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청와대 본관
by 김지지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대통령 집무실을 현재의 청와대에서 용산 국방부 청사로 옮기겠다고 2022년 3월 20일 발표했다. 이에 따라 5월 10일 918년만에 청와대가 시민 품으로 돌아왔다. 대통령 집무실을 청와대가 아닌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는 구상은 윤석열 당선인이 처음은 아니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서 근무하려 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세종시로 집무실을 옮기려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대선 공약으로 발표한 뒤 취임 후 이전을 검토했으나 경호와 보안 등의 문제로 포기했다. 그러나 윤석열 당선인은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이 비밀의 정원 빗장을 열어젖혔다. 청와대가 역사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는지 그 과정을 살펴본다. 2022년 6월 9일 방문했을 때 첫 느낌은 현대판 궁궐같아 보인다는 점이다.
■청와대 의미
청와대는 좁은 의미로는 푸른 기와(靑瓦)의 본관 건물을 지칭한다. 그러나 청와대가 갖고 있는 의미는 복합적이다. 먼저 떠오르는 게 대통령의 집무와 생활 공간이다. 여기에 대통령을 보좌하는 비서실의 행정공간과 단체 손님을 맞는 만남의 공간도 청와대 범주에 속한다. 그러다보니 대통령의 국정수행 전반을 수행하고 보좌하는 공간으로 확대되어 사용되고 있다. 미국에서 대통령 관저와 집무실, 그리고 대통령을 보좌하는 행정기구를 통틀어 ‘백악관’이라고 칭하는 것과 같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서울 종로구 청와대로1에 속한다.

■청와대 터 역사
▲고려
청와대 자리에 왕실 건물이 들어선 것은 고려 중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고려에는 수도 개경(개성)과 서경(평양)이 있었는데 고려 문종이 1067년 지금의 서울인 양주를 ‘남경’으로 새롭게 정하고, 다음해 이궁(별궁)을 지은 것이 그 시작이다. ‘고려사’에는 ‘남경에 신궁(新宮)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때의 신궁 위치가 어디였는지는 알 수 없다. 남경은 몇 년 뒤 폐지되었다.
고려 15대 왕 숙종은 수도를 남경으로 천도할 생각이었다. 숙종은 1101년(숙종 6년)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하고 그해 10월 궁궐 공사를 시작해 1104년(숙종 9년) 5월에 이궁(별궁)을 완성했다. ‘고려사’는 숙종이 대신과 내관을 거느리고 이곳을 찾아 10여 일 머물렀다고 기록했다. 당시 궁궐 장소는 북악산 바로 아래 즉 지금의 청와대 부근으로 추측된다. 근거는 1394년(태조 3년) 천도를 위해 한양을 답사한 권중화 등이 올린 상소에 “고려 숙종 시대에 경영했던 궁궐 옛터가 너무 좁다. 그 남쪽을 궁궐터로 정했다”는 태조실록(1394년 9월 9일)이다. 비록 조선시대의 기록이지만 숙종 때의 남경 궁궐이 경복궁보다 더 북쪽 즉 지금의 청와대 자리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숙종은 당초 계획과 달리 남경으로 천도하지 않았다. 당시 도참서인 ‘도선기’에 ‘개경(개성), 서경(평양), 남경(서울)에서 4개월씩 머물러야 나라가 흥한다’고 적힌 것을 근거로 번갈아 거주하는 곳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남경 천도 계획은 흐지부지 끝났다. 게다가 1128년(인종 6년) 남경 궁궐에 화재가 발생해 궁궐 기능이 사실상 소멸되었다. 그로부터 다시 150여년이 지난 고려 우왕(1374~1388) 대에 천문과 역술을 관장하던 서운관에서 남경 천도를 주장했다. 우왕은 남경 궁궐에 머물면서 천도를 추진했으나 결국에는 5개월만에 다시 개경으로 환도해 천도는 사실상 유야무야되었다.

