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연인과 부부 ⑰] ‘발레의 신’ 니진스키와 ‘천부적 공연제작자’ 댜길레프의 동성 사랑… 니진스키가 여성과 결혼하면서 맞은 파국은 두 사람 모두에게 치명적 상처 남겨

↑  21살 니진스키(왼쪽)와 39살 댜길레프(1911년)

 

☞ [연인과 부부] 시리즈 전체가 궁금하다면 클릭!!

 

by 김지지

 

러시아 발레단 ‘발레 뤼스’가 프랑스 파리의 샤틀레 극장에서 창단 후 첫 유럽 공연을 펼친 것은 1909년 5월 18일이었다. 그날은 발레 뤼스가 파리에서 한 달 동안 공연할 ‘러시아 시즌’의 첫 날이었다. 파리 관객들은 러시아의 발레 수준이 높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20세기 들어 발레의 인기가 시들해진 탓에 ‘발레 뤼스’ 공연에 특별히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츨라프 니진스키와 안나 파블로바 등 무용수들이 미하일 포킨이 안무한, 전과는 차원이 다른 발레를 선보이고 화려한 무대장치까지 눈앞에 펼쳐지자 관객들은 감탄사를 쏟아내며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처럼 파리 무용계를 깜짝 놀라게 한 주인공은 ‘발레 뤼스’ 단장 세르게이 댜길레프였다.

 

■세르게이 댜길레프와 ‘발레 뤼스’

 

아이디어와 감식안, 조직력과 마케팅 능력 갖춰

세르게이 댜길레프(1872~1929)는 러시아 우랄산맥에 있는 도시 페름에서 부유한 지방 귀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때는 음악가를 꿈꿨으나 상트페테르부르크대에서 법학을 전공(1891~1896)했다. 음악적 감각은 있어 법학도이면서도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아카데미와 음악원에서 수업을 듣고, 작곡가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를 사사했으나 재능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작곡가의 길을 포기했다. 그가 대신 선택한 길은 다른 사람의 재능을 키워주는 예술 후원자 역할이었다.

대학 졸업 후 댜길레프는 유럽과 러시아의 새로운 미술을 선보이는 전시회를 잇따라 기획했다. 대학시절부터 친분이 두터웠던 예술가 친구들과는 1898년 11월 아방가르드 잡지 ‘예술세계’를 창간, 서구의 새로운 예술 조류를 러시아에 소개했다. 머지않아 황제까지 지원에 나서면서 ‘예술세계파’로 불린 댜길레프와 친구들은 문화예술계의 중심으로 진입했다. ‘예술세계’는 1904년 러일전쟁에 따른 후원 중단과 재정난으로 폐간될 때까지 6번의 대규모 전시회를 개최했다.

댜길레프는 성격적으로는 괴팍했지만 넘쳐나는 아이디어, 뛰어난 예술가를 알아보는 감식안,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예술가를 한데 모으는 조직력, 예술을 비즈니스로 연결하는 마케팅 능력을 두루 갖춰 문화기획자로 지평을 넓혀나갔다. 그 덕에 러시아 황실과 부유층의 후원을 끌어오고 유럽의 내로라하는 후견인들을 설득해 막대한 제작비를 충당했다.

댜길레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문화예술계의 중심 인물로 부상하자 예술의 중심지 파리로 눈을 돌렸다. 파리에서는 러시아 미술전시회를 개최(1906년)하고 ‘세종 뤼스’(프랑스어로 러시아 시즌)란 타이틀 아래 러시아 작곡가 모데스트 무소륵스키의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를 공연(1908년)하는 것으로 파리 예술계에 이름을 알렸다.

댜길레프가 다음 목표로 삼은 것은 러시아인들로 구성된 발레단 창단이었다. 다양한 분야에 걸쳐 예술가들의 능력을 한 무대에 집결시키는 데는 발레만 한 장르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무용수이면서 안무가인 미하일 포킨을 비롯해 바츨라프 니진스키와 안나 파블로바 등 뛰어난 무용수들을 끌어모았다.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에게는 쇼팽의 피아노곡 ‘레 실피드’를 발레 음악으로 편곡해줄 것을 요청하는 것으로 자신의 사단에 합류시켰다.

 

#니진스키 #댜길레프 #발레뤼스 #발레 #동성애 #봄의제전 #목신의오후 #디아길레프 #페트루시카

 

☞ 전문(全文)을 다른 곳으로 옮겼습니다. 클릭!!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