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레닌과 스탈린 (1922년)
by 김지지
강철 같은 기질로 과업을 추진해 레닌의 신임 받아
1924년 1월 21일, 인류 역사상 최초로 공산주의 국가를 탄생시킨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이 모스크바 근교 고리키 별장에서 54세로 눈을 감았다. 뇌졸중이 공식 사인으로 발표되었지만 ‘철의 장막’이 늘 그러했듯 죽음을 둘러싼 음모론이 무성했다. 스탈린의 지시로 독약을 장기간 소량씩 투약했다는 독살설의 진원지는 스탈린과의 정치 투쟁에서 패한 레온 트로츠키였다. 최근에는 망명 때 걸린 매독에 의한 정신착란설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소문이 무엇이든 죽기 전 레닌의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극도로 긴장해야 하는 오랜 혁명 활동과 그에 따른 과로는 1921년 중반부터 격심한 두통을 불러왔다. 정치적 반대자가 쏜 총탄을 몸에 지니고 있다가 4년 후 제거한 것도 생명을 갉아먹었다. 레닌은 건강을 위해 집무실을 벗어나 고리키 별장에 머물 때가 많았으나 건강은 더욱 악화했다. 첫 발작이 일어난 것은 1922년 5월이었다. 정상적 활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공산주의가 뿌리내릴 때까지 일에서 손을 뗄 수 없었다. 1923년 3월 발병한 3번째 정신착란은 레닌을 사실상 식물인간으로 만들었다.
레닌의 시신은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방부 처리되어 모스크바 붉은광장 지하 영묘에 안치되었다. 레닌을 신격화할수록 자신의 위치도 탄탄해질 것이라는 스탈린의 계산이었다. 레닌이 죽기 전, 유력한 후계자는 트로츠키였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자신의 입지를 과신한 나머지 당내 기반을 다지는 데 소홀히 하는 바람에 권력은 동갑내기 스탈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이오시프 스탈린(1879~1953)은 러시아 남쪽 변방 그루지야(현재는 조지아)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루지야는 제정 러시아 땅이었기 때문에 이를테면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난 것이다. 작은 구둣방을 운영하던 아버지는 심한 술주정에 난폭하기까지 해 아내와 아들을 습관적으로 구타했다. 스탈린은 세상이 폭력으로 가득 찼다고 믿었고, 이런 심리 상태는 분노조절 장애, 복수욕으로 발전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교회 성직자로 키우려 했다. 당시 성직자는 가난한 집안에서 성공하는 지름길 중 하나였다. 스탈린은 어머니의 교육 방침에 따라 1894년 트빌리시 신학교에 입학했다. 문학과 역사에 심취하고 민족주의 시를 썼다. 당시는 제정 러시아 말기였고 체제 비판 소설은 학교에서 금서였다. 하지만 스탈린은 금서들을 읽었고 그중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은 피를 끓게 했다.
스탈린은 1899년 마지막 시험을 남겨두고 학교를 떠났다. 잠시 물리관측소 보조원으로 일을 하긴 했지만 안정적인 직업 없이 지내면서 마르크스주의자 집단에 가담했다. 당시 그를 지도한 이는 훗날 스탈린에게 처형된 레프 카메네프였다. 스탈린은 1901년 러시아 사회혁명당에 입당했다. 1903년 사회혁명당이 볼셰비키와 멘셰키비로 갈라설 때는 소수파인 볼셰비키 쪽에 가담함으로써 레닌 쪽 사람이 되었다. 레닌은 1905년 12월 핀란드에서 처음 만났다.

레닌이 “스탈린을 서기장 직에서 축출하라”하라고 유서 썼지만…
레닌이 해외에서 망명 생활(1903~1913)을 하고 있을 때 스탈린은 국내에서 볼셰비키 세력을 키워 나갔다. 이 과정에서 1917년 ‘10월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체포 8회, 유형 6회, 탈옥 6회라는 놀라운 투쟁 경력을 과시했다. 그것이 석방이든 탈출이든 너무 잦다 보니 한때는 제정 러시아 비밀경찰의 밀정이라는 의심을 샀다. 그러나 1907년 거금이 든 현금 수송 마차를 볼셰비키 조직이 강탈하는 ‘트빌리시 은행강도 사건’을 배후에서 주도해 레닌의 신임을 샀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지방의 일개 혁명가일 뿐이었다.

