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일본계 미국인 격리 수용을 목적으로 제정한 美 ‘행정명령 제9066호’ 발동과 일본계 ‘니세이 부대’ 창설

↑ 1942년 4월 임시수용소인 산타 아니타 조립센터에 도착한 일본계 미국인들(1942.4.5)

 

by 김지지

 

2022년 2월 19일은 최악의 미·일 관계를 상징하는 미 ‘행정명령 9066호’가 발동한 날로부터 80년이 되는 날이다. 바이든 미 대통령은 “80년 전 루스벨트 대통령이 서명한 행정명령 9066호는 일본계 후손들의 민권을 박탈하고, 당시 미 정부가 취한 조치들은 미국 역사의 가장 부끄러운 장(章)의 하나”라고 사과했다.

 

■행정명령 제9066호(Executive Order 9066)

 

▲행정명령 발동
골자는 미국의 교전 상대국인 일본계 미국인의 강제 수용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이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하고 개전 초 미국에 불리한 전황이 속속 알려지면서 미국인 사이에 일본에 대한 적대감과 공포감이 폭발했다. 그러던 차에 ‘니하우 섬 사건’까지 터져 미국인의 적대감이 더욱 증폭되었다. 니하우 섬 사건은 진주만 공습에 나섰던 일본 해군 항공대 전투기가 공습 당일 하와이 북쪽의 니하우 섬에 불시착하면서 불거졌다. 니하우 섬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 2세들이 일본인 조종사를 보호하는 과정에서 하와이 원주민 1명이 총상을 입고 조종사와 일본주민 1명이 사망했다. 조종사는 몸싸움 중에 살해되었고, 조종사를 도와 준 일본주민은 자살했다. 이 사실이 니하우 섬 밖 세상에 알려진 것은 1주일이 지난 뒤였다.

하와이 니하우 섬에 불시착한 일본의 제로전투기

 

미국인들은 일본에 대한 분노를 다양하게 표출했다. ‘MADE IN JAPAN’ 제품은 버리거나 부수고 일본을 상징하는 벚꽃나무는 베어냈다. 일본계 미국인은 직장에서 쫓겨나고 일본계 집이나 상점엔 돌이 날아들었다. 무엇보다 미국인을 불안하게 한 것은 미군에 소속된 일본계 미국인이었다. 결국 ‘하와이 지역방위군’에 소속된 일본계 미국인은 군에서 쫓겨났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계 미국인을 격리수용하라는 여론이 높아졌다.

결국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2년 2월 19일 행정명령 제9066호에 서명했다. 대통령이 임명한 전쟁장관과 전쟁장관이 임명하는 군사령관에게 군사지역 지정과 군사지역의 출입, 체류, 이주 등 모든 권한을 일임한다는 행정명령의 골자는 미국의 교전 상대국인 일본계, 독일계, 이탈리아계 미국인을 격리 수용소에 강제 수용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누가보아도 주 타깃은 일본계 미국인이었다. 한 달 후 미 의회가 공법 503호를 통과시켜 행정명령에 불복종할 경우 최대 5000달러의 벌금과 1년간의 감옥 수감으로 처벌할 수 있게 했다.

캘리포니아주 거주 모든 일본계에 대한 명령문이 벽에 부착되어 있다.

 

