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일본에서 암약한 소련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 일본에서 피체… “역사상 가장 가공할 첩보원” 칭송받은 ‘세기의 스파이’

↑ 리하르트 조르게

 

1941년 가을로 접어들자 리하르트 조르게(1895~1944)의 불안감이 더욱 가중되었다. 지난 수년 동안 그에게 고급 정보를 제공해온 핵심 요원들이 일본의 정보기관에 속속 검거되었기 때문이다. 조르게는 하루라도 빨리 일본을 빠져나가야 했지만 지난 수년 동안 정을 나눈 무희(이시이 하나코)를 생각하며 망설였다. 결국 조르게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인사도 못한 채 도쿄를 떠나서는 안 된다며 그를 채근하는 가슴이 머리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조르게는 1941년 10월 18일 밤 무희가 일하는 긴자의 술집(라인 골드)에서 얼마간 시간을 보낸 뒤 그녀와 함께 그녀의 집으로 갔다. 머릿속에는 이튿날이면 자신은 일본에서 탈출할 것이고 그 후에는 중국을 거쳐 소련 땅에 무사히 귀환해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차 있었다. 하지만 조르게는 몇 시간 전 결정적인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무희를 만나기 전 그는 조직원으로부터 일본의 정보기관 요원들이 가까이 접근했으니 빨리 도피해야 한다는 내용의 쪽지를 건네받고도 무희로 인한 심란한 마음에 쪽지를 태워 버리지 않고 그냥 찢어서 바닥에 버리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쪽지 조각들은 조르게를 쫓는 정보 요원 손에 들어갔고, 결국 조르게는 그날 밤 무희의 품에 있다가 체포되었다.

 

정보 분석 정확하고 뛰어나

조르게는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태어났다. 증조부는 마르크스·엥겔스의 동지답게 미국으로 건너가 사회주의의 뿌리를 내린 인물이고, 아버지는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인으로 성장하다가 러시아령 아제르바이잔(제정 러시아의 캅카스 지역) 바쿠로 이주해 유전기술자로 활동하던 중 러시아 여성을 만나 조르게를 낳았다. 부모는 3살의 조르게를 데리고 독일로 돌아갔다. 조르게는 1차대전 때 독일군으로 참전해 동부전선에서 세 번이나 부상할 정도로 조국에 헌신했다. 그러나 전쟁에서 얻은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야전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고 그 무렵 일어난 러시아혁명(1917)을 목도하면서 공산주의 이론을 지지하고 그 현실의 일부가 될 것을 결의했다.

1918년 1월 제대해 킬대에 입학하고 그해 11월에 일어난 킬 군항의 수병 반란을 계기로 독일 혁명의 소용돌이에 몸을 던졌다. 1919년 10월에는 독일 공산당에 입당하고 1924년에는 소련으로 가 소련군 첩보조직에서 스파이 훈련을 받았다. 1925년에는 소련 시민권을 획득했다. 소련군 총참모부 정보국(GRU)은 그의 잠재력에 주목했다. 그것은 준수한 외모, 친화력, 공산주의 이론, 외국어(러시아·프랑스어·영어) 능력이다.

조르게는 1930년 1월 독일 신문의 상해 특파원으로 가장해 장개석 정부와 일본의 정치·군사적 동향을 파악해 소련에 보고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애그니스 스메들리의 소개로 당시 아사히신문 특파원으로 상해에 파견된 일본의 공산주의자 오자키 호쓰미도 만나 친교를 맺었다. 스메들리는 미국에서 태어나 독일 신문의 특파원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중국 혁명 현장을 보도하던 언론인이었다.

당시 조르게가 중국에서 소련으로 보낸 정보 중에는 독일이 일본과 동맹관계를 맺으려 한다는 놀라운 내용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소련으로서는 동서 양쪽에 독일과 일본이라는 적대국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소련은 더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중국에서 임무를 마치고 1933년 1월 모스크바로 귀환한 조르게를 일본에 파견했다.

