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영욕 교차하고 현대사 아픔·갈등·논란 안고 떠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죽음에 즈음하여 되돌아본 그의 삶

↑ 11대 대통령 취임 순간(1980.9)과 수의를 입고 선고 공판을 기다리는 모습(1996년 8월)

 

by 김지지

 

전두환(90) 전 대통령이 2021년 11월 23일 오전 8시 45분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한 명 예외없이 영욕이 교차한 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들 가운데에서도 전두환 전 대통령만큼 끊임없이 비판받고 마지막 순간까지 논란을 일으킨 경우는 없었다. 2021년 10월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어 전두환 전 대통령까지 눈을 감으면서 격동의 현대사가 또 하나의 장을 넘기게 됐다. 영욕 교차하고 현대사 아픔·갈등·논란 안고 눈을 감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삶을 알아본다.

 

전두환이 최초로 정치에 눈을 뜬 것은 1961년의 5․16 쿠데타

전두환(1931~2021)은 경남 합천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대구공고를 졸업한 전두환의 인생 행로가 달라진 것은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월 육군사관학교 4년제 첫 기수인 육사 11기로 입학하면서였다. 생도시절 노태우, 김복동, 정호용 등 동향의 육사 동기들과 함께 결성한 사조직 ‘오성회’(이후 후배들을 가입시키면서 ‘하나회’로 발전)는 훗날 12·12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장악하는 모체가 되었다.

육사 생도 시절. 전두환(왼쪽)과 노태우

 

전두환이 최초로 정치에 눈을 뜬 것은 1961년의 5․16 쿠데타 때였다. 당시 대위였던 그는 5월 18일 육사 생도들이 청량리에서 시청까지 행진할 때 동참했다. 이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민원비서관으로 발탁되어 박정희와 지근거리를 유지하면서 전두환은 탄탄대로의 출세가도를 달렸다. 1공수특전단장(1971),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1976), 1사단장(1978) 등에 이어 1979년 3월에는 장차 그의 운명을 바꿔놓을 보안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67년 8월 17일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 이·취임식 후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기념촬영했다.

 

전두환의 위상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1979년 10월 26일 발생한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었다. 전두환은 박 대통령 시해 사건의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조사하고, 10·26 사건 수사를 구실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연행하는 12·12 군사 반란에도 성공해 군의 명실상부한 실력자로 등장했다.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신군부의 5인방이 본격적으로 정권 장악 시나리오를 가동한 것은 1980년 3월이었다. 보안사의 권정달 정보처장, 정도영 보안처장, 허삼수 인사처장, 이학봉 대공처장, 허화평 비서실장이 전두환을 무동태운 5인방이었다. 이들은 군 선배인 노태우, 정호용,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등 12·12 주도세력과 수시로 모여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에 역량을 총동원했다.

구체적인 첫 작업은 1980년 4월 14일 발표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중앙정보부장 겸직이었다. 5개월 전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자격으로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의 전모를 발표할 때 한 차례 얼굴을 내비친 적이 있긴 했지만 일반 국민에게 전두환은 낯선 인물이었다. 그러나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보안사령관의 중앙정보부장 겸직이 신군부 정권 장악의 신호탄이라는 것을. 전두환의 공개적인 등장은 1979년 12·12 사태 후 질곡과 파란으로 점철된 1980년대 한국 정치의 행로를 결정지은 중대사건이었다. 이로써 모처럼 찾아온 ‘80년 서울의 봄’은 다시 매서운 겨울로 되돌아가야 하는 운명에 직면했다. 신군부 세력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도 유혈 진압했다. 이후 5·18은 전두환이 생을 마치는 날까지 그를 짓누르는 업보가 되었다.

1979년 10월28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수사결과 중간발표를 하는 전두환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가 가시권으로 들어간 것은 국보위 상임위원장 임명 후

신군부가 5월 17일 계엄 확대조치를 발표한 것은 신군부의 집권 시나리오가 마지막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했다. 신군부는 계엄으로 김대중과 김종필을 연행하고 김영삼을 가택연금해 ‘3김’에게 족쇄를 채운 뒤 국회 문까지 전차와 총검으로 봉쇄했다. 하지만 5·17 비상계엄 조치만으로는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만들 순 없었다. 최규하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할 모종의 기구를 만들어 정권을 인수해 정권 쟁탈을 매듭지어야 했다.

