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김규식·여운형 주도의 좌우합작 운동

↑ 왼쪽부터 김규식 서재필 여운형

 

두 사람은 통일 임시정부 수립이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라는 데 뜻 같이해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되자 중도우파의 김규식과 중도좌파의 여운형은 좌우파가 먼저 합작한 뒤 이를 바탕으로 남․북의 정파가 통합해 통일정부를 세우자는 좌우합작론을 폈다. 당시 김규식은 미 군정의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민국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 의장이었고, 여운형은 좌파 연합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의장단이었다. 두 사람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한 통일 임시정부 수립이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라는 데 뜻을 같이했다.

1946년 7월 25일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린 좌우합작위 1차 회담에는 김규식, 원세훈, 안재홍, 최동오, 김붕준 등 5명의 중도우파와 여운형, 성주식, 정노식, 이강국 등 4명의 중도좌파가 참석했다. 1차 회담에서 양측은 합작의 기본원칙으로 3개항에 합의했으나 합작위의 좌파 파트너인 민전이 박헌영의 사주를 받아 합의 사항을 무시한 채 7월 26일 일방적으로 ‘합작 5원칙’을 발표해 초반부터 난항을 겪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 지지, 무상몰수 무상분배 토지개혁, 친일파 완전 배제, 투옥된 애국자 석방, 미 군정 권한 인민위원회 이양 등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좌파의 5원칙에 우파는 7월 29일 ‘합작 8원칙’으로 맞불작전을 펼쳤다. 좌우합작에 따른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미소공위 재개 요청 등을 담은 8원칙은 5원칙에 비하면 온당하고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박헌영과 여운형의 갈등으로 좌파가 7월 29일의 좌우합작위 2차 회담에 불참한 후부터 좌우 양측은 5원칙과 8원칙을 놓고 서로를 비난하는 성명전을 주고받았다. 게다가 조선공산당이 9월 총파업과 10월 폭동을 잇따라 일으키고 박헌영 등의 방해까지 겹치면서 합작운동은 물 건너가는 듯했다.

그런 가운데 여운형과 김규식은 10월 7일 좌우합작 ‘7대 원칙’을 공동명의로 발표해 꺼져가는 불씨를 되살리려 했다. 김구 주도의 한독당은 7원칙을 크게 환영한 반면 좌우파의 대표 정당 격인 조선공산당과 한민당 그리고 이승만 진영은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결국 불씨는 살아나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다수 세력이 합작운동을 반대한 것도 실패의 한 원인이었지만 좌우합작파를 남조선과도입법의원(입법의원)에 참여시킨 미 군정의 깊숙한 개입과 1947년 시작된 미국의 세계전략 변화도 합작운동을 무산시킨 중요한 원인이었다.

 

좌우합작 실패는 해방공간의 중요한 교훈

그동안 미 군정은 좌파를 입법의원에 참여시켜 좌우가 조화를 이루는 임시정부를 수립할 목적으로 합작위에 입법의원 참여를 권고했고, 합작위는 역으로 입법의원을 활용할 수 있다는 계산으로 내부의 거센 찬반 논쟁을 거쳐 미 군정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결국 이 과정에서 합작운동에 참여한 여러 정파가 떨어져나갔다. 또한 입법의원으로 참여한 합작파도 주로 우파들로 구성된 입법의원 대부분이 합작운동보다는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에 관심이 있다보니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1947년 1월 입법의원이 ‘신탁통치 반대 긴급결의안’을 채택하고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함에 따라 입법의원직을 합작운동에 활용하려던 좌우합작파는 결국 터전을 잃고 물러나야 했다. 1947년 7월 여운형이 피살되고, 같은 해 12월 홍명희․이극로 등 중도파 정당 및 사회단체가 김규식을 위원장으로 한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함으로써 좌우합작 운동은 뜻도 제대로 펴보지 못한 채 간판을 내려야 했다.

사실 좌우합작 운동은 미국의 의지가 분명할 때만 지속될 수 있었다. 미국이 신탁통치가 더 이상 유효한 대안이 아닌 것으로 판단하면 좌우합작 역시 추동력을 잃을 가능성이 높았다. 1946년 말까지 미국의 세계전략 기조는 국제주의였다. 그러나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미국의 세계전략은 국제주의에서 봉쇄정책으로 바뀌었다. 봉쇄정책이란 미국이 자본주의 국가들하고만 호혜적이고 우호적인 교류 및 교역관계를 유지하고 사회주의권과는 더 이상 그런 관계를 갖지 않겠다는 것이다.

미국의 세계전략이 국제주의였을 때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4개국 신탁통치였다. 그러나 세계전략이 봉쇄정책으로 바뀌면서 대한(對韓) 정책 역시 변화가 불가피했다. 한반도에서도 소련을 배제하고 그들의 확장을 봉쇄하는 정책이 필요해진 것이다. 그것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었다.

이처럼 미국의 세계전략이 급변하고 있는데도 김규식은 민족주의 열정에 사로잡혀 1948년 봄, 김구와 함께 평양의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했다가 김일성에게 이용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남북연석회의 실패와 함께 합작운동은 완전히 무위로 끝났고 역사에는 실패한 운동으로 기록되었다. 이승만․김구는 물론 김일성․박헌영이 모두 참가하지 않는 한, 특히 미․소의 지원 없이는 합작이고 뭐고 간에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해방공간의 중요한 교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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