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관보(1952.1.18)에 고시된 ‘인접해양에 대한 주권에 관한 대통령선언’과 지도(오른쪽)
by 김지지
일본 어민 수시로 우리 영해 침범하고 조업 일삼아
1952년 새해가 되자 일본 어민들은 4월 28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날은 1951년 9월 8일 일본과 연합국이 체결한 이른바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발효되는 날이었는데 조약이 발효되면 1945년부터 7년 동안 일본 어민의 족쇄로 작용해온 이른바 ‘맥아더 라인’이 폐지된다는 희망때문이었다.
‘맥아더 라인’은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 후 일본 어민들이 본토 주변의 정해진 선을 벗어나 조업하지 못하도록 1945년 9월 27일 연합국최고사령부(GHQ)의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이 일본 주변에 선포한 조업 한계선이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한반도 주변 어디서든 조업을 해왔던 어민들로서는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일본 어민들은 연합국최고사령부에 조업 한계선을 넓혀달라며 거듭 요청했다. 최고사령부는 1946년 6월 22일 고래잡이 풍어기에 한해서만 한계선을 대폭 넓혀주면서도 여전히 독도 부근 12해리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도록 해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분명히 했다.

물론 ‘맥아더 라인’이 그어졌다고 일본 어민들이 맥아더 라인을 곧이곧대로 지킨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최신 장비와 기술을 이용해 수시로 맥아더 라인을 벗어나 우리 영해를 침범했다. 당시 일본은 첨단장비를 갖춘 어선을 1,000여 척, 200만t이나 보유하고 있어 주로 무동력선에 총선박 규모가 10만t에 불과한 우리 어선을 압도했다. 일본 어선은 독도 근처는 물론 제주도 연안과 흑산도 근해에까지 수시로 몰려가 조업을 일삼았다. 이 과정에서 한국에 나포된 일본 어선 수는 1947년 9척, 1948년 18척, 1949년 10척, 1950년 9척, 1951년 37척으로 총 82척에 달했다.
1952년 1월 18일 ‘인접해양에 대한 주권에 관한 대통령선언’ 선포
일본이 ‘맥아더 라인’의 폐기를 학수고대한 것과 달리 한국 정부로서는 어떻게든 막아야 할 입장이었다. 맥아더 라인이 폐기되면 우리 어업이 고사하는 것은 물론 독도까지 일본이 지배하겠다고 나설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조약 발효 후에도 맥아더 라인의 존속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1951년 4월부터 대책 마련에 부심한 끝에 상공부의 주도로 ‘어업보호관할수역’ 설정 안을 마련했다. 3해리 영해선 밖에 우리 어민들의 주요 어장을 보호하는 관할 수역을 만들자는 안이었다. 당시 영해 밖의 공해는 원칙적으로 어업 활동이 자유였다. 정부 안에 따르면 동쪽 경계선이 한반도의 최북단에서 시작해 울릉도와 독도 사이를 지나 거제도와 대마도 사이를 거쳐 제주도의 남쪽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 영토에서 독도가 빠지게 되자 외무부의 강력한 반대로 재논의 끝에 새 어업보호관할수역 안을 마련해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체결 하루 전인 1951년 9월 7일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재가하지 않았다. 우리가 먼저 맥아더 라인을 포기하는 듯한 인상을 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이로부터 4개월이 지난 1952년 1월 18일 기존의 어업보호에다 대륙붕 자원의 보존·이용이 추가되고 국방·안보 측면까지 보강된 훨씬 강화된 성격의 ‘인접해양에 대한 주권에 관한 대통령선언’이 국무원 포고 제14호로 선포되었다. 우리 해안에서 평균 60마일(약 97㎞) 이내의 자연자원과 수산물 등에 대해 배타적 권리를 주장한다는 내용이었다. 선언에 따라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를 둘러싼 동·서·남해에 대한민국의 주권이 미치는 범위를 나타내는 경계선이 그어졌다. 독도가 구체적으로 명기되지는 않았으나 함경북도 경흥군 우암령 고정(高頂)에서 동해안, 남해안, 서해안을 거쳐 마안도 서단(西端)으로부터 북으로 한만(韓滿) 국경의 서단과 교차되는 점까지 9개의 선을 연결함으로써 독도 역시 대한민국의 관할권과 지배권이 미치는 지역임을 분명히 했다.