5·17 조치가 발표되기 수 시간 전, 전두환은 최규하를 만났다.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함께 대통령 긴급조치에 따른 국회 해산 및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설치에 대한 재가를 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최규하는 비상계엄 확대 건 외에는 재가하지 않았다. 최규하는 “긴급조치 발동 상황이 아니며 국회 해산과 같은 헌정 중단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었다.

신군부 측은 작전상 한 발 물러났으나 하루 뒤 일어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또다시 국보위 설치를 밀어붙였다. 광주사태 예방과 수습에 아무런 역할도 못했던 최규하는 국정 주도권이 군부에 있음을 실감하며 결국 국보위 설치에 동의했다. 표면상 광주사태가 진정된 5월 31일, 대통령령으로 된 국보위 설치가 결정되고 전두환이 국보위 상임위원장으로 임명됨으로써 신군부의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는 가시권으로 들어갔다.

 

총투표자 2525명 가운데 2524명이 찬성한 사실상의 100% 지지로 11대 대통령 당선

신군부는 7월 4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발표해 김대중 세력을 완전히 무력화했다. 신군부의 마지막 장애물은 여전히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는 최규하였다. 신군부는 신현확 전 총리에게 최규하를 설득하도록 간곡히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역할은 군 원로 김정렬이 맡았다. 몇 차례의 설득과 우여곡절 끝에 한 시대의 획을 그은 최규하·김정렬의 담판은 7월 30일 끝이 났다. 다음날 최규하는 전두환을 불러 하야 의사를 밝혔다. 8월 13일 김영삼마저 가택연금 85일 만에 정계은퇴를 선언하면서 신군부 앞에는 더 이상 거칠 게 없었다. 전두환은 8월 5일 대장 계급까지 달아 군인으로서도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었다.

최규하 대통령이 전두환 장군에게 대장 계급장을 담아주고 있다.(1980년 8월 7일)

 

8월 16일 최규하가 대국민 특별성명을 통해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권한대행자에게 정부를 이양한다”고 발표하자 전국은 ‘전두환 추대’라는 관제 열풍에 휩싸였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연일 지역별 통일안보 보고회의를 열어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다. 8월 22일 전두환은 대장 전역식을 치르고 보안사령관 자리를 노태우 수경사령관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8월 27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를 통해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총투표자 2525명 가운데 2524명이 찬성한 사실상의 100% 지지였다.

전두환은 9월 1일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10개월간에 걸친 쿠데타 장정의 대미를 장식했다. 뒤이어 간접선거제와 7년제 단임을 골자로 한 8차 개헌을 통해 1981년 2월 25일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로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3월 3일 취임함으로써 7년 임기의 전두환 시대를 열었다.

제12대 대통령 취임식

 

집권 8년은 정치사회적으론 철권통치 시대이면서 경제는 호황 시대

전두환이 철권통치했던 8년(1980~1988년)은 정치적 억압과 권위주의 통치, 인권 탄압이 이어진 시기였다.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 시위가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고 많은 시국 사범들이 잡혀가 옥고를 치렀다. 언론에 대해선 보도 통제와 사전 검열이 일상화되었다. 박종철·이한열 등 대학생들이 고문이나 시위 중에 숨졌다. 삼청교육대 운영은 대표적 인권침해 사례로 꼽힌다.

다만 집권기 경제는 호황을 누렸다. 집권 초반 국내외 경제 여건은 녹록지 않았다. 1980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1.6%,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8.7%에 달했다. 경상수지는 적자에서 헤어나오지 못했고, 실업률은 5.2%에 달했다. 1979년 석유 파동 여파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두환은 경제정책에 자신이 직접 관여하지 않고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 등을 발탁해 전권을 맡기는 등 경제 회생 정책으로 호황기를 만들었다. 전두환이 당시 김재익 수석에게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며 전권을 맡겼다는 일화는 지금도 회자된다. 유가·금리·환율 등 ‘3저(低)’ 호재가 겹치면서 수출이 날개를 달고 대기업들도 급성장했다.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10%에 가까웠고 물가도 안정됐다.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서울 올림픽도 유치하면서 국가 위상도 한 단계 끌어올렸다. 한강종합개발사업도 추진해 강변북로·올림픽대로 등을 확대 신설했다. 사회적으로는 야간 통행 금지를 풀고 교복 자율화를 시행했다. 과외 금지 조치도 실시했다.

그 결과 집권 첫해인 1980년 1714달러이던 국민 1인당 GDP는 집권 마지막 해인 1988년 4754달러가 돼 2.8배로 늘었다. 부가 가치가 높은 자동차·전자·반도체 같은 첨단 산업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이런 경제적 성과의 이면에 정경유착 등 각종 권력형 비리도 있었지만 경제 발전과 개방 정책으로 늘어난 중산층은 1980년대 말 민주화 요구를 분출시켰다.