그러던 중 1912년 볼셰비키 당중앙위원으로 선출되고 볼셰비키 기관지 ‘프라우다’의 초대 편집장 자리를 차지하면서 비로소 중앙으로 진출했다. 그때부터 ‘강철’이라는 뜻의 스탈린을 필명으로 사용하고 프라우다에 논문과 글을 발표하는 등 이론적 기반을 다지면서 명성을 높여나갔다. 하지만 1913년 다시 체포되고 시베리아 오지에서 유배 생활을 시작하면서 존재감이 약해졌다. 이 때문에 1917년 ‘2월 혁명’으로 차르 체제가 무너져 풀려날 때까지 오지에서 지낸 4년간의 유형 생활은 정치적으로 큰 공백이었다. 1917년 3월 당중앙위원으로 복귀했으나 그를 기억하는 대의원은 별로 없었다. 10월 혁명에서도 별 활약상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나 혁명 후 강철 같은 기질로 주어진 과업을 추진하고 레닌의 신임을 받으면서 빠르게 당중앙의 한 가운데로 진입했다. 1918년 혁명에 반대하는 차르 측의 백군과 볼셰비키 적군 간에 내전이 벌어졌을 때는 식량의 강제 징발을 담당했다. 레닌은 스탈린의 충성심을 믿고 1922년 4월 3일 제11차 당대회에서 장차 권력 장악의 중요한 발판이 될 당 서기장을 맡겼다. 하지만 스탈린이 서기장을 무기로 권력을 과도하게 행사하는 것을 알고 평가를 달리했다.
레닌은 1922년 5월 25일 첫 뇌출혈을 일으켜 집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자 당 지도자들에 대한 비밀 평가를 측근에게 받아적게 했다. 이른바 ‘레닌의 유서’였다. 유서에는 “트로츠키는 유능하지만 너무 자만하다”고 되어 있고 “스탈린은 동지들을 무례하고 냉담하게 다루니 서기장 직에서 축출하라”고 쓰여 있었다. 그러나 당시 레닌의 병은 스탈린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그래도 1923년 3월 말 개최할 당대회에서 유언장을 공개하려 했으나 대회 3주 전인 3월 10일 세 번째 발작이 일어나 중단되었다. 그 무렵 여론은 포스트 레닌으로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 등을 꼽았다. 스탈린은 뒷전이었다. 따라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 등 주요 정치국원들이 가장 우려한 상대는 스탈린이 아니라 트로츠키였다. 스탈린은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3두 체제를 결성해 만일에 대비했다.

경쟁자 축출 후 스탈린의 권위에 도전할 자 아무도 없어
트로츠키는 레닌이 사망(1924년 1월 21일)했을 때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멀리 흑해 연안의 휴양도시에 있던 자신에게 스탈린이 장례일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명하고 실제로도 그런 면이 없지는 않았지만 진실이 무엇이든 사람들은 믿질 않았다. 내막을 알 리 없는 당과 인민이 트로츠키의 결례와 무관심을 질타하는 동안 스탈린은 장례를 준비하며 홀로 각광을 받았다. “레닌 동지! 우리는 당신의 지령을 훌륭히 완수할 것을 맹세합니다”라는 스탈린의 맹세 연설까지 신문에 실려 입지를 강화해주었다. 문제는 레닌의 유언장이었다. 결국 1924년 5월 제13차 당대회에서 레닌의 유언장이 공개되었고 스탈린은 비참함과 초라함을 느꼈다.

그럼에도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공동의 적 트로츠키를 의식해 스탈린을 변호했다. 스탈린 자신도 짐짓 태연한 척 레닌 숭배를 강조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했다. 스탈린은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함께 전방위적으로 트로츠키를 공격했다. 트로츠키의 반(反) 레닌주의 증거로 혁명 전 레닌의 볼셰비키당 강령에 반대했던 트로츠키의 성명을 공개했다. 레닌의 숭배가 절대적이던 시기에 반 레닌주의로 낙인찍힌다는 것은 트로츠키의 명성을 심각하게 손상하는 것이었다. 결국 트로츠키는 1925년 1월 실각했다. 스탈린은 자신의 충복들을 요직에 앉혀 권력 기반을 강화했다.