“선포 수역에서 조업하는 외국 어선은 모두 나포하라”
이 대통령의 해양 주권선언은 독도를 ‘다케시마’로 부르며 자국의 영토임을 강변하는 일본의 주장에 쐐기를 박기 위한 목적이 1차적이었지만, 북한의 연안 침투를 방어하고 세계 각국의 전관수역이 확대되는 추세에 대응하기 위한 목적까지 감안한 쾌도난마식의 선언이었다. 1952년 당시 자국의 바다를 획정해 영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 나라는 미국과 중남미 등 몇 개국이 전부였을 뿐 아시아에서는 어느 나라도 그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배타적 경제 수역과 비슷한 개념의 해양 주권선언은 국제법상으로도 혜안이 돋보이는 선언이었다.
그러나 일본 어민들에게는 맥아더 라인이 폐기되어도 한국의 새로운 해양 주권선언에 의해 또다시 한국 연안 진출이 막혀버린다는 점에서 청천벽력 같은 선언이었다. 다급해진 일본은 열흘 뒤인 1월 28일 “국제법상 공해 자유의 원칙에 어긋나며 일본 영토인 죽도(독도)를 포함하고 있다”며 우리 측에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미국도 2월 11일 한국이 공해와 그 영공을 배타적 통제 아래 두려는 것 아니냐는 항의 의사를 전달해왔다.

한편 평화선 선포 후 일본 어선의 침범조업은 잠시 주춤하는 듯했으나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효력을 발생하자 다시 극성을 부렸다. 이승만 대통령은 7월 18일 “선포 수역에서 조업하는 외국 어선은 국적을 불문하고 나포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일본은 1952년 9월 ‘ABC라인(일본경비구역선)’을 선포하는 것으로 맞불작전을 펼쳤다. 당시 유엔사령관 마크 웨인 클라크도 1952년 9월 27일 중공군과 북한군의 잠입을 막고 전시 밀수출입을 봉쇄하기 위해 한반도 주변에 해상방위선 즉 ‘클라크 라인’을 설정했다. 이 선의 안쪽 수역이 평화선의 안쪽 수역과 거의 겹치다 보니 결과적으로 클라크 라인은 평화선 선포를 간접적으로 지원한 셈이 되었다.
압류한 일본 어선, 우리나라 수산업 발전에 큰 도움이 돼
이승만 대통령은 대만과 영국 등 몇몇 국가에서 계속 항의성명을 내자 1953년 2월 8일 “한일 양국의 충돌을 막는 평화 유지에 선언의 목적이 있다”고 해명하며 명칭을 ‘평화선’으로 바꿔 불렀다. 하지만 일본은 ‘이승만 라인’ 혹은 ‘이 라인’으로 부르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평화선을 국내법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이승만 정부가 제정한 어업자원보호법은 1953년 12월 1일 국회를 통과했다. 이로써 평화선이 법적 효력을 얻게 되었고, 평화선 내에서 외국 선박의 불법어로 행위를 엄격히 단속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은 이 경계선에 따라 1965년 한일한기본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13년 동안 일본 어선 233척을 나포하고 일본 어부 2,791명을 체포했다. 이 과정에서 1953년 2월 4일 제주도 부근에서 불법 조업 중이던 일본 어선 선장이 우리 경비정의 총에 맞아 숨지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정부는 압류한 일본 선박을 국내에 유상불하하거나 수산계 학교와 연구기관 등에 무상공여했다. 성능이 우수한 일부 선박은 우리 해양경비대의 경비정으로 쓰였다. 일본 어선을 되돌려주지 않고 우리가 활용한 것을 두고 논란이 적지 않았으나 어쨌든 압류 어선은 변변한 어선 하나 없는 우리나라 수산업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평화선 선포는 6·25라는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쾌거였으나 1965년 6월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고 12월 비준서 교환과 함께 사실상 소멸되었다. 평화선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던 날 우리 국민은 “얻은 것은 돈이요, 잃은 것은 평화선”이라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