는 발레 뤼스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콕토는 1909년 5월 파리에서 열린 발레 뤼스의 첫 공연을 보고는 완전히 매료되었다. 이후 콕토는 공연 포스터를 직접 그려주고 친분 있는 예술가들을 댜길레프에게 소개했다. 대본도 여러 편 썼다.

장 콕토가 그린 ‘발레 뤼스’의 파리 공연 포스터(1911년). 사진 속 인물은 ‘장미의 정령’에서 춤을 추는 니진스키. 오른쪽 사진은 니진스키가 ‘장미의 정령’에서 실제 춤추는 모습.

 

발레 뤼스의 활동 기간은 흔히 3개의 시기로 구분된다. 1기는 1909~1914년 이국풍과 원시주의 시대, 2기는 1915~1921년 모더니즘이 도입된 시대, 3기는 1921~1929년 아방가르드 실험의 시대다. 1기는 1909년 첫 발레 뤼스 공연부터 안무가인 포킨이 떠나기 전까지로 발레 뤼스의 역사에서 최고의 황금기로 꼽힌다. 러시아, 동양, 그리스 등 서유럽과 구별되는 이국적인 소재와 무대, 의상이 자주 사용되었다. 강렬한 불협화음으로 가득한 스트라빈스키 음악의 원시주의적 특성도 이 시기에 드러났다.

 

■바츨라프 니진스키

 

그의 등장은 고전발레와 현대발레의 분기점

바츨라프 니진스키(1890~1950)는 어려서는 ‘발레의 신동’이었고 성인이 되어서는 ‘발레의 신’이었으며 죽어서는 ‘발레의 전설’이었다. 깃털처럼 가벼운 몸짓과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는 듯한 도약을 자유자재로 구사해 춤동작이 불가사의하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그의 등장은 고전발레와 현대발레의 분기점이자 여성 무용수의 보조에 머물렀던 남성 무용수의 자리를 새롭게 확보한 전환점이었다.

니진스키는 러시아령 우크라이나 키이우(키예프)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러시아로 귀화한 폴란드계 무용수였다. 니진스키는 8세 때 러시아 최고 발레학교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황실 발레학교에 입학, 재학 시절부터 뛰어난 테크닉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집안 분위기는 어두웠다. 형은 어렸을 때 사고로 중증의 정신질환을 앓았고 아버지는 니진스키가 8살 때 다른 여자 무용수와 사랑에 빠져 어머니에게 자주 손찌검을 하더니 결국엔 가족을 버려 집안은 심각한 빈곤상태에 빠졌다. 니진스키는 가난과 폭력 등 삶의 어두운 그늘을 연이어 목격하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폐에 가까운 말더듬이가 되었다.

그래도 니진스키는 1907년 4월 발레학교를 졸업하고 러시아 무용수로는 최고의 엘리트 코스인 마린스키 황실극장에 입단해 주역 무용수로 활약하면서 1909년 댜길레프가 조직한 ‘발레 뤼스’에 합류했다. ‘일본 꼬마’로 불렸던 163㎝의 작은 키와 굵은 다리, 그리고 광대뼈가 올라가고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동양적인 피부는 무용수로는 최악의 신체 조건이었으나 긴 목과 탄탄한 허벅지가 어딘지 모르게 야성적이고 섹시한 느낌을 주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이적 도약으로 어디서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니진스키 젊은 시절 모습

 

1909년 발레 뤼스가 선보인 ‘아르미드의 별장’으로 파리 무대에 데뷔한 그는 이후 ‘세헤라자데’(1910년), ‘카르나발’(1910년), ‘장미의 정령’(1911년), ‘페트루슈카’(1911년) 등에 출연, 초인적인 테크닉을 선보이며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쳤다. 특히 ‘페트루슈카’에서는 춤추는 인형 역을 맡아 관객들의 감탄을 불러 일으켰다. 기존 발레와 달리 손과 발의 관절을 이용한 동작과 마임을 통해 비통한 표정 연기를 선보여 인형의 양면성을 훌륭하게 표현해냈다. ‘페트루슈카’는 전통적인 발레와는 전혀 다른 음악 언어와 무용 언어를 선보였다는 점에서 파격적이었다. 인형이 발레나 오페라에 등장한 적은 있었지만 전적으로 주인공으로 나선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런 점에서 ‘페트루슈카’는 19세기 발레 전통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젤'(1910년, 왼쪽)과 ‘목신의 오후'(1912년)에서 춤을 추는 니진스키

 