독일계·이탈리아계도 강제수용 대상이나 제외해

행정명령 9066호 발동에 따라 주로 미국 서부 해안지역에 살고 있는 약 12만 2000명의 일본인들이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와이오밍, 콜로라도, 아이다호, 유타, 아칸소 등에 건설된 격리 수용소 등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재산도 몰수되었다. 이 가운데 약 8만명은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는 일본인 2세(にせい·니세이)이거나 3세(さんせい·산세이)였다. 나머지 일본인들도 미국에서 오랫동안 거주한 사람들이었다. 다만 조선은 일본에 합병된 상태이고 미국도 일본의 조선 지배 자체는 인정했으나, 조선인을 일본인과는 다른 집단으로 간주해 조선인과 조선계 미국인은 강제 수용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독일계와 이탈리아계 이주민들은 지문과 사진을 등록하긴 했지만 일본계처럼 격리 수용되지는 않았다. 이유는 독일계의 경우  인구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주요 지도자 중에도 독일계가 많았다.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은 마피아 비율이 높아 이탈리아계를 강제수용하면 마피아들과 한바탕 싸워야 하는 현실을 감안했다. 무엇보다 독일계·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은 천황에 충성하는 일본계와 달리 히틀러·무솔리니 정권에 대한 충성심이 약했다. 물론 독일계·이탈리아계라도 위험 인물로 분류될 경우에는 수용소에 보내거나 추방 조치했다. 일부 유대인도 독일에서 왔다는 이유로 억류되었는데 이는 미국 정부가 ‘유대인’이라는 용어를 민족 개념이 아니라 종교적 의미로 정의했기 때문에 유대 민족과 독일 민족을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와이오밍주 하트 산 수용소. 행정명령에 의해 서해안 배제 구역에서 퇴거된 일본계 미국인 억류에 사용된 10개의 강제 수용소 중 하나였다.

 

강제수용소이긴 해도 경찰·소방서·학교·언론사 등도 자체적으로 운영

일본계 미국인들은 박람회장, 경마장, 가축 축사 등에 임시로 수용되었다가 수용소가 세워지면서 그곳으로 이송되었다. 강제 수용소는 무장 병력이 지키고 울타리엔 철조망이 쳐졌다. 탈출 시도를 하다가 사살당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미 정부는 수용자들에게 “천황에게 충성하는가” “미군 복무 의사가 있는가” 등의 질문을 했을 때 모두 “아니오”라고 대답한 8500여 명은 ‘불순분자’로 분류해 캘리포니아주의 별도 수용 시설에 재격리하기도 했다.

수용소마다 수용자가 1만명 이상이나 되어 사실상 작은 도시였다. 자급자족이 원칙이어서 경찰·소방서·학교·언론사 등도 자체적으로 운영했다. 자유로운 영내 활동도 어느 정도 보장했다. 일본계들은 빈약한 시설 속에서도 미국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순응하며 살았다. 자급자족용 식료품과 생필품 말고도 군이 요구하는 전시물자 생산에도 적극 협력했다. 이 경우 미 정부는 임금을 지급했다.

다만 하와이에 살고 있는 일본계만은 재난을 모면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하와이에 일본인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1940년의 미국 인구조사 통계에 따르면, 당시 하와이 제도의 인구는 42만3000명이었는데 그중 15만8000명이 일본계였다. 그중에서도 12만명은 하와이에서 태어난 일본인 2세와 3세였다. 따라서 이들을 미국 본토로 이주시키는 것도 간단치 않았지만 인구의 37%를 억류할 경우 하와이 경제는 물론 사회 자체가 붕괴될 우려도 있었다. 그렇다고 하와이 거주 일본인들이 의심의 시선이나 차별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어서 수천명 정도는 강제 수용되었다.

미군이 일본계 미국인들의 임시수용소인 산타 아니타 조립센터를 감시하고 있다.

 

▲행정명령 폐지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강제수용소의 통제와 감시에 대해 헌법상 기본권 침해라는 비판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위헌 소송도 제기되었다. 소송이 전국적인 관심을 모으면서 반정부 여론이 커지자 미 정부는 대법원이 위헌 판결을 내릴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 1944년 12월 일본계 퇴거·수용 조치를 담은 행정명령 9066호의 중단을 선언함으로써 일본계 미국인들은 풀려났다. 일본계는 종전 후 몰수된 재산을 되찾으려 했으나 실패해 미국에서 닦아놓은 기반을 거의 잃어버렸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행정명령 9066호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것은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재임할 때인 1976년 2월 19일이다. 이후 지미 카터 대통령이 1980년 전시 재배치 및 민간인 구금 규명 위원회(CWRIC)의 창립을 위한 입법안에 서명하고 CWRIC가 1982년 12월 연구 결과를 책자로 발표했다. 보고서는 일본계 미국인의 억류는 군사적 필요성으로 정당화되지 않고 감금 결정도 “인종적 편견, 전쟁 히스테리, 정치적 리더십의 실패에 기반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그러면서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와 생존자들에게 2만달러의 보상을 지급하는 등의 법적인 구제를 권장했다.

