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독립운동가 김규식을 소개하는 표지판이 美 대학 교정에 세워졌다는데… 정치적 평가는 달라도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것은 확실하지요

↑ 김규식

 

by 김지지

 

2022년 3월 31일 미국 버지니아주 세일럼에 있는 로어노크 대학 교정에서 새로 지정된 버지니아주 역사기념물 표지판 제막식이 열렸다. 표지판의 맨 위에는 ‘KIM KYU SIK’이라는 알파벳 대문자와 ‘(1881~1950)’이라는 생몰연도가 큼지막하게 조각됐다. 버지니아주는 1927년부터 주 역사기념물 지정 제도를 도입해 주의 역사에 의미 있는 행적을 남긴 인물이나 사건의 자취가 깃든 곳에 기념 표지판을 세워 관광·교육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표지판에는 김규식이 로어노크대를 졸업한 동문으로 대한민국 임정에서 부주석을 지내고,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해 국제사회에 독립을 호소했으며, 광복 후에는 남북 분단 반대 진영에서 활동하다가 6·25전쟁 때 납북되어 사망한 일생이 소개되어 있다. 대한민국 독립운동가의 생애가 버지니아주 역사의 한 장(章)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16살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 떠나

김규식(1881-1950)은 해방 전에는 임시정부 각료로 활동하며 중국, 미국, 프랑스 등 해외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던 독립운동가였다. 해방공간(1945~1948년)에서는 극단적인 좌우의 이념대립 속에서도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며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진력했다. 미군정이 한때 김규식을 이승만 대신 과도정부의 대통령에 앉힐 계획을 세울 정도로 미군정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나 미군정의 단독정부 수립 방침에는 호응하지 않았다. 이런 김규식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권모술수를 쓰지 않는 몇 안 되는 정치인” “정치적 카리스마가 부족하고 우유부단한 성격” “냉정하고 차갑다” “배짱이 없고 마음 약해” “명분론에 치우친 이상주의자” 등이 그것이다.

김규식은 부산 동래에서 태어났으나 굳이 고향을 따지자면 강원도 홍천이다. 홍천이 고향인 부친이 대외관계 일을 맡아 동래에 부임했을 때 어머니가 동래에서 김규식을 낳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김규식이 5살이던 1886년 세상을 떠났다. 그 무렵 부친이 조선과 일본 간의 부정한 물품거래를 고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되어 김규식은 서울 숙부집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숙부는 경제적으로 어려워 미국인 선교사 호러스 언더우드가 1886년 5월 서울 정동에 설립한 고아원에 김규식을 맡겼다. 1891년 부친이 유배에서 풀려나 부친을 따라 강원도 홍천으로 돌아갔으나 1892년 부친마저 세상을 떠나 다시 서울의 언더우드 고아원으로 돌아왔다.

김규식은 언더우드 고아원이 학교로 발전한 언더우드 학당(1894년, 경신고 전신)과 한성관립영어학교(1896년)를 졸업하고 독립신문에 입사했다. 그러던 중 독립신문 사장 서재필과 언더우드의 도움으로 1897년 가을 16살 나이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03년 6월 버지니아주 로어노크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04년 봄 프린스턴대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로어노크 대학 시절 김규식은 1900년 6월경 열린 강연대회에서 1등을 수상하고 1902년 1월 전교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The Daun in East(동방의 서광)’ 제목의 연설문은 그 지역 잡지 2월호에 실렸다.

1904년 귀국 후에는 경신학교, YMCA, 배재학당, 숭실학교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언더우드의 비서로 활동했다. 당시 언더우드가 김규식을 얼마나 신뢰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1906년 언더우드가 유언장을 작성할 때 자신의 아내와 아들보다 김규식을 먼저 언급한 뒤 김규식에게 당시로서는 거금인 500달러와 선교사들이 설립한 회사의 주식 5주를 남긴 것이다.

 

일제강점기, 해외를 떠돌며 조국 독립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

김규식은 1910년 일제의 강제 합병으로 조국이 패망하고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일제의 압박이 가해오자 1913년 중국 상해로 망명, 신규식이 상해 프랑스 조계 내에 설립한 박달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1918년 8월 상해에서 여운형, 김철, 정인보, 신규식, 신채호 등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했다. 신한청년단은 1차대전 종전 처리를 위해 전쟁 관련 당사국이 1919년 1월 18일 파리에서 열릴 예정인 평화회의에 김규식을 조선인 대표로 파견했다.

김규식은 2월 1일 상해를 출발해 3월 13일 파리에 도착했다. 그 사이 조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난 것을 알고 파리의 한 건물에 한국대표관을 개설한 뒤 3·1운동 사실을 각국 대표단에게 소상히 알렸다. 1919년 4월 11일 발족한 상해 임시정부는 김규식의 대외 활동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4월 13일 김규식을 임시정부 외무총장 겸 파리평화회의 대표위원으로 임명한다는 신임장을 전보로 타전했다. 김규식은 한국대표관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로 개칭했으나 독립국 대표가 아니라는 이유로 파리평화회의 회의장에 발을 들여놓진 못했다. 프랑스는 일본 요청을 받아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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