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맬컴 X 암살범 3명 중 2명은 범인 아닌 것으로 55년 만에 밝혀졌다는데… 맬컴 X는 누구

↑ 연설하는 맬컴 X

 

by 김지지

 

1965년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맬컴 X를 암살한 혐의로 복역했던 80대 남성이 55년 만에 누명을 벗었다. 뉴욕 맨해튼지검이 맬컴 X를 암살한 혐의로 기소돼 이듬해 3월 종신형을 선고받았던 2명의 유죄 판결을 최근 취소했다. 2명 중 1명은 20년 가까이 복역한 끝에 1985년 석방되었고 다른 1명은 1987년 석방됐지만 2009년 사망했다.

맬컴 X는 ‘이슬람국가(Nation of Islam)’라는 미국 내 흑인 이슬람 단체를 기반으로 활동했던 급진파 흑인 운동 지도자다. 그는 이슬람국가와 결별한 직후인 1965년 2월 뉴욕 맨해튼의 오두본 볼룸에서 연설하던 중 난입한 괴한 3명의 총격을 받아 40세 나이로 숨졌다. 당시 수사기관은 이슬람국가 회원이던 3명을 범인으로 지목해 살인죄로 기소했다. 범행을 인정한 한 명이 법정에서 나머지 두 사람은 무고하다고 말하고 2명 역시 알리바이를 제시했지만 재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사건은 2020년 넷플릭스에서 2명의 유죄 판결에 의문을 제기하는 다큐멘터리 ‘누가 맬컴 X를 죽였나’가 방영되면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방영 직후 맨해튼지검이 재조사에 착수, 당시 미 연방수사국(FBI)과 뉴욕경찰국이 두 사람이 무죄임을 밝힐 수도 있었던 핵심 증거를 은폐했던 사실을 밝혀냈다.

맬컴 X의 죽음을 보도한 라이프지(1965년 3월 5일자)

 

증오와 갈등과 분노의 이미지 지금까지도 벗어나지 못해

1959년 7월, TV 다큐멘터리 ‘증오가 부르는 증오’에서 맬컴 X(1925~1965)가 “백인은 악마!”라며 증오와 저주를 토해냈다. 방송을 본 백인들은 물론 흑백통합을 주장해 온 흑인 민권운동가들까지 맬컴 X를 “흑인 파시스트”, “증오를 가르치는 자”라며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비폭력으로 흑인의 지위를 향상하고 흑백차별 철폐를 주장하는 공민권 운동 만이 유일한 해결책으로 알고 있던 때에 “인종주의자가 사라지지 않는 한 폭력을 포기할 수 없다”며 폭력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맬컴 X의 등장은 소수의 도시빈민 흑인들을 제외하고는 흑인과 백인 대부분을 당혹케 했다.

그러나 맬컴의 성장기를 생각하면 맬컴의 이런 모습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었다. “고향 땅 아프리카로 돌아가야 한다(백투 아프리카)”는 마커스 가비의 운동에 깊이 관여하던 침례교 목사 아버지는 그가 6살 때 KKK단에 살해되었고, 스코틀랜드계 백인 외할아버지가 흑인 외할머니를 겁탈해 태어난 어머니는 아버지가 죽은 후 미쳐 정신병원에 갇혔다. 결국 맬컴을 포함한 형제들은 여러 위탁 가정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맬컴 X

 

가정적으로 불우했던 맬컴의 성장기 역시 가난과 굶주림에 찌든 여느 빈민가의 흑인들과 다르지 않았다.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태어나 9살 때 도둑질을 하고 13살 때 감화원 생활을 했으며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에는 보스턴에서 나이트클럽 구두닦이, 접시닦이 등을 전전했다. 17살 때 이주한 뉴욕 할렘에서는 갱단에 가입하고, 마약을 팔고, 강도짓을 서슴지 않았다. 결국 1946년 백인 가정집을 털다가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어느 날 면회를 온 형을 통해 ‘이슬람국가’라는 블랙 무슬림 단체를 이끌고 있는 엘리야 무하마드를 알게 되었다. 형에게서 전해들은 무하마드의 설교는 충격적이었다. 맬컴은 흑인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백인을 배척하는 이 종교에 푹 빠지게 되었다. 엘리야 무하마드와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고, 술, 담배, 마약을 끊었다. 희미한 복도 불빛 아래서 지독한 난시가 될 정도로 책을 읽었다. 통째로 책 내용을 외우다시피 하며 미국의 역사, 문화, 철학에 대한 지식을 쌓아갔다. 그렇게 읽은 책들은 흑인들의 비참한 현실을 깨우쳐 주었다.