스탈린의 다음 표적은 3두 체제의 두 축인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였다. 스탈린이 공격의 빌미로 삼은 것은 ‘일국 사회주의’였다. 이는 레닌이 추구해온 ‘세계혁명론’에 반하는 일이었다. 10월 혁명 이래 레닌은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을 통해 세계 혁명을 꿈꿔 왔고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는 세계혁명론의 신봉자였다. 하지만 스탈린은 두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 세계혁명론을 부정하고 일국 사회주의를 제기했다. 결국 1925년 12월 제14차 당대회에서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론이 대의원의 지지를 받아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이듬해 권력에서 밀려났다. 두 사람은 노선 싸움에서 불리하게 되자 거세당한 트로츠키와 연대해 1927년 10월 볼셰비키 10주년 기념식에서 대대적인 반스탈린 시위를 계획했지만 곧 진압되어 1927년 11월 당중앙위에서 축출되었다.

“적을 철저히 복수한 다음 잠자리에 드는 것이 가장 큰 기쁨”
경쟁자들을 모두 쫓아낸 스탈린이 추진한 것은 급진적인 농업의 집단농장화와 공업화였다. 집단농장화를 반대해온 부하린 등 당내 우파를 공격하기 위한 또 다른 전술의 일환이었다. 1928년 11월 우익의 견해를 비난하고 공업화 드라이브의 가속화를 촉구한 당중앙위의 결정 역시 스탈린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결국 부하린 등은 현직에서 쫓겨나 공개 석상에서 자아비판을 강요당했다. 바야흐로 스탈린의 권위에 도전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스탈린은 경쟁자들을 물리친 후 편집광적인 권력욕, 그 권력욕을 충족하기 위한 무자비한 공포정치, 거짓과 속임수의 정치 조작을 일삼았다. 이런 스탈린의 개인 면모를 말해주는 일화가 있다. 1923년 여름, 한 공산당 동지가 스탈린에게 “그동안 살아오면서 가장 좋았던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완벽한 준비 후 적을 철저히 복수한 다음 잠자리에 드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다”라고 말했다는 일화다. 소련 공산당원 사이에 ‘달콤한 복수 이론’으로 알려진 이 유명한 일화는 1930년대 무수히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대학살의 암시였다.
스탈린의 집권 후 체포와 구금, 재판과 처형은 일상이었다. 비밀경찰 체카는 스탈린의 의중을 파악하고 실천한 사실상의 주구였다. 스탈린 집권 초기에는 혁명이 완전히 자리를 잡기 전이어서 주로 반혁명 분자들이 처형 대상이었다. 그러다가 1928년 11월 스탈린이 모든 반대파를 제거하고 1인 독재를 시작하면서 대상이 확대되었다.
스탈린이 먼저 표적으로 삼은 것은 기술자와 산업전문가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트로츠키주의자, 서방 세력과 연계된 반동분자들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표적 사건이 일어난 곳은 남부 러시아 돈 강 유역의 샤흐티 광산지구였다. 샤흐티 광산지구의 석탄 채굴량이 지속적으로 감소하자 이를 사보타주로 간주해 1928년 봄 비밀경찰이 53명의 엔지니어들을 체포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한 엔지니어가 고문 끝에 자신이 소련을 전복하려 한 서방의 스파이라고 자백하자 공개재판을 열어 5명을 처형했다. 앞으로 일상적으로 보게 될 스탈린식 재판의 본보기였다. 1929년 7월에는 역사가 세르게이 프라토노프 등이, 1930년 11월에는 과학기술자들이 존재하지도 않은 단체를 조직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다수 혁명동지들도 비슷한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그런 가운데 제17차 소련 공산당대회가 한창 진행 중이던 1934년 1월, 시중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대의원들이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서기장인 세르게이 키로프 주변으로 몰려들고, 키로프의 연설이 스탈린보다 더 환영을 받고있다는 소문이었다. 심지어 키로프가 스탈린의 후계자나 대항마라는 이야기까지 돌았다. 당시는 농업정책의 실패와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부작용으로 스탈린의 인기가 곤두박질칠 때였다. 스탈린은 키로프가 자신의 권력에 도전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렸으나 그렇다고 대중적 인기가 높고 당 정책도 훌륭하게 수행하는 키로프를 상대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1934년 12월 1일 키로프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스탈린은 충격을 받은 것처럼 표정을 관리하면서 공산당 내의 파시스트들과 연결되어 있는 제5열의 소행으로 규정한 뒤 암살범 체포와 재판, 그리고 처형을 신속하게 진행할 것을 지시했다. 장례식도 국가 영웅에 준하는 규모로 치러주고 직접 영구를 들어 슬퍼하는 자신의 모습이 대외에 알려지도록 했다. 비밀경찰은 암살범을 체포한 뒤 범인이 스탈린의 정적 트로츠키를 따르던 학생이라고 발표했다. 암살 2주일 후에는 과거 최고위급 인사였다가 스탈린에게 숙청당한 그리고리 지노비예프와 레프 카메네프를 체포해 키로프 암살의 ‘도덕적 공범’임을 자백받았다.