니진스키 안무한 ‘목신의 오후’, 무용 혁신을 이룬 대표적 공연으로 인정받아

니진스키는 1911년 1월 마린스키 황실극장을 사직하고 발레 뤼스의 주역 무용수와 안무가 역할에만 몰두했다. 그러자 새로운 갈등이 불거졌다. 수석안무가인 미하일 포킨과의 갈등이 그것이었는데 평소 니진스키에게 열등감이 있었던 포킨은 댜길레프가 니진스키의 안무 능력을 과대평가한다며 반발했다. 니진스키의 안무 능력이 무용수 능력에 비해 떨어진다는 점에서 포킨의 주장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결국 사달이 난 것은 니진스키가 처음 안무한 ‘목신의 오후’가 무대에 올려지면서였다. ‘목신의 오후’는 클로드 드뷔시가 작곡하고 니진스키가 안무와 주역 무용수를 맡아 1912년 5월 29일 파리 샤틀레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당시 안무는 약속된 틀을 정하는 요즘과 달리 무용수들에게 지침만을 제공할 뿐 실제 공연에서는 즉흥적인 춤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니진스키는 음악가가 악보에 적힌 대로 연주하는 것처럼 사전에 약속된 동작을 춤추도록 안무의 틀을 짰다. 무용수들에게는 그리스식 의상을 입히고 발레의 대명사 같은 토슈즈를 벗게 했다. 춤도 발레의 전통적인 동작이 아닌 새로운 동작들로 구성했다. 고전발레의 전통에 사로잡혀 있던 단원들은 니진스키의 새로운 안무를 이해하지 못해 한동안 호된 시련을 겪었다. 관객들도 어리둥절해 했으나 니진스키의 실험정신에 대해서는 긍정적 평가를 내렸다.

댜길레프는 ‘목신의 오후’가 성공했다고 판단해 스트라빈스키가 작곡한 ‘봄의 제전’(1913.5 초연)까지 니진스키에게 안무를 맡겼다. 니진스키는 이번에도 고전적인 훈련 방식을 버리고 팔과 자세 그리고 몸동작을 재구성할 것을 단원들에게 요구했다. 니진스키가 연습 도중 단원들을 향해 몇 번이나 발작에 가까운 신경질을 터뜨리자 무용수들은 니진스키의 안무와 구성이 인간의 무용이라기보다는 야만스러운 동물의 춤 같다며 항의했다.

결국 1913년 5월 29일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초연한 ‘봄의 제전’은 관객들로부터 온갖 비명과 욕설과 야유를 들었다. 원시적이고 불규칙적인 리듬, 긴장과 신경질을 강요하는 스트라빈스키의 불협화음도 한 이유였지만 관객이 짜증을 낸 가장 큰 이유는 무용수들이 아름답기는커녕 사납고 공격적인 모습으로 춤을 추었기 때문이다. ‘봄의 초연’은 이처럼 당대에는 소란이 부각되고 ‘봄의 제전’이 아니라 ‘봄의 학살’이라고 혹평이 다수였으나 오늘날에는 무용 혁신을 이룬 대표적인 공연으로 인정받고 있다. 무엇보다 무용을 음악의 종속물에서 해방시켜 대등한 위치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다. 그러나 당시 댜길레프는 ‘봄의 제전’을 이후 발레 뤼스의 정규 레퍼토리에서 아예 빼 버렸다.

‘페트루슈카’(1911년, 왼쪽)와 ‘세헤라자데’(1910년)에서 춤추는 니진스키

 

■동성 연인

 

댜길레프, 사창가 경험 후 여성과 성적 관계 멀리해

댜길레프와 니진스키는 공적으로는 제작자와 무용수의 관계이지만 사적으로는 동성애 연인 관계였다. 댜길레프는 니진스키는 물론 자신의 발레단 소속의 다수 무용수를 동성애 상대로 삼았다. 당시 러시아의 귀족이나 재력가들이 남녀를 불문하고 자기 취향에 맞는 젊은 가수나 무용수를 애인으로 삼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마린스키 황실극장 소속의 무용수 중에도 이런 스폰서를 남몰래 숨겨둔 무용수가 적지 않았다. 니진스키 역시 30살이나 많은 동성애자 귀족과 내연관계를 유지하며 귀족이 제공하는 재정적 도움에 기꺼이 몸을 의탁했다. 그러다가 귀족이 니진스키를 댜길레프에게 소개하면서 니진스키와 댜길레프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댜길레프가 여성과 성적 관계를 멀리하게 된 데에는 대학 입학을 앞두었을 때 당시 귀족 자제들에게 필수 코스인 ‘그랜드 투어(수개월의 유럽 여행)’를 떠난 것이 작용했다. 그랜드 투어를 떠나기 몇 달 전 댜길레프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사창가에 갔는데 이는 당시 상류층의 일반적인 성교육 방법이었다. 동성애 성향을 느끼고 있던 댜길레프에게 이 경험은 여성과의 성적 관계에 혐오감을 갖도록 했다. 그랜드 투어에는 동갑내기 사촌 남동생 드미트리 필로소포프가 동행했다. 둘은 정반대 성격이었지만 예술에 대한 사랑과 지식에 대한 욕구가 크다는 공통점을 가졌다. 둘의 관계는 동성애 연인으로 발전했다.

