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즈’ 출판 100주년… 미증유의 대담한 실험으로 세계 문학사의 주요 페이지 장식

↑제임스 조이스 (1926년)

 

by 김지지

 

그의 문학이 세계 문학사에 길이 빛나는 이유는 미증유의 대담한 실험 때문

제임스 조이스(1882~1941)는 “셰익스피어 이후 가장 뛰어난 작가”, “세계 모더니즘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인물”이라는 최고 찬사를 듣는 20세기의 대표적인 소설가다. 그의 소설은 더블린 사람들의 내밀한 삶을 구체적으로 묘사해 이른바 ‘더블린 3부작’으로 불리는 ‘더블린 사람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율리시즈’ 3편과 ‘피네간의 경야’를 포함해 모두 4편뿐이다. 그런데도 그의 이름이 세계 문학사에 길이 빛나는 것은 소설에서 보여준 미증유의 대담한 실험 때문이다. 그의 오늘을 있게 한 ‘율리시즈’의 출판 100주년을 맞아 조이스가 어떤 인물이고 ‘율리시즈’가 어떤 소설인지를 알아본다.

‘율리시즈’ 초판본(1922년 2월 2일 파리에서 출판)

 

조이스가 소설에서 구현한 대담한 실험은 자유간접담론 기법, 틈(생략)의 기법, 현현(顯現·epiphany) 기법, 열린 결말, 의식의 흐름 기법 등이다. 그의 문학이 난해하다는 말을 듣는 것은 이 전대미문의 서사 전략 때문이다. ‘자유간접담론 기법’은 작가 입장에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관점과 수준에서 서술하는 기법이다. 등장인물의 지적 수준에 따라 문체를 달리하기 때문에 같은 스토리라도 문체가 일정하지 않다. ‘틈(생략)의 기법’에서 틈은 문맥상 있어야 할 곳에 무언가가 빠져 있거나 비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텍스트상의 이런 공백은 독자의 관심을 끌어 독자가 그것을 채우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현현 기법’에서 ‘현현’은 동방박사들이 예수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경배하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찾아갔을 때 아기 예수가 그들에게 처음으로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낸 데서 유래한다. 독자에게 소설 속 인물의 사소한 말투나 행위를 통해 요긴한 의미를 별안간 깨닫게 하거나 소설 속 인물이 무심코 지나쳐버린 의미를 결정적인 순간에 돌발적으로 깨우치게 하는 기법이다. ‘열린 결말’은 의미가 명쾌하게 잡히지 않도록 결론을 흐리멍덩하게 끝내 텍스트를 끝까지 읽어도 다 읽었다는 느낌은커녕 읽다만 느낌을 주는 기법이다.

조이스 문학은 이런 실험적인 기법 덕분에 각종 문학비평 이론의 기름진 터전 역할을 했다. 특히 1970~1980년대에 맹위를 떨친 프랑스의 해체주의 이론가들은 하나같이 조이스 학자들이었다. 해체주의 이론의 대표자 격인 자크 데리다는 “조이스가 없었다면 나의 해체주의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실토했다.

아일랜드 더블린에 있는 제임스 조이스 동상과 흉상

 

그가 꿈꾼 것은 유럽 대륙을 무대로 새로운 문학을 개척하는 코스모폴리탄

조이스는 아일랜드의 더블린 근교에서 태어났다. 예수회 소속 학교에서 고교 과정을 마치고 1898년 예수회 계통의 로열대(현재의 더블린 유니버시티 칼리지)에 입학했다. 그가 대학에 재학 중일 때 아일랜드에는 민족주의 운동의 성격을 띤 문예부흥 운동이 한창이었다. 하지만 조이스는 과거만 되돌아보는 이 복고적인 운동이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생각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가 꿈꾼 것은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 등 외국어를 폭넓게 공부한 뒤 유럽 대륙을 무대로 새로운 문학을 개척하는 코스모폴리탄이었다.