그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1988년 8월 10일 시민자유법의 입법을 위한 결의안에 서명하고 조지 부시 대통령이 1989년 11월 21일, 보상금 예산안을 책정했다. 이에 따라 미 정부는 1990년부터 모든 생존자들에게 개별적으로 사과와 보상을 실시했다. 미국에서는 다시는 이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행정명령 9066호가 서명되고 폐지된 2월 19일을 ‘기억의 날’로 정해 매년 기념하고 있다.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행정명령 9066’의 종료를 확인하는 ‘선언 4417(Proclamation 4417)’에 서명하고 있다.(1976.2.19)

 

■니세이 부대(일본계 2세 부대)

 

▲일본계들로만 구성된 100보병대대와 442연대전투단 창설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6월 12일, 미국은 병력을 보강하기 위해 하와이 주방위군 출신 일본계에다, 미국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스스로 군대에 지원한 강제수용소 출신 일본계를 합쳐 1400여명으로 구성된 100보병대대를 공식적으로 창설했다. 장교들은 백인과 일본계가 섞여 있지만, 사병들은 대부분 하와이 출신 일본계 2세로 구성된 독특한 부대였다. 그래서 일본어로 2세를 뜻하는 ‘니세이 부대’로 불렸다. 100대대는 통상적인 미군 편성과는 달리 소속 연대도 사단도 없는 독립부대여서 흔히 ‘고아 부대’로 불리기도 했다.

훈련 중인 100보병대대

 

100대대 장교 중에는 6개월 뒤 배속된 한국인 김영옥(1919~2005)도 있었다. 김영옥은 미국 LA에서 이민자 2세로 태어나 1939년 2차대전이 발발했을 때 군에 입대하려 했으나 아시아계 유색인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그러나 미국도 점차 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연방의회가 아시아계도 징집 대상에 포함시키는 법을 제정함에 따라 1941년 1월 육군 사병으로 입대했다. 그해 12월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장교가 부족해지자 보병장교 후보생으로 지원해 선발되었다. 1942년 11월 조지아주 포트베닝의 보병장교학교에 입교했을 때 동기생 가운데 유색인은 김영옥 혼자였다.

100대대는 1943년 4월까지 위스콘신주(맥코이 캠프), 미시시피주(셸비 캠프), 루이지애나 등지를 돌아다니며 군사훈련을 했다. 김영옥은 장교 교육을 마치고 1943년 1월 미시시피주 셸비 캠프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100대대에 배속되었다. 당시 대대 전체를 통털어 한국계라곤 김영옥과 하와이대 ROTC 출신인 또 한 명이 있었으나 이 한 명은 나중에 첫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부대를 떠나게 되면서 100대대에 한국계는 김영옥 단 한 사람만 남게 되었다.

미군은 100대대가 자리를 잡자 일본계 2세들로만 구성된 대규모 전투부대(442연대전투단)를 1943년 3월 또다시 신설했다. 미 본토 전역에서 지원한 약 1만명의 일본인 2세들 가운데 3000여명이 선발되어 미시시피주 셸비 캠프에서 훈련을 받았다. 100대대는 1943년 7월 대대기(旗)를 받고 부대 모토 ‘Remember Pearl Harbor(진주만을 기억하라)’를 제정한 후 1943년 9월 초 북아프리카 알제리의 오랑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34사단 133연대 제2대대에 배속되어 그해 9월 말부터 이탈리아 전투에 참가했다.