▲조선
조선 태조 이성계는 1394년 도읍을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고 경복궁을 창건했다. 당초 경복궁은 남경 궁궐터에 지으려고 했으나 터가 협소해 궁궐 터 남쪽에 자리를 잡았다. 남경 궁궐터는 1426년(세종 8년) 경복궁 ‘후원(後苑)’으로 조성되었다. 세종은 1433(세종15년) 경복궁과 후원을 연결하기 위한 신무문을 경복궁 북쪽에 새로 냈다. 이후 후원은 역대 왕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연무장·과거장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592년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함께 불에 타 사실상 빈터로 방치되었다.
다만 회맹단(會盟壇) 활동은 이곳에서 계속 유지되었다. 회맹단은 임금이 신하들로부터 충성 맹세를 받았던 제단이었다. 회맹제는 조선 초기 태종 때 시작해 18세기 영조 때까지 꾸준히 열렸다. 1417년(태종 17년)에는 개국공신과 그 적장자가 모두 모여 대규모 회맹을 했다. 하지만 회맹단 일대는 임진왜란 이후 궁궐도 없고 민가도 없어 황량했다. 18세기 정선의 그림에 텅 빈 일대 풍경이 잘 나타난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후 270여년이 지난 1867년(고종 4년)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으로 완전히 새로워졌다. 대원군은 신무문 북쪽 후원을 ‘북원(北苑)’이라 이름 짓고 창덕궁 춘당대를 모방해 경무대(景武臺)를 조성했다. 춘당대는 왕이 참석한 가운데 문무 관원을 채용하는 과거 시험 장소로 너른 마당을 앞에 두고 있다. 경무대 관련 첫 기록은 1869년 ‘왕이 경무대(景武臺)에 나아가 경과 정시(慶科廷試)를 행하였다. 문과에서 도석훈 등 15인과 무과에서 원세욱 등을 뽑았다.’(고종실록 6년 3월 20일)이다. 1892년(고종 29년) 경에 그린 ‘수선전도’에도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 지역에 ‘경무대’라는 지명이 한글로 표기되어 있다.
고종 대에 명칭을 ‘북원(北苑)’으로 정하고 경무대(景武臺)를 조성
경무대가 과거 시험 장소로 기능하려면 행사를 주관하는 건물이 필요하다. 그래서 건축한 건물이 융문당과 융무당이다. 두 건물은 1868년 9월부터 이듬해 7월 사이에 지금의 녹지원 일원에 지어졌다. 융문당은 과거 시험 중 문과를, 융무당은 무과 시험을 주관했던 건물이다. 과거 시험 말고도 융문당에서는 왕과 문관들이 모여 글을 지으며 연회를 열고, 융무당 앞 너른 공터에서는 군사훈련이나 활쏘기 시합을 했다. 따라서 경무대는 융문당·융무당과 그 앞 너른 마당까지 아우른 명칭이다. 고종은 융문당·융무당이 완공된 1869년 2월부터 1894년 2월까지 25년 동안 경무대를 자주 찾았다. ‘고종실록’에 218건, 고종 시기 ‘승정원일기’에 1095건이나 나올 정도였다.

