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게오르크 루카치 ‘역사와 계급의식’ 출판

↑ 게오르크 루카치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가장 정교하고 성숙하게 발전시킨 이론가

게오르크 루카치(1885~1971)는 카를 마르크스 이래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가장 정교하고 성숙하게 발전시킨 이론가로 꼽힌다. 마르크스가 주로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을 중심으로 자신의 이론을 전개했다면 루카치는 미학, 철학, 정치사상, 문학이론 등 인문학을 중심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틀을 발전시켰다. 마르크스 사후 레닌과 모택동이 마르크스주의를 현실 정치에 실현하는 것으로 역사에 이름을 올렸다면 루카치는 이론적·학문적 분야에서 마르크스 이념을 발전시켰다. 이런 영광과 찬사를 받은 그였지만 인생은 굴욕과 수난으로 점철되었다.

루카치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부유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다페스트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독일의 베를린대에서는 철학자 게오르크 지멜, 하이델베르크대에서는 철학자 막스 베버에게서 철학을 배웠다. 초기 대표작 ‘소설의 이론’(1915)은 문학이론가로서의 명성과 위치를 확고히 하고 다가올 루카치 문학이론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 기준을 마련해 주었다.

그의 철학적 변신을 자극한 것은 1차대전 중 일어난 러시아혁명이었다. “도대체 누가 우리를 서구 문명으로부터 지켜줄 것인가”라며 답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1917년 일어난 러시아혁명에서 희망의 빛을 본 것이다. 루카치는 자신의 해묵은 관념론을 폐기 처분하고 마르크스주의자로 전향했다. 실천의 일환으로 1918년 12월 헝가리 공산당에 가입하고 1919년 3월 무장봉기로 수립한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에서 교육문화 인민위원과 정치위원으로 현실 정치에 참여했다. 그러나 불과 133일 만에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이 무너져 오스트리아 빈으로 망명하는 처지가 되었다.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좌경화한 자신의 정치적·이념적 입장을 이론화 해

루카치가 자신의 주저 ‘역사와 계급의식’을 베를린에서 출판한 것은 1923년이었다. 저서에서 그는 1차대전을 전후한 유럽적 상황에 대한 절망감과 러시아혁명을 계기로 좌경화한 자신의 정치적·이념적 입장을 이론화했다. 또한 당시까지 서구를 지배해 왔던 마르크시즘을 새로운 차원의 철학적 수준에서 재해석함으로써 정신적 위기에 처해 있던 당시 서구 부르주아 지식인들을 마르크시즘으로 기울게 하는데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변증법적 방법론과 총체적 세계 이해를 강조함으로써 훗날 태동할 프랑크푸르트학파를 비롯 20세기 서양 지성사에 깊고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 그런 점에서 20세기의 전조(前兆)를 보인 19세기 사상가로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를 든다면 20세기를 만든 20세기 사상가로 비트겐슈타인, 하이데거와 더불어 그가 꼽힌다 .

1919년부터 틈틈이 써온 8개 논문 모음집인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가장 주목을 끈 논문은 ‘사물화와 프롤레타리아 의식’이었다. 루카치가 20세기에 남긴 주요한 학술어 중 하나인 ‘사물화’ 개념은,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이미 물신주의를 거론하고 막스 베버가 사물화, 관료화, 합리화를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그의 독창 개념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상품 구조로 사물화의 체계를 파악한 것과 달리 루카치의 사물화는 의식과 관련지어졌다는 점에서 돋보이는 발상이었다.

그의 사물화 개념은 인간 특유의 활동, 인간 특유의 노동이 인간으로부터 독립되어 인간에게 낯선 자기법칙성을 통해 인간을 지배한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상품구조로 사물화의 체계를 파악했다면 루카치는 베버의 생각을 빌려 사물화를 의식과 관련시킨 점이 다르다. 루카치는 사물화의 극복과 혁명의 동인을, 심각하고 철저하게 비인간화를 겪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의 성숙에서 찾았다. 이미 굳어버린 이데올로기, 혁명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공산주의 사상과 갈등하는 ‘비판 정신’도 강조했다.

