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새하얀 눈길에 첫발 찍는 재미로 살았다”는 이어령의 88년 삶… 마를 줄 모르는 창조의 샘물이었고 동서고금을 두루 관통한 시대의 지성이었다

↑ 이어령(출처 문학사상사)

 

by 김지지

 

이어령(1934~2022)은 한국의 대표 석학이자 우리 시대 최고 지성으로 불렸던 르네상스형 인간이었다. “새하얀 눈길에 첫발 찍는 재미로 살았다”던 그가 2022년 2월 26일 향년 88세로 영면했다. 그의 자장(磁場) 범위는 우리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보통 사람이라면 한두 가지만으로도 버거워할 문학·문화평론가, 대학교수, 논설위원, 문예지 발행인, 작가, 사상가, 저술가 등 온갖 역할을 무리 없이 수행하며 그 분야 최고 자리를 지켰다. 서울올림픽(1988년) 총괄기획을 맡고 문화부장관(1989~1991)으로 활동하며 우리의 문화정책이 가야할 바를 제시한 등대 같은 존재였다. 동서고금을 두루 관통하며 남긴 저작이 160여 종에 이른다.

 

▲초년의 삶

이어령은 충남 아산의 비교적 풍족한 집안에서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부모는 여동생과 5살 터울의 이어령을 사실상 막내아들처럼 여겨 이어령이 떼를 써도, 말썽을 부려도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뒀다. 그 덕에 자유분방하고 재기발랄하게 자랐다. 훗날 이어령 자신이 말했듯 그의 인생은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고가는 삶이었다. 모든 사람이 당연하게 여겨도 스스로 납득이 안 되면 하나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질문의 역사는 서당에서 시작된다. 꼬마 이어령은 서당 출입 첫날부터 천자문 첫 네 글자에 의문을 품었다. 꼬마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하늘 천(天), 땅 지(地), 검을 현(玄), 누를 황(黃) 이 네 글자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하늘이 검나요? 제가 보기엔 하늘이 파란데요?”라는 꼬마의 질문에 훈장은 할 말을 잃고 그 길로 꼬마를 서당에서 쫓아냈다. 이어령 스스로 표현한 이 ‘서당의 반란’은 그의 질문 역사의 시작이자 천재의 탄생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이어령은 충남 부여고를 거쳐 1952년 서울대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생 신분으로 경북 문경고에서 국어와 영어를 가르치고 1955년 800여쪽에 달하는 ‘종합국문연구’라는 제목의 대학입시 국어참고서를 국문학과 동기인 안병희와 공저로 펴내 학비에 보탰다. 지도교수였던 이숭녕 박사에게 감수를 받아 낸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한 비평가는 고등학교 시절 이 책에 수록된 서정주 시의 해석을 읽고 문학평론에 뜻을 세우게 되었다고 했다.

 

▲시인 이상의 진면목 조명

청년 이어령은 시인 이상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때까지 이상은 별 조명을 받지 못했다. 그저 난해한 작가, 이상한 행동을 하고 이상한 글을 쓰는 작가 정도로만 치부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어령이 대학 4학년 때인 1955년 서울대 교내 학술지 문리대학보에 발표한 ‘이상론-순수의식의 뇌옥(牢獄)과 그 파벽(破壁)’ 제목의 평론은 이상을 다시 보게  했다. 문리대학보는 이어령이 대학교 3학년 때인 1954년 문리대 학예부장을 맡아 창간한 학술지다.

시인 이상의 진면목을 제대로 조명한 ‘이상론(李箱論)’은 정식 평론가가 아닌 대학생의 글이었지만 문단에 널리 알려졌다. 딱딱한 논문 투가 아니라 시적인 문체로 쓴 ‘이상론’은 접근하기 어려웠던 이상이라는 벽의 높이를 낮춰 문단과 학계에 큰 화제가 되었고 더불어 이어령의 이름도 문단에 널리 알려졌다. 이어령은 1970년대 문학사상 주간 시절, 이상이 다닌 경성고등공업학교 출신의 지인을 찾아가 졸업앨범에서 더벅버리 이상의 사진을 찾아냈다. 묻혀 있던 이상의 작품 상당수도 발굴해 문학사상에 실었다. 당시 이상은 일본어로 써 놓고 정식으로 발표하지 않은 작품이 많았다. 훗날 이어령은 이상에 대해 “동시대적 감각으로 나에게 감동을 준 최초의 작가”라고 표현했다.

 

#이어령 #이상 #우상의파괴 #흙속에저바람속에 #문학사상 #축소지향의일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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