그러면 ‘경무’란 무슨 뜻일까. ‘경복궁(景福宮)’의 ‘경(景)’과 경복궁 북문 ‘신무문(神武門)’의 ‘무(武)’에서 한 글자씩 딴 것이란 설, 융문당의 북문인 ‘경무문’에서 비롯되었다는 설 등이 있지만 기록이 없어 확실하지는 않다. ‘후원’에는 두 건물을 포함해 총 32동의 부속 전각이 있었다. 중일각, 오운각, 경농재, 춘안당, 침류각, 옥련정 등이 대표적인데 이 건물들은 경복궁 중건 당시의 배치도인 ‘북궐도형’과 ‘북궐후원도형’에도 표시되어 있다. 1907년 작성한 ‘궁궐지’에도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다.
‘후원’은 크게 세 권역으로 나뉜다. 융문당과 융무당을 중심으로 하는 과거시험과 군사훈련을 위한 권역(현재의 비서동과 녹지원 일대), 임금의 휴식 공간인 오운각을 중심으로 하는 완상과 휴식을 취하는 권역(현재의 관저 일대), 경농재를 중심으로 하는 친경(親耕)과 관련된 권역(현재의 본관 진입로와 영빈관 일대)이다. 친경이란 왕이 농사를 직접 체험하는 일 또는 그를 실행하는 논밭을 뜻하므로 경농재는 농막 역할을 했던 건물인 셈이다. 궁궐을 경비하고 임금을 호위하는 금위군의 수궁(守宮) 건물도 있었고, 경치가 수려한 별도 정원도 있었다. 그러나 경무대는 1896년 아관파천으로 고종이 경복궁을 떠나 경운궁으로 옮기면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인적이 드문 빈터로 바뀌었다.
▲일제 강점기
경복궁과 후원은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1912년 조선총독부 소유가 되었다.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1926년 조선총독부 완공, 1929년 조선박람회를 거치면서 경복궁과 후원 건물의 90% 이상이 철거되었다. 융문당·융무당 건물은 1928년 8월 철거된 후 서울 용산구의 일본 절인 용광사에 팔려 나가 본전과 객전의 재목으로 쓰여졌다. 1942년에는 중일전쟁에서 전사한 일본군의 유골을 이곳에 보관하기도 했다. 광복 이후 원불교에서 두 건물을 인수한 뒤 2006년 용산 재개발사업으로 또 다시 해체되어 전남 영광의 원불교 시설로 옮겨졌다.

