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개원… 한국 근대 사상 첫 대의정치기관 탄생

↑ 남조선과도정부 입법위원 1주년 기념식(1947.12.13). 김규식 의장이 앞줄 가운데 앉아 있고 앞줄 주변에 안재홍(왼쪽 2번째)과 서재필(왼쪽 4번째)이 앉아있다.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되자 미 군정은 혼미한 정국을 더 이상 수수방관할 수 없었다. 북한이 1946년 2월에 이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11월 3일을 선거일로 정해 사실상 북한 단독정권 수립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상황이라 더욱 그랬다. 미 군정 역시 모스크바 3상회의에 의한 통일임시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정치․경제․사회적 개혁의 기초로 사용될 법령 초안을 만들 입법의원이 필요했다.

이런 목적으로 1946년 8월 24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입법의원)’ 창설을 발표했으나 군정 연장설,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설 등 입법의원 창설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미 군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10월 12일 군정법령 제118호로 입법의원 창설을 공포했다. 90명의 의원 중 절반인 45명은 전국에서 간접선거로 선출하는 민선의원이었고, 나머지 45명은 미 군정 장관이 직접 임명하는 관선의원이었다. 민선의원은 일정 납세액 이상인 자 중 선출했고 관선의원은 좌우합작위의 심사를 거쳐 하지 사령관이 임명했다.

이승만과 김구가 입법의원에 들어가지 않고, 관선의원으로 발표된 여운형, 장건상, 홍명희, 조완구, 엄항섭 등 5명이 각기 다른 이유로 사퇴해 입법의원 창설이 처음부터 순탄하지는 않았다. 당초 개원 예정일은 11월 4일이었으나 좌우합작위에서 부정선거와 친일인사 등장 등을 문제 삼아 서울과 강원도에서 재선거를 치르는 바람에 12월 12일로 늦어졌다.

정식 개원을 하루 앞두고 열린 예비회의도 재선거에 불만을 표시한 한민당 출신 의원들의 출석 거부로 파행이 빚어지긴 했으나 예비회의에 모인 53명으로 지도부를 구성해 김규식을 의장, 최동오와 윤기섭을 각각 부의장으로 선출해 의장단을 구성했다. 입법의원은 1946년 12월 12일 미 군정청 회의실에서 개원했다. 이로써 한국 근대 사상 최초의 대의정치기관이 탄생했다. 등록의원 74명 중 57명과 각계 인사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개원식은 김규식 의장의 선창으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친 후 1시간 30분 만에 폐회했다.

한국 역사상 최초로 구성된 입법의원에 대해 일부에서는 미 군정의 관할 하에 있다는 이유로 ‘모의국회’라고 비아냥대기도 했지만 사실 입법의원의 활약상은 모의국회로 폄하될 만큼 허술하지 않았다. 의원들은 미 군정 당국의 독단적 처사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애를 써 ‘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 등 11개 법률을 공포하고 50여 건의 법률을 심의했다. 미 군정이 법령으로 공포한 80여 건의 법률에 비하면 적었지만 과도 입법기관으로의 역할은 충실히 수행한 셈이다.

1947년 1월 20일에는 미 군정의 의사에 반하는 신탁통치 반대 결의안을 압도적 다수로 채택해 하지를 당혹하게 했다. 이는 소련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던 북조선인민회의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쾌거였다. 입법의원은 1948년 5월 19일 즉 5·10 선거 후 구성된 대한민국 국회가 개원하기 며칠 전 해산되었다. 이로써 파란으로 점철된 미 군정 과도기도 끝이 났지만 입법의원 가운데 15명이 제헌국회에 진출하고 개원에도 깊숙이 관여함으로써 입법의원 때 쌓은 경험을 살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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