프랑스 전선에 투입된 442연대전투단(1944년)

 

▲김영옥의 활약
“김영옥과 함께 있으면 죽음도 피해간다”는 믿음 퍼져

김영옥은 100대대에서 한국계라는 이유로 한동안 일본계 사병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으나 용감하게 전투를 벌여 곧 부대원들의 신뢰를 얻었다. 1943년 11월에는 이탈리아 전투에서 허벅지에 총탄이 박히는 부상을 입었다. 이때 첫 번째 ‘퍼플 하트’를 받아 이후 계속될 훈장 행진을 시작했다. ‘퍼플 하트’는 전투 중 경상이든 중상이든 피를 흘린 군인에게 무조건 1개씩 병원장이 직권으로 주는 훈장이다. 전투 후 일본인 사병들은 김영옥을 ‘사무라이 김’으로 불렀다.

100대대 대원들은 혈통만 일본계이지 미국에서 태어나 자라고 생활기반이 미국이어서 미국에서 배척받으면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미국에 충성심이 있다는 걸 전투에서 증명하려고 용감하게 싸웠다. 그러다보니 피해가 컸다. 2차대전 중 가장 치열한 전투의 하나로 기록된 이탈리아 몬테카시노 전투(1944년 1~2월)에서는 전체 병력의 60%에 달하는 인명손실을 입었다. 약 1400명의 부대원 중 사상자가 900명 이상이나 되었다. 너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해 100대대는 ‘퍼플 하트 대대’라는 별명을 얻었다.

김영옥이 얼마나 용감하게 싸웠는지 몬테카시노 전투에서 살아남은 100대대원들 사이에는 “김영옥과 함께 있으면 죽음도 피해간다”는 믿음이 퍼져 나갔다. 김영옥은 1944년 2월 미국에서 세 번째 높은 무공훈장인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100대대는 제442연대가 1944년 4월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되자 그해 6월 442연대 산하 1대대로 소속이 바뀌었다. 부대 명칭을 442연대 1대대로 바꾸어야 했지만 그동안 100대대가 쌓은 공적과 희생을 감안해 100대대라는 고유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도록 했다. 100대대가 442연대 소속이 되어도 김영옥은 연대 전체를 통털어 유일한 한국계였다.

김영옥 대위(왼쪽)가 미국 전쟁성 장관, 이탈리아 주둔 미군 사령관과 함께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1944년)

 

김영옥 ‘미국을 대표하는 전쟁 영웅 16명’으로 선정

김영옥은 1944년 5월 16일 일본계 사병 1명만 데리고 심야에 적진에 침투해 2명의 독일군을 생포해 끌고 왔다. 연합군은 그가 잡아온 포로에게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5월 23일 ‘버펄로 작전’이라는 총공격을 개시해 6월 4일 로마를 점령했다. 로마 입성 후 마크 클라크 사령관은 김영옥에게 미국에서 두 번째 높은 특별무공훈장을 수여하면서 즉석에서 자기 부관의 계급장을 떼 김영옥에게 대위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김영옥이 이끄는 부대는 로마 해방 3개월 후 벌어진 피사 해방전에서도 성공을 거뒀다.

김영옥이 인솔하는 부대는 1944년 10월 프랑스 동북부 보주산맥의 작은 마을 브뤼에르와 비퐁텐 지역에 투입되었다. 보주산맥을 넘으면 스트라스부르를 거쳐 곧바로 독일이었기 때문에 독일 역시 이 방어선을 지키는 데 사력을 다했다. 김영옥은 기관총탄 세 발을 맞는 큰 부상을 겪으며 그 지역을 해방한 주역으로 활약했다. 442연대는 프랑스 동북부 보주산맥의 브뤼에르·비퐁텐 지역을 탈환할 때도 용감하게 싸웠으나 여전히 피해가 컸다. 그러다보니 2943명의 442연대 장병들에게 수여된 퍼플하트 기장이 9486개에 달했다.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받은 훈장도 4500개가 넘었다.

김영옥은 한국전쟁에도 참전한 후 1972년 대령으로 예편했다. 2011년에는 미국의 유명 포털사이트 ‘msn.com’에 의해 미국을 대표하는 전쟁 영웅 16명으로 선정되었다. 미국 독립전쟁의 영웅 조지 워싱턴, 남북전쟁 당시 북군 총사령관 율리시스 그랜트, 2차대전 승리의 주역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 더글러스 맥아더 등 그야말로 영웅 일색인 16명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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