사실상 빈터가 된 경무대 자리에 현대식 건물이 들어선 것은 일제 말이다.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이 1939년 8월 이곳에 총독관사를 지어 생활하고 2명의 후임 총독도 해방 때까지 살았다. 이때 건물 지붕은 증산교 계통 종교인 보천교 본당에서 청기와를 가져와 씌웠다. 건물 면적은 본관 525평(지하1층, 지상2층), 지하벙커(97평), 토굴로 된 뒷방(15평), 경호원 숙소 52평(지하1층, 지상2층), 창고 62평(지상2층짜리)로 구성되었다.
일제가 여기에 총독관사를 지은 것은 조선 왕권의 상징인 경복궁을 가로막아 그 앞에 총독부 청사를 짓고 그 뒤편에는 총독관사를 지음으로써 조선왕실의 기를 누르고 이 나라를 영원히 지배하고자 함이었다. 높은 곳에서 보면 총독관사 건물은 ‘大자’ 모양을, 총독부 청사 건물은 ‘日자’ 모양을, 서울시청 건물은 ‘本자’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 세 글자를 이으면 ‘大日本’이다.
▲대한민국
해방 후 존 하지 미 군정사령관의 숙소로 사용되던 총독관저가 우리 손에 넘어온 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하면서 고종 때 명칭인 ‘경무대’를 다시 사용했다. 그렇게 경무대 이름으로 12년간 유지되던 관저 이름이 바뀐 것은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후 대통령에 취임한 윤보선 대통령 때였다. 윤보선은 경무대가 자유당 정권 때 원성의 대상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이름을 바꾸려 했다.
그러자 당시 서울시사 편찬위원이던 김영상이 대통령에게 ‘화령대’와 ‘청와대’의 두 가지 안을 제시했다. ‘화령’(함남 영흥의 옛 이름으로 태조 이성계의 고향)은 태조가 조선이라는 이름을 짓기 전에 ‘조선’과 함께 고민했던 국가명 후보였다. ‘청와대’는 관저의 기와가 평화를 상징하는 푸른 빛깔이라는 데서 착안했다. 윤보선 대통령은 두 안 중 ‘청와대’를 선택해 1960년 12월 30일 경무대 이름을 청와대로 바꾸었다. 청와대는 윤보선 대통령이 물러난 1962년 3월 이후 한동안 비어있다가 1963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대통령 집무실 겸 숙소로 사용되었다.
참고로 ‘조선’ 국호가 어떤 과정을 거쳐 정해졌는지는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라 이름을 뭐로 정할지 명나라가 정해줄 것을 요구한 문서가 태조실록 태조 1년(1392년 음력 11월 29일) 에 실려있다. 현대 문투로 옮기면 이렇다. <예문관 학사 한상질을 명나라 남경에 보내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중 어느 것을 국호로 삼을지를 여쭈었다. 명에 올린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예전에 우리 사신이 ‘우리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나라를 새로 세웠음’을 아뢰자) 명 황제께서 우리 사신에게 ‘너희 나라 이름을 고려에서 뭐로 바꿀 것인가를 정해 빨리 보고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소신이 제 마음대로 나라 이름을 정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두 개를 올리오니, 황제께서 은총을 내리셔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한반도에서 오래전에도 사용했던 ‘조선’으로 하라고 명에서 정하자 조선왕조 태조실록 2년(1393년 음력 2월 15일) 기록에 따르면 태조는 감격해 황제의 궁궐을 향하여 은혜에 감사하는 예식을 올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10월까지 15년 10개월을 청와대 본관에서 살았다. 그 사이 청와대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먼저 청와대 본관 자리에 있던 비서실을 1969년과 1972년 청와대 앞길이 보이는 현재 위치로 옮겨 이전·증축했다. 대형 연회나 국빈만찬행사가 열리는 영빈관도 1978년 지었다. 재임 중 청와대 본관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운 관저와 집무실을 짓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박 대통령이 “불필요하게 국고를 낭비할 수 없다”고 반대해 무산되었다. 1980년대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도 철거 논의가 있었으나 ‘대통령 단임’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 야기 등을 이유로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건물이 낡아 더 이상 미룰 순 없었다.
노태우 대통령 재임 때, 새 관저(1990년 10월)와 새 본관(1991년 9월)이 완공되어 노 대통령이 새 건물로 이사간 뒤에는 경호원 숙소나 창고 등으로 사용되다가 김영삼 대통령 재임 때인 1993년 11월 완전 철거되어 54년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철거한 자리에는 옛 청와대 남쪽 현관 지붕 꼭대기 절병통을 남겨 위치를 표시해뒀다. 그동안 청와대 구관을 집무실 겸 숙소로 사용한 대통령과 기간은 다음과 같다. 이승만 대통령은 11년 8개월(1948.8~1960.4), 윤보선 대통령은 1년 7개월(1960.8~1962.3), 박정희 대통령은 15년 10개월(1963.12~1979.10), 최규하 대통령은 5개월(1980.3~8), 전두환 대통령은 7년 6개월(1980.8~1988.2), 노태우 대통령은 2년 8개월(1988.2~1990.10)이다.

■청와대 내 건축물
청와대 안에는 현대식 건물과 전통 건물이 혼재되어 있다. 현대식 건물로는 대통령 집무실인 본관, 가족들이 생활하는 관저, 공식행사를 개최하는 영빈관, 비서들이 근무하는 여민관, 외빈 접견실인 상춘재, 기자실인 춘추관 등이 있다. 전통 건물로는 오운정과 침류각이 있으며 유물로는 신도비와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본관과 관저
현 청와대 본관은 지하1층, 지상2층 건물이다. 1989년 7월 착공해 1991년 9월에 완공되었다. 전통한옥 양식 건물로는 국내 최대 규모(2564평)다. 지붕은 각각 28m와 18m로 팔작지붕 형태인데 15만장의 청기와로 덮었다. 기와들은 일반 도자기를 굽듯이 한 개 한 개 구워 100년 이상을 견딜 수 있는 강도를 지녔다고 한다. 대통령과 가족이 생활하는 관저 역시 1990년 10월 전통 한옥 양식으로 지어졌다. 생활 공간인 본채와 접견 행사 공간인 별채로 구분된다.