조이스는 1902년 10월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건너갔으나 학비 마련도 문제거니와 적성에도 맞지 않아 의사의 꿈을 접고 1903년 4월 귀국했다. 1904년 1월 자서전적인 에세이 ‘예술가의 초상’을 잡지사에 기고했으나 거절당하자 제목을 ‘스티븐 히어로’로 고쳐 잡고 리라이팅에 착수했다. ‘스티븐 히어로’는 10년 후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란 제목의 단행본 소설로 출간되었다.

1904년 6월 10일 곧 그의 아내가 될 노라 바너클을 길거리에서 만나고 6월 16일 첫 데이트를 했는데 6월 16일은 훗날 소설 ‘율리시즈’에서 전개되는 하루로 등장한다. 조이스는 1904년 10월 노라와 함께 영국의 런던. 스위스의 취리히, 오스트리아의 트리에스테(지금은 이탈리아령)를 전전하면서 영어를 가르치는 걸로 생계를 꾸렸다. 1905년 12월부터 1906년 7월까지 단편소설집 ‘더블린 사람들’의 원고를 런던의 출판사에 보냈으나 또다시 출판되지 못했다.

제임스 조이스(1904년)

 

1914년은 조이스에게 각별한 해였다. 2월 2일부터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 런던의 ‘에고이스트’지에 연재되고, 3월 ‘율리시즈’ 집필을 시작했으며 6월 15일 ‘더블린 사람들’이 8년 만에 단행본으로 런던에서 출판되었기 때문이다. ‘더블린 사람들’은 15편의 단편을 모은 소설집으로 더블린 중산층의 삶을 통해 더블린 전역에 퍼져 있는 정신적·문화적·사회적 병폐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더블린 사람들이 감추고 싶어하는 내밀한 치부까지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이 때문에 연재 내내 연재 중단과 소송 위협을 받았다. 나라를 빼앗겼는데도 빼앗긴 줄도 모르고 사는 더블린 사람들에게 거울을 들이밀고 싶었던 조이스와, 자신의 치부를 들킨 것 같아 화끈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고 싶었던 더블린 사람들 간의 불협화음이 결국 조이스에게 협박을 가하고 삭제·중단 요구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율리시즈’ 출판되자 찬사와 비난 교차

‘율리시즈’는 미국의 전위 잡지 ‘리틀 리뷰’지 1918년 3월호부터 연재되었다. 연재 중 일부 잡지가 미국 우정국에 압수되어 소각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1920년 9월 20일에는 뉴욕의 사회정화협회가 소설이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리틀 리뷰’지를 고발해 결국 1920년 12월호를 마지막으로 23회 만에 연재가 중단되었다. 그러자 조이스는 소설의 뒷부분을 모두 완성해 자신의 40번째 생일인 1922년 2월 2일 파리에서 출판했다.

‘율리시즈’가 처음 연재된 미국의 ‘리틀 리뷰’지 1918년 3월호.

 

예상대로 찬사와 비난이 교차했다. 시인 T.S. 엘리엇은 “현대에서 찾아낸 가장 의미심장한 표현 기법”이라고 격찬하고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신의 저주를 받을 정도로 놀라운 책”이라고 상찬했다. 반면 작가 버나드 쇼는 “문명의 추악한 측면에 대한 구역질 나는 기록”이라며 비난하고 올더스 헉슬리는 “지식의 잡동사니”라고 혹평했다. 이후에도 한동안 “영어로 쓰인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소설”이라는 찬사와 함께 “현대 소설 중 가장 심오하고 혁신적이며 난잡한 소설”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미국에서는 반입이 금지된 가운데 1933년 ‘율리시즈’를 둘러싸고 중요한 재판이 열렸다. 1933년 봄, 파리에서 뉴욕의 랜덤하우스출판사로 우송된 ‘율리시즈’ 원고를 뉴욕 세관이 “외설스럽다”며 압수한 것이 발단이었다. 재판은 검열 제도를 지지하는 측과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측과의 격렬한 논쟁 속에서 진행되었다. 결론은 1933년 12월 6일 “외설 혐의가 없다”는 판결이었다. 판결에 따라 ‘율리시즈’는 1934년 1월 25일 뉴욕의 랜덤하우스에서 미국 최초로 출판되었다. 그동안 판금에 묶여 있던 다른 소설가의 문학작품도 같은 해 출판됨으로써 스스로 책을 선택해 읽을 수 있는 개인의 권리가 폭넓게 인정되었다. 영국에서는 1936년 출판이 허용되었다.

