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동일방직 똥물 사건… 여성이 노조위원장인 노조 사무실에 똥물 뿌려대며 집기 부수고 망가뜨려

↑ 똥물이 뿌려진 노조 사무실과 여성 노동자 모습

 

동일방직은 한국 노동운동 사상 처음으로 여성 노조위원장으로 선출된 곳

1960~70년대는 누구랄 것도 없이 못 먹고 못살던 시대였다. 그것은 농촌도 마찬가지였다. 농촌의 10대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초등학교나 중학교만 졸업하면 먹고 살 길을 찾아, 혹은 도시 생활의 장밋빛 꿈에 젖어 서울 등의 대도시로 몰려갔다. 여자 아이들은 도시에서 사실상 하녀나 다름없는 중산층 가정의 식모로 들어가거나 만원버스 차장이 되어 새벽부터 밤까지 시달렸다.

여성들이 특히 많이 들어간 곳은 도시 외곽에 널려 있는 공장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공순이’라는 사회적 멸시와 차별, 감독관과 남자 노동자들의 잦은 구타와 폭언과 성희롱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들은 가난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또는 오빠와 동생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입술을 깨물며 참고 참았다. 경제는 그들의 희생을 발판 삼아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며 ‘한강의 기적’을 향해 질주했다. 그런데도 공순이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들이 비참하게 사는 이유를 깨우쳐준 것은 도시산업선교회나 가톨릭노동청년회 등 진보적인 종교단체들이었다.

그 무렵 인천시 만석동에는 1930년대 일본 5대 방적업체 중 하나였던 동양방적 인천공장에 뿌리를 둔 동일방직 공장이 있었다. 상대적으로 보수가 좋아 취업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공장 안 모습은 그 무렵 다른 공장들과 마찬가지로 열악했다. 32도가 넘는 온도에 솜먼지가 풀풀 났고 집채만 한 기계에서 뿜어나오는 굉음 때문에 호루라기로 소통해야 했다.

1972년 5월 10일 이 동일방직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1946년 노조가 결성된 이래 처음으로 여성이 노조위원장으로 선출된 것이다. 1380여 명의 조합원 중 1210여 명이 여성인 것을 감안하면 당연한 결과였지만 당시만 해도 여성이 노조위원장이 된다는 것은 꿈도 꾸기 힘든 시절이었다. 당시 한국노총 산하 448개 지부의 조합원은 총 49만 9000명으로 그중 여성은 12만 4500명에 달했지만, 여성 지부장이 탄생한 것도 처음이었다.

주길자 신임 위원장은 노조원에 대한 교육선전활동을 강화해 노조를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으로 탈바꿈시켜 나갔다. 그러자 회사는 집행부를 바꾸기 위해 온갖 방해 공작을 시도했다. 그래도 주길자 위원장의 임기가 무사히 끝나고 1975년 이영숙 위원장의 집행부가 들어섰다.

 