이처럼 공식적으로는 스탈린의 반대파가 키로프를 암살한 것으로 발표되었지만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믿는다”고 언급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스탈린이 잠재적인 경쟁자를 암살하고 외형상으로는 충격을 받은 것처럼 꾸며 그것을 구실로 반대파들을 숙청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스탈린의 광기는 니콜라이 예조프가 비밀경찰 책임자로 임명되면서 본격화
키로프 암살 후 대대적이고 조직적인 숙청이나 처형은 없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평온했던 18개월이 지나자 피비린내가 또다시 진동했다. 1936년 8월 키로프 암살범을 비롯해 13명이 공범이라는 이유로 처형된 것을 신호탄으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 등 주요 당 지도부 인사들이 키로프를 암살하고 스탈린의 암살을 획책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8월 25일 처형되면서 학살의 그림자가 소련 전역을 뒤덮었다.
스탈린의 광기는 머지않아 ‘피에 굶주린 난쟁이’란 별명을 얻게 될 니콜라이 예조프가 1936년 9월 비밀경찰 ‘NKVD(엔카베테·KGB 전신) 책임자로 임명되면서 본격화했다. 예조프는 먼저 자신의 전임자로 스탈린의 수족 역할을 해온 겐리흐 야고다가 키로프의 암살에 개입했다며 1937년 3월 체포했다. 뒤이어 1937년 8월 스탈린이 서명한 NKVD 비밀명령 00447호를 발동했다. 이 비밀 명령은 정치인, 쿨라크(부농), 군인, 지식인, 일반 대중에 대한 대량 학살 허가장이었다. 러시아에서는 이 날을 본격적인 대숙청의 시작으로 본다.

대숙청은 소련 정부 기관지 ‘이즈베스티야’ 편집장인 니콜라이 부하린, 전직 총리 알렉세이 리코프, 전 NKVD 위원장 겐리흐 야고다 등 13명이 처형된 1938년 3월 절정에 달했다. 이후 반혁명분자로 고발되거나 NKVD의 의심을 사면 누구든 살아남지 못했다. 훗날 비밀 해제된 구소련의 기록에 따르면 1937년에서 1938년 사이 150만 명이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절반은 총살되고 나머지는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갔는데 그 중 나중에 풀려난 사람은 2만 2000여 명에 불과했다.
대숙청을 진행하면서 스탈린은 예조프가 일을 주도하도록 하고 자신은 숙청과 아무 상관이 없는 척했다. 예조프는 스탈린의 기대대로 반대파와 그 추종자들을 거리낌 없이 체포했다. 사실 이들 대부분은 소련 공산당 창당의 주역이거나 볼셰비키 혁명사의 빛나는 별들이었다.
스탈린이 겨냥한 다음 표적은 군부였다. 소련 사회에서 비교적 독립성을 지닌 유일한 세력이던 군부는 스탈린에게 잠재적인 위협 존재였다. 결국 5명의 원수 중 3명, 군사령관 15명 중 13명, 군단장급 85명 중 62명, 사단장급 195명 중 110명이 ‘반혁명 분자’ 혹은 ‘독일의 첩자’라는 죄목으로 숙청되었다. 이 중 20~30%가 처형되고 나머지는 강제노동 수용소로 보내져 그곳에서 또 많은 수가 죽임을 당했다. 결국 장교 50%, 연대장 이상의 장성급 80%가 2년도 안 되어 사라졌다. 이때 잃은 장교의 공백을 메우지 못해 소련은 2차대전 때 고전을 면치 못했다.