▲영빈관과 상춘재
영빈관은 대규모 만찬, 연회, 회의 등을 하거나 외국의 국빈들을 맞이하는 장소다. 박정희 대통령 재임 때인 1978년 11월 석조건물로 지어져 현재 청와대 경내의 현대식 건물 중 가장 오래되었다. 프랑스 루이14세 때의 건축양식과 한식을 절충했다.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로 건평은 1700평이다.

상춘재는 외빈 접견 등에 사용되는 한옥 건축물이다. 일제 강점기 때는 조선총독 관저의 별관으로 지어져 ‘매화실’로 불리다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상춘실’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후 박정희 대통령이 1977년 12월 건물을 철거하고 1978년 3월 그 자리에 목조건물(22평)을 새로 지어 상춘재로 불렸다. 하지만 규모가 작아 불편하자 전두환 대통령 재임 때인 1983년 4월 전통 한옥양식(116평)으로 다시 지어져 청와대 최초의 전통 한옥이 되었다. 상춘재 헌액은 김충현의 글씨다.

▲여민관과 춘추관
여민관은 대통령 비서실의 사무 공간이다. 콘크리트 건물의 3개 동인데 여민관 1관은 2004년, 2관은 1969년, 3관은 1972년에 지어졌다. 노무현 대통령 때인 2004년 기존 청와대 비서동 옆에 있던 온실을 증개축해 세 번째 비서동을 만들면서 비서실 건물 전체 이름을 여민관(與民館)으로 지었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이 국민을 위한다는 뜻으로 ‘위민관(爲民館)’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이 다시 ‘여민관’으로 되돌려놓았다.
춘추관은 각 언론사 기자들이 출입하는 프레스센터.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기자회견장도 이곳이다. 1990년 9월 완공되었다. 맞배지붕에 기와를 얹은 외형은 우리나라 최고 조형미를 지녔다는 예산 수덕사 대웅전을 본땄다.

▲녹지원과 수궁터
녹지원은 대통령 관저 앞 잔디밭으로 어린이날, 어버이날 등 각종 행사가 이곳에서 열린다.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식수를 하는 곳도 녹지원이다. 수령이 170년이 넘은 반송을 비롯해 120여종의 나무가 있어 청와대 경내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평판을 듣고 있다. ‘수궁(守宮)터’는 1993년 11월 철거된 구 본관 터다. 옛날 청와대 안에 경복궁을 지키던 수궁들이 있었던 것에서 착안해 이름이 지어졌다. 현재 ‘수궁터’에는 ‘청와대 구 본관 터’라는 표식과 함께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를 본뜬 비석이 세워져 있다.

▲문화재 : 석조여래좌상, 오운정, 침류각, 신도비
대통령 관저 뒤편에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경주 남산 삼릉계에 있던 석불상을 옮겨온 것이다. 1912년 데라우치 총독이 경주에서 당시 총독관사인 왜성대(통감부 건물)로 옮겨왔다가 1939년 총독관사를 신축하면서 이곳으로 다시 옮겨온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인 8~9세기경 조성되었는데도 상태가 양호하고 사각형 연화대좌(蓮華大座)를 갖춘 보기 드문 석불이어서 2018년 국가지정문화재(보물 1977호)로 지정되었다. 석굴암 본존불을 계승한 통일신라 전성기 불상으로 ‘미남불’로도 불린다.