‘율리시즈’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가 모델이다. 조이스는 오디세우스(영어명 율리시즈)의 19년 방랑을 아일랜드의 더블린을 걷는 주인공의 하루로 압축·묘사했다. 1904년 6월 16일(목요일) 아침 8시부터 이튿날 새벽 2시까지 더블린의 도시적 일상을 담고 있는 ‘율리시즈’에는 여러 상징과 신화, 내면 의식의 세계가 다양하게 펼쳐진다. 단 하루 동안의 모든 일상사가 이른바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유대계 광고 세일즈맨인 레오폴드 블룸과 그의 처 몰리, 또 다른 주인공 스티븐 디딜러스의 머릿속을 쫓아다닌다.

스위스 취리히에서 아내 노라 바너클과 망중한을 보내고 있는 제임스 조이스

 

매년 6월 16일, 세계의 조이스 문학 팬들은 더블린으로 달려가

‘의식의 흐름’ 기법은 단순히 등장인물의 생각이나 행동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들의 가장 깊숙한 내면의 감정 속으로 파고들어가 독자들에게 자신이 블룸이나 스티븐이나 몰리가 된 듯한 느낌을 주려는 의도에서 고안해 낸 혁신적인 표현 기법이다. 조이스는 ‘율리시즈’의 마지막 부분을 모두 몰리에게 할애하고 잠든 남편 옆에 누워 있는 몰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념을 거침없이 묘사했다. 이 부분에 대해 영국 소설가 이넉 베넷은 “나는 이것을 능가할 만한 글을 결코 본 적이 없을뿐더러 이에 비견할 만한 글도 읽어보지 못했다”고 격찬했다.

‘율리시즈’는 지금까지도 조이스 전문가들에 의해 원문 표현들이 바뀌어 출판되는 수난을 겪고 있다. 프랑스에서 초판본이 인쇄될 때 인쇄소 직원들이 영어를 몰랐던 탓에 다수의 오식이 생긴 탓도 있지만 ‘율리시즈’에서 시도된 수많은 언어 실험과 정교한 상징성, 그리고 복잡한 기교가 다양한 해석과 논쟁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프랑스 초판본 출판 때 녹내장으로 고통받고 있던 조이스는 직접 초판본의 교정을 보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율리시즈’ 초판본은 저자의 의도에 맞게 출판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현재 영미 문학계에서 가장 정본에 가깝다고 평가받고 있는 1984년 가블러판(조이스 전문가 한스 가블러 교수의 이름)에서는 초판본의 5,000개 단어가 교정되었다. 하지만 가블러판도 8,000개의 틀린 단어가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최근에는 단어만이 아니라 문장 자체를 바꿔 출판하는 경우도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매년 6월 16일이 되면 세계의 조이스 문학 팬들은 더블린으로 달려간다. 주인공의 이름을 딴 ‘블룸즈데이’ 문학축제가 열리기 때문이다. 파리, 취리히, 트리에스테 등 조이스가 거주했던 도시들에서도 조이스 축제가 열리는 등 ‘조이스 산업’은 ‘율리시즈’를 다양한 형식으로 소비하고 있다. ‘율리시즈’ 출간 후 조이스는 1923년부터 ‘피네간의 경야’에 쏟아부었다. ‘피네간의 경야’는 에밀 졸라 부부가 창간한 실험잡지 ‘트랑지시옹’에 1927년 4월부터 1938년 5월까지 17회 연재되고 1939년 5월 뉴욕과 런던에서 동시에 출판되었다. 독자들에게는 여전히 외면당하고 평단에서도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조이스는 2차대전으로 파리가 함락된 1940년 가족과 함께 스위스로 이사했다가 1941년 1월 13일 숨을 거뒀다.

스위스 취리히의 플룬테른 구역의 공동묘지에 있는 제임스 조이스의 묘지와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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