그러나 루카치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는 마르크스주의가 더 이상 비판의 사상이 아니라 체제 이데올로기로 굳어지던 때였다. 따라서 ‘역사와 계급의식’은 이런 시대 흐름에서 본다면 역류의 사상이나 다름없었다. 이 때문에 ‘관념적 냄새가 짙은’ 루카치의 이론은 공산 혁명가들에게 부정되었다. 결국 루카치는 책을 출간하자마자 수정주의적이고 관념적으로 몰려 머지않아 스스로 책의 가치를 부정해야 했다.

 

소련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강령은 비판적 사실주의에 경도된 그에게 도전이자 시련

1928년 루카치가 발표한 논문 ‘블룸 테제’도 또 한 번 논란에 휩싸였다. 헝가리에서는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곧장 전환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라 노동자·농민의 민주주의적 독재를 당면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그의 논문에 기회주의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루카치는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관점이 정당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당에서 쫓겨나면 파시즘과 효과적으로 싸울 수 없다는 생각에 자아비판을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의 유대인 핏줄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무관심하고 부르주아라는 계급적 조건에 대해서는 반감을 가졌다. 20세기 유럽의 유대인 지식인들이 대체로 그러하둣 그 역시 인류의 보펀적인 문제에 킄 관심을 보였다. 그는 민족이나 계급문학보다는 범인류적이고 계급적 한계를 뛰어넘는 보펀적 문학관이나 세계관을 주장했다. 그의 부르주아 출신 성분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은행장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의 문학적 명성을 위해 최대한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루카치는 한동안 베를린에 있다가 1933년 나치 집권 후 소련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소련도 스탈린 주도 아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강령이 지배하고 있어 주로 19세기의 비판적 사실주의에 경도되어 있던 루카치에게는 도전이자 시련이었다. 루카치는 정치적 현실과 학문적 신념 사이의 괴리 속에서 자신의 말대로 ‘일종의 빨치산 투쟁’ 방식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것은 자신의 자아비판 글에 스탈린의 말을 인용은 하되 지엽적인 것으로 국한해 형식적으로는 검열자를 만족시키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스탈린과 다른 자신의 입장을 견지하는 소극적 방식이었다.

이에 대해 훗날 루카치는 “나는 스탈린주의가 일종의 이성 파괴라는 것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고 또 늘 그렇게 주장해왔다”면서 “다만 당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히틀러의 멸망이었고 그를 대적할 수 있는 집단은 스탈린의 소련뿐이었기 때문에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고 자신을 변호했다.

 

스탈린주의에는 비판적 태도 견지했으나 공산주의에 대한 애정은 포기하지 않아

루카치는 1944년 11월 부다페스트로 돌아와 현실 정치와 거리를 유지하면서 연구와 집필에만 몰두했다. 종전 후에는 ‘청년 헤겔’(1948)과 ‘이성의 붕괴’(1954)를 출간했다. 스탈린 사후 소련과 동유럽에 몰아닥친 해빙과 개혁의 물결은 루카치의 조국 헝가리에도 밀려왔다. 루카치는 1956년 민중봉기를 거쳐 너지 임레를 수반으로 하는 개혁 정부가 들어섰을 때 잠시 문교부 장관으로 활동했으나 소련의 탄압으로 너지의 봉기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당원 자격을 박탈당하고 ‘수정주의자’로 몰려 루마니아로 추방되었다. 1957년 4월 부다페스트로 돌아와서는 연구실에 칩거하면서 ‘미학’과 ‘존재론’ 등 말년의 대작업에 몰두했다.

그러던 중 1968년 소련의 주도로 시작한, 바르샤바 조약군 탱크가 체코의 프라하로 진격한 사태는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신념을 또다시 흔들어놓았다. 루카치는 사석에서 “1917년에 시작했던 실험 전체가 실패였던 것 같다”고 토로하고 스탈린주의와 현존 사회주의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견지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공산주의에 대한 애정과 신념은 죽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죽기 2년 전인 1969년 “최악의 사회주의조차 최선의 자본주의보다 항상 더 낫다고 생각해왔다”고 밝혔으며 숨을 거두기 직전인 1971년 1월 작성한 자서전 초안의 말미에서는 “점증하는 세계 위기의 유일한 돌파구는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이며 사회주의 국가들의 개혁 역시 마르크스 이데올로기에 입각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런 이유로 그가 죽고 1980년대 스탈린 사냥이 극도에 다다랐을 때는 ‘스탈린주의자’라는 딱지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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