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에리히 레마르크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 출간

↑ 에리히 레마르크

 

참혹한 현실을 지극히 건조한 문체로 낱낱이 고발

에리히 레마르크(1898~1970)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는 전쟁문학의 금자탑으로 불린다. 레마르크 자신이 전쟁터에서 경험한 현장성과 감각을 생생하게 살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와 함께 전쟁문학의 쌍벽을 이룬다.

레마르크는 독일 오스나브뤼크에서 태어나 사범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6년 11월 18살의 나이로 1차대전에 징집되었다. 1917년 6월 독일과 프랑스가 접전을 벌이던 서부전선에 배속되었으나 6주 만인 7월 31일 팔다리와 목에 포탄 파편을 맞는 큰 부상을 겪었다. 헤밍웨이도 1차대전에 참전했다가 포탄을 맞고 병원으로 실려 갔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경험은 유사했다. 레마르크는 1918년 10월 병원 치료를 끝내고 부대로 복귀했으나 다음 달 전쟁이 끝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전쟁이 남긴 트라우마가 좀처럼 치유되지 않았고 전쟁터에서 겪은 고통과 공포는 훗날 작품 속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레마르크는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1920년 11월 교단을 떠났다. 이후 세일즈맨, 지방지 연극평론가, 스포츠 화보잡지 기자로 활동하면서 틈틈이 소설을 썼다. 그렇게 완성된 소설이 1929년 1월 29일 출간한 첫 장편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였다.

에리히 레마르크가 참전했을 때 모습(1917년)

 

소설 속 화자인 파울 보이머는 허황된 애국심에 들뜬 담임교사의 선동에 끌려 전쟁이 뭔지도 모른 채 1916년 고교 급우들과 함께 특별지원병으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포화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물리학을 공부할 만큼 전쟁이 곧 끝나 일상으로 돌아가리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들의 기대 대로 되지 않았다. 총성이 끊이지 않고 포화가 빗발치는 속에서 전우들은 하나둘 시체가 되었다. 중대원 150명이 전투에 투입되었지만 살아 돌아온 사람은 80명 남짓이었다. 야전병원은 고통을 참지 못해 고래고래 고함지르는 부상병들로 가득했다.

보이머는 친구들이 죽어가자 그때서야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몬 기성세대의 허위의식과 전쟁의 무의미함에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이 죽지 않으려면 적을 죽여야 하는 자기방어 심리, 동료의 죽음에 대한 광기 어린 복수심, 죽음에 직면했을 때의 불안과 공포 등이 뒤섞여 결국 잔혹한 살인자로 변해갔다. 보이머가 전장에서 2년을 보냈을 때 급우들 중 살아남은 사람은 보이머 자신뿐이었다. 하지만 보이머도 종전을 바로 앞둔 1918년 10월 어느 날 유탄을 맞고 전사하고 만다. 그날은 모든 전선이 극히 평온하고 조용해 전선사령부는 본국 정부에 판에 박힌 전문을 보냈다. ‘서부전선 이상 없음’

레마르크는 전쟁으로 인한 참혹한 현실을 낱낱이 고발하면서도 격정적인 문장이 아니라 지극히 건조한 문체로 전쟁의 무의미와 공허를 담담하게 고발했다. 전쟁의 부당함을 보여주면서도 이를 정치나 국제 관계 측면에서 묘사하지 않았다. 젊은 병사들이 국가를 욕하는 장면이 나오긴 하지만, 그보다는 전쟁으로 인해 젊은이들의 마음이 얼마나 피폐해졌는지 그 상황을 집중적으로 보여주었다. 그가 소설을 쓸 때 사용한 기법은 자기 주장이나 감정 표현을 억제하고 사실 자체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신즉물주의적 기법이었다. ‘서부전선…’은 출간 후 1년 만에 독일에서만 50만 부가 넘게 팔리고 2년도 되지 않아 25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350만 부 이상이 팔려 나갔다. 무명의 레마르크도 일약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올랐다.

레마르크 소설 ‘서부전선 이상없다’ 초판본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와 함께 전쟁 문학의 쌍벽

‘서부전선…’은 러시아 태생의 영화감독 루이스 마일스톤에 의해 영화로도 제작되어 1930년 4월 21일 미국에서 개봉되었다. 독일에서는 8개월 후인 1930년 12월 5일 개봉되었다. ‘서부전선…’은 레마르크 자신의 참전 경험을 소재로 삼아 전쟁 자체를 혐오할 뿐 어느 편이 옳다거나 그르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권력자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일어난 전쟁의 참상, 이 때문에 보통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사실적으로 그려 반독일적이거나 반나치적인 색채도 없었다. 그런데도 ‘서부전선…’은 나치의 박해를 받았다.

첫 박해는 영화가 개봉된 날 일어났다. 2층 발코니석에 앉아 있던 한 남자의 신호를 시작으로 갈색 셔츠 젊은이들이 영화관 곳곳에서 난동을 부린 것이다. 신호를 보낸 자는 나치의 선전 책임자 요제프 괴벨스였다. 그들이 영화관에 풀어놓은 생쥐들 때문에 결국 영화는 중단되었다. 12월 11일에는 베를린시 영화심의위원회가 상영 금지 처분을 내려 영화를 본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이런 소란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1931년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에 선정되었다.

‘서부전선 이상없다’ 포스터

 

레마르크는 1931년 4월 ‘서부전선…’의 속편 격인 ‘귀로’를 발표했다. 종전 후 고향으로 돌아온 귀환병들의 실의와 좌절을 그린 ‘귀로’ 역시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히틀러의 나치당이 점차 세력을 확대하자 1932년 스위스로 망명해 2차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프랑스와 스페인 등지를 전전했다. 결국 후속작인 ‘세 전우’는 1936년 12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출판했다. 나치당은 1933년 5월 10일 레마르크의 소설을 비롯, 통치에 방해가 되는 모든 서적을 불에 태웠다. 1938년 7월에는 레마르크의 국적마저 박탈했다.

레마르크는 2차대전이 임박한 1939년 3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가 미국에 체류하고 있던 1943년 12월 레마르크의 여동생 엘프리데 숄츠가 독일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참수형을 당했다. 레마르크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오스나브뤼크시는 1968년 ‘엘프리데 숄츠 거리’를 조성, 이 비극적 죽음을 추모했다. 레마르크는 이후에도 여러 소설을 발표했다.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1941), ‘개선문’(1945) ‘사랑할 때와 죽을 때’(1954), ‘하늘은 아무도 특별히 사랑하지 않는다’(1961) 등을 출간했는데 작품마다 명작으로 인정받았다. 이 중에서도 ‘개선문’은 200만 부나 판매되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레마르크의 소설이 전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것은 동시대인들에게 가장 절실하고도 고통스러운 체험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명쾌한 문체로 다뤘기 때문이다. 레마르크의 대표작들은 대부분 영화로 제작되었다. 레마르크는 1958년 2월 할리우드 출신 여배우 파울레트 고더드와 세 번째 결혼했다. 고더드는 찰리 채플린의 세 번째 아내로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 ‘독재자’ 등에 출연한 유명 배우였다. 그의 고향인 오스나브뤼크시는 1970년 9월 25일 스위스 로카르노에서 사망한 그를 기려 1991년 6월 ‘에리히 레마르크 평화상’을 제정했다. 뉴욕타임스와 타임지는 20세기 말 ‘서부전선…’를 20세기 최고의 책 100선으로 선정하는 것으로 레마르크의 업적을 기렸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