 

니진스키, 댜길레프 처음 만난 날 사시나무처럼 몸 떨며 그를 받아들여

니진스키가 댜길레프를 만나기 위해 파리로 간 것은 마린스키 발레단에 입단한지 얼마 되지 않은 1908년 11월 경이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한 호텔방에서 이뤄졌다. 니진스키는 자신의 일기에서 당시 만남을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그의 목소리부터가 싫었다. 지나치게 자신에 찬 목소리였다. 그러나 나는 행운을 찾아 여기에 온 처지였다. 그리고 그 행운을 발견한 것이다. 그게 내가 그 자리에서 그를 사랑하게 된 이유이다.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면서.”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면서” 표현은 니진스키가 댜길레프에게 몸을 내맡겼다는 추측을 불러 일으켰다. 그런데 니진스키 아내 로몰라 회고록에는 “내가 그 자리에서 그를 사랑하게 된 이유이다.” 문장이 “그가 나에게 성행위를 하도록 내버려두었다”라고 고쳐졌다.

그런데 니진스키의 일기와 달리 당시 니진스키는 댜길레프의 애인이 되기 위해 매우 적극적이었다. 당시 러시아 문화예술계의 실력자인데다 파리에서 1906~1908년 ‘러시아 시즌’을 성공시킨 댜길레프가 자신에게도 날개를 달아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재정적 후원과 육체 관계의 교환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는 댜길레프의 다른 남자 애인이 달아나고, 장티푸스에 걸린 니진스키를 댜길레프가 간호한 것을 계기로 연인으로 발전했다.

니진스키(왼쪽)와 댜길레프

 

■작별

 

댜길레프와 니진스키 간의 파국이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온 것은 ‘봄의 제전’ 공연이 끝나고 1913년 8월 니진스키가 ‘발레 뤼스’의 남미 순회공연을 떠나면서였다. 댜길레프는 순회 공연에 동행하지 않았다. 순회공연단에는 로몰라 드 풀츠키라는 헝가리 귀족 출신의 신참 여성 단원이 있었다. 그녀는 무용수가 아닌 배우 자격으로 입단했는데 그녀가 공연단에 참가한 것은 연극이나 발레가 아니라 니진스키를 품에 안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니진스키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고도 충격을 받기는커녕 여자 애인이 없다며 오히려 반가워했다.

드 풀츠키의 기대 대로 두 사람은 20여 일간의 선박 여행 중 사랑에 빠져 1913년 9월 19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결혼했다. 유럽에서 전보를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댜길레프는 배신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니진스키에게 해고 전보를 쳤다. 그것은 둘 모두에게 치명적인 상처가 되고 말았다. 댜길레프는 니진스키가 파리로 돌아온 뒤에도 니진스키의 앞길을 가로막는 온갖 방법으로 보복을 가했다. 이후 오랫동안 댜길레프는 가해자, 니진스키는 피해자로 세상에 알려졌다. 하지만 댜길레프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는 니진스키의 아내인 로몰라 드 풀츠키가 출간한 책의 영향이 크다는게 평론가들의 중론이다.

댜길레프와의 작별 후 니진스키가 선택한 길은 발레단 창설이었다. 1914년 여동생 니진스카와 처남을 비롯해 10여 명의 무명 무용수를 끌어모아 발레단을 만들었으나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 댜길레프는 니진스키를 해고한 후 새로운 동성 애인을 구했다. 모스크바 볼쇼이발레단에서 데려온 레오니드 마신(1896~1979)이었다. 마신은 기량이 뛰어나다고 할 수 없었지만 미남인데다 연기력이 좋았다. 1914년 ‘요셉의 전설’에 출연한 뒤 발레 뤼스의 간판 발레리노로 자리 잡았다.