스탈린은 비밀 명령 00439호도 발령했다. 독일인과 사이에 태어난 혼혈이나 독일에서 온 소련인들을 숙청하라는 비밀 명령이었다. 5만 5,000여 명이 유죄판결을 받아 이 가운데 4만 2,000여 명이 처형되었다. 폴란드인, 라트비아인, 한국인, 그리스인 등도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의 오지로 추방되고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대숙청으로 20세기 최대 살육전 펼쳐
자신의 뜻대로 공포정치에 성공한 스탈린의 다음 전략은 토사구팽이었다. 야고다를 처형한 예조프를 1938년 11월 실각시켜 라브렌티 베리야에게 NKVD 위원장 자리를 넘겨주었고 베리야는 1939년 4월 예조프를 체포해 1940년 2월 처형했다. 대숙청은 1940년 8월 레온 트로츠키가 피살되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대숙청 결과 1934년 제17차 당대회에 참석했던 139명의 중앙위원 중 110명이 처형되거나 자살 또는 의문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의원도 1,966명 중 1,108명이 체포되고 그중 반 이상이 처형되었다. 1939년 3월 제18차 당대회가 열렸을 때 참석한 2,059명의 대의원 중 5년 전 17차 대회에 참석했던 인물은 54명뿐이었다. 대숙청 후 소비에트는 만신창이가 되었고 군대는 오합지졸의 집합체가 되었다. 반면 스탈린은 역사상 어느 독재자도 누리지 못한 완벽한 독재를 누렸다. 스탈린이 무슨 이유로 이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정확한 동기나 피해자 규모도 베일에 가려져있다. 스탈린이 관련 기록을 전혀 남겨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워낙 많은 사람이 마구잡이로 희생되다 보니 통계도 정확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
냉전 시절에는 2,000만 명이 체포되어 1,800만 명이 강제수용소로 보내지고 그 중 450만~1,000만 명이 처형되었다는 주장에 힘이 실렸다. 이와 달리 최소 170만 명이 NKVD에 체포되어 이 중 144만 명이 감옥에 갇히거나 강제수용소로 보내져 72만 명이 처형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수감 상태에서 사망한 사람과 강제 노역에서 풀려난 직후 후유증으로 죽음을 맞은 사람을 포함해 사망자를 95만 명에서 120만 명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혁명이 완성되면 사멸할 계급 취급을 받았던 농민에 가해진 고통은 특히 극심했다. 결과적으로 스탈린은 농민을 적대시해 과거 농노(農奴)의 지위로 격하시켰다. 무리한 집단농장화 사업을 벌인 뒤에 대기근이 겹쳐 1932~33년 500만~7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국가의 산업화를 위해 의도적으로 농민을 희생시켰던 것이다.

스탈린의 사생활은 불운했다. 첫 부인은 첫아들을 낳은 뒤 결혼 1년 만에 결핵으로 숨지고 두 번째 부인은 부부 싸움 뒤 권총으로 자살했다. 세 자녀 모두 비운의 삶을 살았다. 첫아들은 2차대전에 참전, 포로가 되었으나 스탈린이 “항복과 포로는 반역”이라며 독일군의 포로 교환 제의를 거부하는 바람에 1943년 36세로 포로수용소에서 숨졌다. 둘째 아들은 젊은 공군 장군이었으나 알코올 중독자로 살다가 41살 때 생을 마감했다. 외동딸 스베틀라나는 미국 망명, 귀국, 영국 거주를 거쳐 마지막엔 미국에서 숨졌다.

대부분의 세계인에게 이런 스탈린은 폭정(暴政)의 상징이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러시아 국민에게도 스탈린은 공포로 기억되었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러시아인 사이에서 과거의 향수에 힘입은 긍정적인 재평가가 일어나고 있다. 2017년 ‘세계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꼽으라’는 러시아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38%가 스탈린, 34%가 푸틴이라고 답했다. 2019년 조사에서는 러시아 국민 70%가 스탈린의 역사적 공과(功過)에 대해 “공이 과보다 많다”고 응답했다. ‘스탈린에 대한 감정’을 묻는 질문에는 조사 대상자의 41%가 ‘존경’이라고 답했다. ‘공포’라고 답한 비율은 5%에 불과했다.
스탈린을 추모하는 바람이 부는 것은 유가 하락과 서방 제재로 경제난에 처한 러시아 국민이 과거 소련의 영광을 희구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스탈린을 옹호하며 국민의 반(反)서방 정서를 부추기는 데 스탈린을 소환하는 것도 스탈린 향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