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72년 5월 15일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를 축하하는 플래카드
by 김지지
독립 왕조 ‘류큐(琉球) 왕국’이 일본의 오키나와현으로 강제 편입된 것은 1879년
1429년 오키나와 섬 일대를 무력으로 통일하면서 시작된 ‘류큐(琉球) 왕국’은 오키나와 섬과 이웃한 여러 섬까지 관할했던 독립 왕국이었다. 지금의 오키나와현은 일본과 대만 사이에 동서 1000㎞, 남북 400㎞를 잇는 160여개 섬으로 이뤄져 있지만 당시 류큐 왕국이 통치했던 섬은 이보다는 적었을 것이다. 류큐 왕국은 한국과 중국, 일본과 대만에서 서로 비슷한 거리여서 무역(혹은 조공)과 외교를 통해 독립을 유지했다. 우리의 조선과도 관계가 밀접해 조선왕조실록 온라인 검색 사이트에서 ‘유구국’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면 국역 기준 367건이 나온다. 그중 하나를 예로 들면 “유구국 중산왕이 신하라고 칭하면서 예물을 바치고 포로 8명을 송환하다.”(1392년 윤12월 28일 태조실록)라는 기록이 있다.
류큐 왕국이 맞은 첫 위기는 1609년 일본 사쓰마번(현재 규슈 남부의 가고시마현) 세력의 침략이었다. 사쓰마 군대는 왕과 왕자 등 100여명을 인질로 삼아 매년 쌀 8000석을 바치겠다는 서약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당시 류큐 왕국이 청나라의 조공국이었기에 청나라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류큐의 정치체계나 문화를 그대로 유지시켜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관계를 유지했다. 덕분에 류큐 왕국은 외교와 해상무역으로 정치경제적 안정을 계속 이어갔다.

하지만 19세기 후반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고 중국이 서구 열강의 놀이터가 된 와중에 1879년 4월 일본의 침략을 받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일본은 류큐의 마지막 왕을 후작에 봉하고 왕세자와 함께 도쿄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류큐 지역에 오키나와현(沖繩縣)을 설치해 자국의 영토로 삼았다. 일본은 이후 강압적인 식민지 정책을 시행해 언어와 두발, 풍속과 생활관습까지 철저히 일본화했다.
류큐는 이렇게 오키나와현으로 편입되었지만 1000㎞나 떨어진 일본 본토로부터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그렇고 그런 존재 취급을 받았다. 태평양전쟁 종전을 앞둔 1945년 4월 1일부터 3개월 동안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는 버려진 섬의 위상을 단적으로 일깨워준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1만5000명, 일본 본토의 정규군은 6만6000명이 목숨을 잃었으나 오키나와 주민들은 인구의 30%인 12만 명이 희생되었다. 이처럼 많은 주민이 죽음으로 내몰린 것은 미군의 본토 진격을 하루라도 늦추기 위해 오키나와 주민을 총알받이로 내세운 일본 군부의 ‘옥쇄작전’ 때문이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존재 취급 받아
패전 후에도 일본은 오키나와를 미국과의 흥정 대상으로 삼아 오키나와 주민들로부터 반발을 샀다. 도쿄 전범재판이 진행되던 1947년 9월 히로히토 천황이 자신의 전쟁 책임을 면하기 위해 오키나와를 미군에 장기 조차 형식으로 넘기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이 때문에 히로히토는 1989년 죽을 때까지 오키나와 땅을 밟지 못했다.
일본은 오키나와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한 미국이 1949년 오키나와에 미군 기지를 건설할 때도 눈감아주었다. 1952년 4월 미일안보조약의 발효로 일본 본토가 미 군정에서 벗어나 독립할 때도 일본은 오키나와를 미국의 신탁통치 상태 그대로 두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오키나와를 방치하는 태도를 취했다. 오키나와 주민은 본토 여행을 하려면 여권과 비슷한 신분증명서를 지참해야 했다. 그걸 들고 여행지 출입국 심사관에게 제출하면 ‘일본국으로의 귀국을 증명함’이라는 스탬프를 찍어주고, 돌아갈 때에는 거꾸로 ‘출국을 증명함’이라는 스탬프를 찍었다.
일본의 이런 묵인과 방조 덕에 미군은 오키나와에 이미 수용하고 있는 토지를 소유자와 계약 없이 단독으로 사용했다. 이런 식으로 미군이 수용한 토지만 오키나와 땅의 20%를 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55년 9월 미군 병사가 6세 어린이를 폭행살해하는 등 미군 범죄까지 계속되면서 주민들의 분노가 층층이 쌓였다. 1960년대 들어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군사개입이 본격화했을 때는 오키나와에서 B-52 폭격기가 베트남으로 발진하고 오키나와 주둔 미 해병대가 베트남전에 파병되는 등 오키나와는 미 군사력의 견고한 보루 역할을 했다. 그러자 베트남 반전운동과 맞물려 오키나와 주민들의 조국 복귀 운동이 거세게 전개되었다.
1964년 11월 발족한 사토 에이사쿠 내각은 오키나와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해 미국에 오키나와 반환을 요구했다. 1965년 8월엔 사토 총리가 전후 현역 총리로는 처음으로 오키나와를 방문해 “오키나와의 조국 복귀가 실현되지 않는 한 전후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볼 수 없다”며 강한 의지를 보였다. 베트남전 개입으로 후유증을 앓고 있는 미국 역시 오키나와 문제를 마냥 외면할 수 없어 오키나와를 일본에 돌려주되 오키나와 기지는 그대로 존속시키고 일본에는 새로운 역할을 부담시켜 대아시아 정책을 재정비하는 방향으로 목표를 수정했다.