1914년 1차대전이 일어나 헝가리에 있던 니진스키에게 그해 말 댜길레프가 1915년에 예정된 미국 순회 공연에 동참할 것을 제안했다. 니진스키는 돈이 필요해 4개월에 걸친 미국 공연에 동참했다. 미국 관객들은 니진스키에게 환호를 보냈고 니진스키는 채플린과 카루소 등 스타들을 만나고 유럽으로 돌아왔다. 니진스키는 발레 뤼스의 1916년 두 번째 미국 공연과 1917년 남미 투어에도 동행했다.

 

■정신분열증과 말년

 

“10년은 자라고 10년은 배우고 10년은 춤추고 30년은 암흑에 가려진 60 평생”

그 무렵 니진스키의 정신 상태는 정상 궤도를 벗어나고 있었다. 결국 1917년 9월 30일,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과 함께 ‘페트루슈카’를 공연한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공식 무대에 서지 못했다. 다만 1919년 1월 스위스의 장크트 모리츠에서 수백 명의 지역 주민을 위한 공연에는 무대에 올랐는데 당시 공연을 본 관객들은 미친 사람의 공연을 본 것인지 정말 미친 사람을 본 것인지 혼란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정신 질환은 더욱 심각해졌다. 1917년 유럽으로 돌아와 스위츠의 생 모리츠로 휴양을 떠났지만 누가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내는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이상한 소리도 했다.

니진스키는 정신 붕괴를 겪기 시작할 무렵인 1919년 1월 19일부터 3월 4일까지 6주 반 동안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쉼없이 써내려갔다. 이때 쓴 일기는 분열과 혼란의 소용돌이에 빨려들어가기 시작한 한 인간의 특이하고도 예외적인 정신분석학적 텍스트였다. 1919년 3월 6일 니진스키를 진찰한 의사가 “불치의 정신분열증에 걸렸으니 요양소로 보내야 한다”고 조언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10여 년 동안 세계 최고의 정신과 의사들이 니진스키를 치료했으나 결국 암흑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정신분열증’이란 용어를 처음 조어한 오이겐 블로일러를 비롯해 카를 구스타프 융, 지그문트 프로이트까지 진찰했으나 누구도 니진스키의 상태를 되돌리진 못했다.

니진스키 부부

 

댜길레프, 니진스키와 결별 후 하향길로 접어들어

한편 댜길레프는 새로운 애인 마신도 1921년 해고했다. 마신이 발레 뤼스 군무였던 여성과 몰래 사귀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댜길레프는 마신을 쫓아낸 후 한동안 상실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마신의 삶은 니진스키와 달랐다. 마신은 여성과 결혼한 후 작은 발레단을 만들어 투어를 돌았다. 성격이 낙천적이어서 여러 극장에서 공연 러브콜을 받았다. 마신은 1924~1927년 댜길레프의 부름을 받고 다시 발레 뤼스에 돌아와 안무가로 활동했다. 댜길레프는 마신과 헤어진 후에도 여러 젊은 남성 무용수들과 사랑을 나누었다. 그중 한명은 나중에 여성과 결혼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상대는 니진스키의 딸인 키라 니진스키였다.

댜길레프 역시 니진스키가 없는 ‘발레 뤼스’와 더불어 하향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1929년 8월 19일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눈을 감았다. ‘발레 뤼스’는 댜길레프의 죽음과 함께 해체의 길을 걸었지만 단원들은 프랑스로 영국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발레 뤼스’의 유산을 계승하며 현대 발레의 주춧돌을 놓았다. 특히 포킨, 파블로바, 니진스카, 카르사비나, 루빈스타인, 마신, 발란신, 리파 등 많은 러시아 출신 단원들이 러시아혁명 이후 정치적으로 불안한 고국에 돌아가기보다 유럽이나 미국행을 택한 것이 그 배경에 있다. 실례로 영국 로열발레단과 램버트무용단의 창단, 미국 아메리칸발레시어터와 뉴욕시티발레단의 창단, 파리오페라발레단의 부활 등은 발레 뤼스 출신에 의해 이뤄졌다.

니진스키는 30여년 간을 정신병동에서 지내다 1950년 4월 8일 영국 런던의 한 사설 진료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니진스키의 전기작가 리처드 버클의 표현대로 “10년은 자라고 10년은 배우고 10년은 춤추고 30년은 암흑에 가려진 60 평생”이었다. 니진스키의 뒤를 이어 루돌프 누레예프,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같은 발레 스타들이 솟아올랐지만, ‘발레의 신’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은 오직 니진스키에게만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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