청와대 안에는 서울시 문화재도 있다. 오운정, 침류각, 신도비가 그것이다. 오운정(五雲亭)은 휴식을 위해 지은 정자로, 자연 풍광이 신선 세계와 같다고 하여 ‘오색구름’을 뜻하는 ‘오운(五雲)’으로 이름이 지어졌다.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히 알려주는 기록은 없으나, 고종 4년(1867년) 경복궁을 다시 지은 이후의 모습을 그린 ‘북궐도형’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 이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현재 오운정이 지어진 시기는 이승만 대통령 재임 때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기록은 없다. 원래는 지금의 대통령 관저 자리에 있다가 1989년 대통령 관저를 신축할 때 관저 북쪽으로 옮겨졌다.

침류각(枕流閣)은 청와대 안에 남아있는 유일한 누각이다. 관저에서 상춘재로 내려오는 길목에 있다. 침류는 ‘흐르는 물을 베개 삼는다’는 뜻으로 자연과 어우러진 삶을 뜻한다. 인터넷상에는 1900년대 초에 건립되었다는 글이 많지만 정확히 말하면 연대를 알 수 없다. 1867년(고종 4년)에 그린 ‘북궐도형’에 없고 1920년대 한옥 건축 양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이 시기의 건물로 추정된다. 1989년 관저를 신축할 때 현재 자리로 옮겨왔다.

청와대 안에는 조선조 양반의 신도비(神道碑)가 3기나 있다. 신도비는 왕이나 고관의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을 기리는 비석이다. 3인은 조선 선조 대 한성부판윤과 우의정을 역임한 강사상, 현종 대 병조판서를 지낸 이경직, 세종의 손자로 효행과 청렴 담백한 인물로 명성이 높았던 이인이다.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 각자와 청와대 밖 칠궁(七宮)
옛 경무대 뒷산 절벽에는 거대한 바위(가로 2.5m, 세로 1.3m)에 해서체로 큼지막하게 새겨진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 각자가 있다. 바위 끝 낙관 자리에는 ‘延陵 吳据(연릉 오거)’라고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1990년 2월 이 여섯 글자가 청와대 신축공사 과정에서 발견되었을 때 언론들이 일제히 ‘청와대에서 표석 발견’ 기사를 쏟아냈다. 기사는 대개 ‘청와대 본관 동북쪽 가파른 암벽에 있는 탓에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라고 끝났다.
그러다가 명당과 길지에 대한 호기심과 흥분이 가라앉은 1990년 10월, 처음 이 글자를 감정했던 금석학 대가 임창순이 8개월 동안 연구 결과를 내놨다. 첫째, 이 여섯 글자는 12세기 남송 시대 명필 연릉 오거의 필체다. 지금도 중국 강소성 진강변 북고산 관광지에 있는 감로사라는 절에 오거가 쓴 ‘天下第一江山(천하제일강산)’ 여섯 글자가 커다랗게 붙어 있다. 임창순은 “오거의 글씨를 탁본으로 구해와 ‘福地’라는 글자를 집자(集字)해 새겼다”고 고증했다.
둘째, 글자를 새긴 연대는 빨라야 구한말인 1850년대 전후다. 임창순은 “화강암에 음각한 획의 풍화 정도가 깨끗하다고 할 만큼 매우 낮다”며 “화강암의 석질이 본래 비바람에 약한 점을 고려할 때 각자 연대는 빨라야 1850년 전후”라고 확인했다. 이를 통해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탄 궁궐을 1860년대 흥선대원군이 중건하던 즈음에 누군가가 새긴 글자로 추정되고 있다.

청와대 안은 아니지만 가까운 곁에는 조선 시대 일곱 왕들을 낳은 후궁 7인의 신주를 봉안한 사당(사적 149호)도 있다. 이른바 ‘칠궁(七宮)’인데 희빈장씨의 대장궁, 숙빈최씨의 육상궁,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이씨의 선희궁, 순조의 어머니 수빈박씨를 모신 경우궁, 영친왕의 생모인 엄씨의 덕안궁 등이다. 원래는 영조가 생모 숙빈최씨 1인만을 모시기 위해 마련한 사묘였으나 1908년(융희 2년)부터 다른 6인의 신주도 이곳에서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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