1972년 소유권이 미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갔으나 본토에 대한 오키나와 주민의 악감정 사라지지 않아
이런 와중에 1968년 11월 19일 베트남 폭격을 위해 오키나와의 가데나 기지에서 발진한 B-52기 폭격기가 핵무기 저장소 부근에 추락·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나 주민들을 경악시켰다. 다행히 핵무기가 폭발하지는 않았지만 주민들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5만여 명의 주민들이 1969년 2월 가데나 기지 앞에서 항의시위를 벌이는 등 시위 강도를 높여나가자 미국은 오키나와 주민의 조국복귀 요구나 일본의 국민감정을 무시하고는 오키나와 기지 사용마저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해 반환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오키나와 반환협정은 1971년 6월 17일에 조인되고 중의원(1971.11.24)과 참의원(12.22)을 통과해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1972년 5월 15일 0시, 사이렌과 기적소리가 일본 오키나와 전역에 울려퍼졌다. 27년간의 미국 통치에서 벗어나 ‘오키나와현’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것을 자축하는 감격의 소리였다. 그러나 본토에 대한 오키나와 주민의 악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1975년 7월 17일 오키나와를 방문한 아키히토 황태자 부부가 위령탑에 참배할 때는 2명의 오키나와 청년이 화염병을 투척하고 ‘황태자 오키나와 방문 저지’ 벽보가 곳곳에 나붙었으며 일장기 ‘히노마루’가 불에 태워지거나 하수구에 처박혔다. 1999년 11월 오키나와 출신의 가수 아무로 나미에가 천황 즉위 10주년 기념 피로연에서 일본의 국가인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은 것도 일본 정부에 대한 무언의 항의였다.
2007년 고등학교 일본사 교과서에 실릴 오키나와 전투 관련 내용 중 집단자결과 관련해 군의 명령 및 강제가 있었다는 기술을 문부과학성이 변경하려 했을 때는 11만 명이 참여한 현민 대회가 오키나와 본섬과 낙도에서 개최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교과서 왜곡 시도는 좌절되었지만 일본 정부는 교과서에서 불편한 내용을 삭제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 이처럼 일본 본토의 차별에 반발해 류큐 독립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있긴 하지만 실제로 독립을 원하는 주민들의 숫자는 많지 않다.
후텐마 비행장 이전 계속 늦어져
오키나와는 일본 전체 국토 면적의 0.6%에 불과하지만 미군기지의 70%가 오키나와에 집중되어 있다. 미군 기지 중 대표적인 시설이 후텐마 비행장이다. 미군은 1945년 태평양전쟁 당시 이 지역을 점령한 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문제는 헬기와 항공기가 매일 이착륙하는데 주거지역과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안전사고가 끊이지 않아 ‘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미군기지’로 불린다. 기지 이전 문제가 본격화된 건 1995년 9월 미군이 12세 소녀를 성폭행한 사건이 발생하면서부터다. 하지만 당시 미군이 범인 3명의 일본 측 신병 인도를 거부하자 주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이는 후텐마 기지 폐쇄 운동으로 이어졌다. 결국 1996년 4월 당시 하시모토 정권은 기지를 5~7년 내 다른 곳으로 이전하기로 미국 정부와 합의했다.

일본 정부는 1996년 12월 기존 기지에서 52㎞ 떨어진 헤노코 해안 지역을 대체부지로 선정했다. 하지만 오키나와 주민들은 헤노코로 옮기더라도 안전이 위협받기는 마찬가지이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안 산호초 지역을 파괴할 수 있다는 점 등에서 반대했다. 미군 기지를 오키나와 바깥으로 옮겨 달라는 목소리가 커졌지만, 미일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1999년 12월 ‘헤노코 이전’을 최종 확정했다. 이후 지난한 과정을 거쳐 2014년까지 ‘헤노코 연안지역 매립→V자형 활주로 건설’을 완료하기로 2006년 확정했으나 비행장 이전은 2022년 현재까지도 완료되지 않고 있다. 헤노코 해안 지역의 지반이 약해 매립공사에만 당초 계획했던 것보다 길어져 2030년대에나 끝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또 하나 문제는 오키나와현 지사가 매립공사 중단을 요구하고 있어 중앙정부와 오키나와현청 간의 갈등이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