전두환은 1987년 자신의 임기 연장 대신 육사 동기이자 쿠데타 동지였던 노태우에게 후계 자리를 넘겼다. 사실 많은 사람은 유혈 사태를 통해 권력을 잡고 폭압 체제로 국민을 억눌렀던 전두환이 권력을 순순히 놓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전두환은 이런 예상을 깨고 평화적 과정으로 권력을 이양해 우려됐던 국가적 비극은 피할 수 있었다. 노태우는 1987년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는 결단으로 국가적 파국을 피했다. 퇴임 후 전두환은 그가 결과적으로 7년 단임 약속을 지켰다는 점을 강조했다. 2017년 발간한 회고록에서 “헌정 사상 처음으로 정부를 평화적으로 후임에게 이양한 것은 우리 현대 정치사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자평했다.

1987년 6월, 민정당 대통령후보 지명 대회에서 두 손을 번쩍 든 전두환(오른쪽)과 노태우

 

분신이나 다름없는 노태우 대통령의 5공청산 덫에 걸려

그러나 전두환은 뜻밖에도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노태우 대통령의 5공 청산 덫에 걸렸다. 친인척은 줄줄이 구속되었고 전두환은 비난 여론을 견디지 못해 1988년 11월 23일 149억여 원의 재산 헌납 의사를 밝힌 뒤 백담사로 유배를 떠나는 신세가 되었다. 1989년 12월 31일에는 5공비리와 광주사태 등을 따지는 국회 증언 과정에서 온갖 수모를 겪었다. 전두환이 백담사에서 감옥 아닌 감옥생활을 하다가 서울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온 것은 1990년 12월 30일이었다. 이후 전두환은 1993년 2월 노태우가 대통령에서 퇴임할 때까지 비교적 유유자적하며 보냈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이 1993년 5월 ‘12·12 사건을 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하면서 다시 바늘방석에 앉은 신세가 되었다.

1993년 감사원의 평화의댐 감사, 1994년 검찰의 12·12 사건 수사, 1995년 검찰의 5·18 사건 수사 등 3차례에 걸쳐 서면조사를 받았으나 1994년 10월과 1995년 7월 각각 기소유예와 공소권 없음 결정으로 안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야당이 5·18특별법 제정을 요구하고 1995년 11월 수천억 원에 달하는 노태우의 비자금이 사실로 밝혀지면서 국민으로부터 다시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결국 김영삼 대통령이 1995년 11월 5․18특별법 제정 방침을 밝히면서 시작된 검찰 수사에 따라 1995년 12월 3일 반란수괴 혐의로 전격 구속 수감되었다. 1996년 5·18 사건에서의 내란죄·내란목적살인죄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된 그는 1심에서 사형과 2259억원의 추징금을, 2심에서 무기징역 감형과 추징금 2205억원을 선고받았다. 1997년 4월 대법원이 원심을 확정했으나 그해 12월 노태우와 함께 특별사면을 받아 석방되었다. 이후 그는 현실 정치와 거리를 둔 채 비교적 조용히 지내왔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물가 안정, 경제 성장, 88 올림픽 유치, 한강 개발, 국가안보 강화 등과 함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룬 것은 대표적 치적이 맞다. 하지만 정치인 투옥, 언론 탄압, 삼청교육대, 기업 강제 통폐합, 친인척 비리 등 국민으로부터 너무 많은 지탄을 받아 죽는날까지 부정적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실 그는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과 관련해 면죄부를 받기는 어렵다. 그에게 광주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아킬레스 건이었다. 누가 뭐래도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실권자였기 때문이다.

5·18 민주화운동 때 광주 시민들과 계엄군으로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이 대치하고 있는 모습

 

그가 다시 법정에 서게 된 것도 5·18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한 발언 때문이었다. 2003년 방송 인터뷰에서 “광주는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라고 발언하고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발포 명령과 관련, “자위권 발동 지시는 있었지만 발포 명령은 없었다”는 취지로 부인해 화를 자초했다. 결국 2017년 펴낸 회고록에서 “5·18 사태는 ‘폭동’이란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고 하면서 5·18 당시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원색적으로 비난했다가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2020년 11월 1심에서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재판 과정에서 그는 5·18 당시 계엄군에게 발포 지시를 내린 적이 없고 헬기 기총 사격도 없었다고 부인했다. 그러면서 죽는 날까지 5·18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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