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갈색 폭격기’ 조 루이스(미국)와 백인 복서 맥스 슈멜링(독일)의 재대결

↑ 막스 슈멜링(왼쪽)과 조 루이스 배로

 

12년 동안 세계 헤비급 사상 최장수 챔피언으로 군림

1936년, 흑인 복서 조 루이스 배로(1914~1981)는 천하무적이었다. 1934년 데뷔 이래 27전승(23KO승)을 구가하는 그의 앞을 가로막을 자는 아무도 없어 보였다. 목표는 당연히 세계권투협회(WBA)의 세계헤비급 챔피언이었다. 그에 앞서 전 세계헤비급 챔피언인 독일 복서 맥스 슈멜링(1905~2005)과 루이스의 논타이틀전이 성사된 것은 1936년 6월 19일이었다.

루이스보다 9살이 더 많은 슈멜링은 1924년 데뷔 이래 유럽 권투계를 평정하고 1930년 미국의 잭 샤키를 쓰러뜨려 세계 헤비급 챔피언 자리에 오른 독일의 영웅이었다. 1932년 잭 샤키와의 재대결에서 패해 비록 챔피언 벨트를 빼앗기긴 했지만 슈멜링은 여전히 히틀러가 총애하는 독일인의 우상이었다. 논타이틀전은 뉴욕 양키스 스타디움에서 이뤄졌다. 4만 2000여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벌어진 경기에서 루이스는 4라운드에 한 차례 다운되더니 결국 12라운드에서 KO패로 무릎을 꿇었다.

루이스는 절치부심 끝에 1937년 6월 22일 제임스 브래덕을 8회 KO승으로 물리치고 그토록 바라던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올랐다. 그러나 크게 기뻐하지 않았다. 1년 전 연전연승하던 자신에게 통한의 1패를 안긴 슈멜링을 쓰러뜨리지 않고서는 진정한 챔피언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수차례의 타이틀 방어전에 성공한 루이스가 슈멜링의 도전을 받아들여 뉴욕 양키스 스타디움에서 재격돌한 것은 1938년 6월 22일이었다.

 

나치 vs 미국, 흑인 vs 백인의 대결

2차대전의 전운이 감돌고 있을 때여서 그들의 대결은 단순한 복싱시합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치 대 미국의 자존심 경쟁이었고 선과 악의 싸움이었으며 백인과 흑인의 인종 대결이었다. 히틀러는 경기 당일 가급적 많은 독일인이 라디오 중계를 듣도록 유도하기 위해 극장의 모든 문을 닫으라고 지시했다. 슈멜링에게는 “미국 검둥이를 때려눕혀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만방에 알리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미국인들은 심각한 인종차별 속에서도 한마음으로 루이스를 응원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경기 며칠 전 루이스를 백악관으로 초청해 “당신의 두 팔에 미국이 달려 있다”고 격려했다. 슈멜링은 대단히 신사적이고 스포츠맨십을 중시하는 복서였으나 미국인들의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한낱 나치의 꼭두각시일 뿐이었다. 경기는 전 세계 복싱팬들의 관심을 반영해 영어, 독일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4개 언어로 생중계되었다. 경기 전 과정은 이처럼 호들갑스러웠으나 결과는 예상외로 싱거웠다. 7만 5000여 명의 절대적인 응원 속에서 루이스가 1회 2분 4초 만에 슈멜링을 링 바닥에 고꾸라뜨렸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환호하고 열광했다. 1908년 전설적인 흑인 복서 잭 존슨이 캐나다 출신의 백인 복서 토미 번스를 물리치고 흑인 최초의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올랐을 때와는 정반대 분위기였다. 30년 전 존슨이 승리했을 때는 전 미국이 경악과 허탈감에 빠졌다. 1936년 제시 오언스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 4개를 따내며 히틀러의 코를 납작하게 했을 때도 루이스처럼 환영을 받지는 못했다.

이런 환호성이 있기까지에는 루이스의 태도도 크게 작용했다. 루이스는 백인의 비위를 건드렸던 잭 존슨을 반면교사로 삼아 최대한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잭 존슨의 악몽에 몸서리치던 미국 백인 사회는 30년 만에 나타난 전혀 다른 흑인 챔피언 조 루이스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인종차별이 뿌리 깊은 남부에서도 “착한 검둥이”라며 받아들였다.

 

루이스 말년은 불운… 슈멜링은 사업가로 성공

1939년 2차대전 때는 루이스와 슈멜링 모두 총을 들었다. 슈멜링은 독일의 낙하산병으로 참전하고 루이스는 챔피언 타이틀을 보유한 채 군에 입대해 시범 경기를 벌이며 미군들의 사기를 북돋워주었다. 루이스는 제대 후에도 연전연승을 달렸다. 지금까지 깨지지 않는 25차례의 방어전을 11년 8개월 동안 성공해 ‘갈색 폭격기’로 불리며 세계헤비급 사상 최장수 챔피언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더 이상 적수가 나타나지 않자 1949년 3월 1일 스스로 챔피언 벨트를 반납하고 물러났다. 그 후 재기를 시도하며 두 차례 경기에 나섰으나 두 번 모두 실패하자 세인의 관심 밖으로 멀어졌다. 1951년 로키 마르시아노에게 패배할 때까지 그가 남긴 기록은 71전 68승(54KO승) 3패였다.

화려했던 선수 시절과 달리 말년은 불운했다. 은퇴 후 재산 관리 실패로 인한 빚을 갚기 위해 레슬링을 하고 라스베이거스 도박장에서 도어맨까지 하다가 마약중독자가 되었다. 반면 슈멜링은 인도주의를 몸소 실천하고 사업가로 성공했다. 나치의 거듭된 종용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매니저와 결별하지 않았으며 1938년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때는 위험을 무릅쓰고 유대인 어린이 2명을 자신의 집에 숨겨주었다.

슈멜링은 1948년 43세의 나이로 은퇴할 때까지 70전 56승(40KO승) 4무 10패의 프로 전적을 기록했다. 전적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그는 세계헤비급 챔피언에 오른 최초의 유럽 출신이자 지금까지 유일무이한 독일 출신으로 기록되고 있다. 은퇴 후 사업가로 성공한 슈멜링은 알코올 중독과 마약 복용으로 불우한 시절을 보내던 루이스를 도와주기도 했다. 1987년 독일 스포츠 담당 기자 등의 투표에서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독일의 운동선수”로 선정된 것에서 알 수 있듯 그는 독일인들의 무한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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