경찰, 농성 중인 여성 조합원들 짐승처럼 끌고 가

회사는 또다시 노조 집행부의 전복을 시도했다. 1976년 4월 3일에 있을 정기 대의원대회를 앞두고는 몇몇 남자 대의원들이 대회 개최를 방해하도록 사주했다. 회사 측의 부당노동행위로 대의원대회는 결국 연기와 휴회를 반복했다. 회사가 이영숙 위원장을 불신임하기 위해 새로운 음모를 꾸미는 과정에서 이영숙 위원장과 총무가 1976년 7월 23일 경찰에 연행되었다. 그 틈을 타 남자 조합원들이 자파 대의원만으로 대의원대회를 열어 집행부 불신임안을 가결시켰다. 그러자 수백 명의 조합원이 위원장과 총무의 석방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7월 25일 오후 5시쯤, 800여 명의 조합원들이 농성 중일 때 수백 명의 경찰이 달려들었다. 노조원들은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 덩어리로 엉키고 뭉쳤다.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옷을 벗자. 설마 옷을 벗은 여자 몸에 손을 대겠느냐.” 수치심과 두려움을 무릅쓴 최후의 저항수단이었다. 하지만 경찰은 아랑곳하지 않고 72명의 조합원을 짐승처럼 끌고 갔다. 이 과정에서 팬티가 찢어지고 브래지어가 끊어져 사실상 발가벗은 몸이 된 조합원도 있었다. 소동으로 40여명이 까무러쳤다. 두 사람은 그때의 충격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1976년 12월 이영숙 위원장이 결혼을 앞두고 퇴사했을 때도 조합원들은 남자 조합원들의 방해 책동을 물리치고 1977년 4월 이총각(여)을 신임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1978년이 되었을 때 그동안 민주노조운동을 지원하던 도시산업선교회와 가톨릭노동청년회에 대한 비방과 공격이 정부 차원에서 시작되었다. 동일방직 노조의 상급 기관인 ‘섬유노동조합연맹’(섬유노련)은 동일방직 노조원들에게 “노조 집행부가 국제공산주의자들의 지시로 움직이는 도시산업선교회의 조종을 받고 있다”고 위협했다.

그런 가운데 회사의 사주를 받아 출마했다가 낙선한 노조위원장 후보와 남자 조합원들은 1977년의 선거 패배를 앙갚음하려고 새로운 수단을 동원했다. 1978년 2월 21일 있을 대의원 선거 하루 전에는 조합 사무실로 쳐들어와 투표함을 때려 부수고 이총각 위원장에게 온갖 욕설을 퍼부은 뒤 돌아갔다.

똥물 마구 뿌려대며 노조 집기 부수고 망가뜨려

5~6명의 남자 사원이 다시 노조 사무실로 쳐들어간 것은 야근조가 철야작업을 마치고 대의원 선거를 위해 노조 사무실로 삼삼오오 모여들고 있던 선거 당일 새벽 5시 50분쯤이었다. 그들은 방화수 통에 담아온 똥물을 뿌려대며 집기들을 부수고 망가뜨렸다. 노조 사무실은 온통 똥물로 뒤덮여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루 전의 폭력사태가 재발할지 몰라 노조의 요청으로 현장에 와 있던 경찰과 섬유노련 사람들은 그저 팔짱만 끼고 서 있기만 했다. 게다가 섬유노련은 이른바 ‘똥물 사건’으로 대의원대회가 무산되자 기다렸다는 듯 3월 6일 동일방직 노조를 사고지부로 처리하고, 농성 중인 이총각 지부장을 포함 4명의 노조 집행부가 “도시산업선교회와 관련이 있는 반조직행위자”라며 제명했다.

노조원들은 결국 회사 밖으로 뛰쳐나갔다. 3월 10일 TV와 라디오로 생중계되고 있는 장충체육관의 노동절 행사 때는 76명의 조합원이 “우리는 똥을 먹고 살 수 없다”고 외쳐 생방송이 세 차례나 중단되었다. 3월 26일에는 동일방직의 정명자가 다른 회사 조합원 5명과 함께 50만 명이 모인 여의도 부활절 연합예배장의 단상으로 뛰어올라가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마이크를 탈취한 뒤 “노동3권 보장하라”, “우리는 똥을 먹고 살 수 없다” 등을 외치다 전원 구속되었다.

동일방직 노동자는 이렇게 끈질기고 과감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4월 1일자로 124명의 조합원이 해고되었다. 섬유노련은 한술 더 떠 4월 10일 해고자 명단을 블랙리스트로 만들어 전국의 각 사업장으로 보내 해고자들이 다른 공장에 취업하는 길까지 봉쇄했다.

4월 23일 회사 측의 새 집행부가 꾸려진다는 소식을 듣고 이총각 위원장과 수십 명의 조합원이 현장으로 달려가 기습 출근 투쟁을 감행했으나 이총각과 김인숙 총무는 업무방해 및 폭력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124명의 해고자는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후 복직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장외투쟁을 전개했으나 아무도 복직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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