 

그가 보낸 정보 가운데 최고는 독일의 소련 침공

조르게는 1933년 9월 일본 주재 특파원 자격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첩보망을 구축했다. 조직의 핵심 멤버는 상해에서 만난 아사히 신문의 오자키 호쓰미 외에 크로아티아 출신의 아바스통신 사진기자, 독일인 무선 기술자, 오키나와 출신의 일본계 미국인 등이었다. 조르게는 독일의 열렬한 나치주의자로 자신의 경력을 세탁했기 때문에 주일본 독일 대사와도 친분을 쌓았다. 그의 요원들도 일본의 저명한 정치가들과 접촉해 일본의 대외정책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다. 특히 오자키 호쓰미는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의 정책보좌관이 되어 일본 정부의 기밀문서를 빼내 조르게에게 건네주었다.

조르게는 일본에서 정보를 수집해 모스크바로 전송하는 임무뿐만 아니라 정보 분석 업무도 병행했다. 혁명에 대한 열정, 뛰어난 지성으로 무장한 조르게의 정보는 전쟁의 흐름을 바꿔놓을 만큼 파괴력도 컸지만 무엇보다 분석이 정확하고 뛰어났다. 그가 보낸 정보 가운데 최고는 독일의 소련 침공이었다. 그는 독일이 1941년 6월 20일(실제로는 기상 악화로 48시간 연기) 소련을 침공할 것이라는 정보를 20일 전인 5월 30일 소련에 타전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그의 특급 경고를 무시했다. 결국 소련은 독일의 전격 침공을 막지 못해 무참하게 짓밟혔다.

조르게는 그래도 전쟁의 향배를 바꿔놓을 결정적인 정보를 계속 소련에 타전했다. 1941년 9월 14일에는 일본이 독일과 연합해 소련을 협공한다는 계획을 취소하고 미국을 상대로 한 태평양전쟁 준비에 들어간다는 기밀을 빼내 보고했다. 소련은 1941년 10월 초 독일 군대가 모스크바 코앞까지 접근해 왔을 때 조르게의 보고를 믿고 전쟁의 흐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대모험을 감행했다. 일본군을 방어하기 위해 동쪽에서 비상대기 중이던 대규모 부대를 서쪽 유럽으로 전격 이동시켜 모스크바 근교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독일군을 덮친 것이다. 소련은 조르게 덕분에 독일에 최초의 패배를 안겨주는 전과를 거두었다. 세계사의 흐름도 바뀌었다.

 

“그보다 위대한 인간은 만나보지 못했다”

일본의 정보기관은 ‘세기의 스파이’를 체포해 놓고도 한동안 조르게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당시 일본인들이 알고 있는 것이라곤 일본에서 꽤 오랫동안 암약해온 거대 첩보조직을 그물에 가뒀다는 정도였다. 일본인들은 조르게의 국적이 독일이기 때문에 당연히 독일의 첩보기관인 ‘압베르’를 위해 활동했으려니 생각했으나 일본의 우방국인 독일에서는 이런 사실을 완강히 부인했다. 조르게 역시 온갖 고문에도 불구하고 소련과의 연관을 부정하고 소련도 조르게가 자국의 요원임을 부정했다. 그러다가 1942년 6월까지 검거된 30여 명의 조직원과 조르게를 취조한 결과 뜻밖의 결과를 알게 되었다. 조르게가 독일의 적국인 소련을 위해 활동한 스파이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련은 그를 외면했다. “조르게와 소련은 관계없다”며 1943년 일본의 포로 교환 제안도 일축했다. 조르게는 소련 혁명기념일인 1944년 11월 7일 오자키와 함께 사형에 처해졌다. 시신은 무희가 수습해 도쿄의 한 묘원에 묻었다.

조르게 사후 찬사가 이어졌다. 소설가·학자·영화감독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100여 편 소설의 소재로도 등장했다. ‘007’의 저자 이언 플레밍은 “역사상 가장 가공할 첩보원”이라고 치켜세우고, 조르게를 기소한 일본인 검사는 “그보다 위대한 인간은 만나보지 못했다”고 찬탄했다. 맥아더 사령관은 “가장 빛나는 첩보원”이라고 칭송하고 일본의 옛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는 “나는 조르게 팬이다. 그의 글을 읽으면 일본 정세를 알 수 있다. 이런 기막힌 두뇌가 있을까.”라고 놀라워했다. 소련은 1964년 조르게에게 소비에트연방 영웅칭호를 수여하며 조르게가 자국의 요원임을 뒤늦게 인정했다. 모스크바 작은 공원에는 전신 조각상도 세워주었다. 소련은 그의 도쿄 무덤도 챙기고 있다. 주일 러시아대사관은 2차대전 승전일(5월 9일)에 조르게를 참배한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