 

흑인운동의 또 다른 대안으로 떠올라

맬컴은 1952년 가석방으로 풀려난 후 ‘이슬람국가’에 가입하고 무하마드를 만나 깊이 감화되었다. 그리고 뿌리를 확인할 수 없는 노예의 후손임을 잊지 않기 위해 백인 냄새가 나는 ‘리틀’이라는 성을 버리고 ‘맬컴 X’로 이름을 바꾸었다. 미국 흑인들의 성은 보통 노예로 부리던 백인 주인이 붙여줬다는 사실에 반발, 미지수를 뜻하는 ‘X’를 써서 흑인의 빼앗긴 뿌리를 상징하고자 한 것이다.

엘리야 무하마드(왼쪽)와 맬컴 X

 

맬컴은 강력한 카리스마와 호소력있는 스피치로 서서히 두각을 나타냈다. 뛰어난 연설 실력으로 많은 흑인에게 이슬람교 개종을 권유했고, 흑인들의 정신적·경제적 독립을 주장했다. 블랙 무슬림 신문도 발행해 폭넓은 포교 활동도 했다. 맬컴 가입 전 4곳에 불과하던 사원은 수년 만에 50여곳으로 늘어났고 신도 또한 500여 명에서 10년 만에 2만5000 명으로 늘었다. 무하마드는 이러한 맬컴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 그를 대변인으로 임명하는 등 맬컴을 ‘이슬람국가’의 2인자로 천명했다.

1959년 TV 다큐멘터리 방송 후에는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어 각종 사회·정치적 이슈에 관해 신문, 잡지, 방송 등을 통해 견해를 밝히기 시작했다. 국제적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 미국이 온통 인종문제로 들끓고 있을 때 맬컴은 비폭력을 주창하는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대조를 이루면서 흑인운동의 또 다른 대안으로 떠올랐다.

당시 마틴 루터 킹은 통합을 통한 인종문제 해결을 추구했다. 그의 흑인민권운동은 소수의 인종주의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백인과 흑인들로부터 공감을 얻었다. 반면 분리를 통해 흑백문제를 해결하려 한 맬컴의 운동방식은 소수의 가난한 흑인을 제외한 모든 미국인으로부터 비난과 저주를 받았다. 맬컴은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로 시작되는 킹 목사의 연설로 유명한 1963년 8월의 워싱턴대행진을 두고는 “얼간이 행진”, “백인광대와 흑인광대가 함께 출연한 소풍이자 서커스”라며 비아냥댔다. 킹에 대해서는 “백인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20세기의 샘 아저씨”라고 조롱했다.

맬컴 X(왼쪽)와 마틴 루터 킹

 

심지어 케네디의 피살에 대해서도 “자업자득”이라고 논평해 백인들의 분노를 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연설과 폭넓은 지식 덕에 맬컴은 자주 매스컴에 등장하고, 그때마다 관심과 비난과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전국 50개 대학에서 한 강연 후에는 전국 대학생 여론조사에서 두 번째로 인기가 높은 인물로 부상하기도 했다.

 

백인도 공존해야 할 ‘인간’으로 인식 바뀌어

이처럼 인기가 치솟자 ‘이슬람국가’의 1인자 무하마드가 맬컴을 질시하며 멀리하기 시작했다. 위태롭던 둘의 관계는 1963년 7월 무하마드가 2명의 비서와 불륜관계를 맺어 4명의 자식을 낳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완전히 틀어졌다. 맬컴의 투쟁방식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그 무렵이었다. 맬컴은 무하마드의 도덕성에 환멸을 느끼고 1964년 3월 8일 공식적으로 엘리야 무하마드의 ‘이슬람국가’와 결별을 선언했다.

맬컴은 1964년 4월 이슬람 성지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를 순례한 후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그에게 백인은 더 이상 ‘악마’가 아니라 때로는 협력할 수도 있고 결국 평화롭게 공존해야 할 ‘인간’이었다. 백인들 개개인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버리고, 마틴 루터 킹의 접근방식도 수단은 다르나 목표가 같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 메카를 방문했을 때 맬컴 X의 모습

 

성지순례를 계기로 맬컴은 수니파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이름도 바꾸었다. 회교사원을 설립하고 자신이 결성한 아프로·아메리카통일기구(OAAU)를 이끌면서 미 전역과 해외 각국을 순방하며 흑인의 동포애와 인종 간 평화를 역설했다. 그러자 ‘이슬람국가’ 측이 맬컴에 대해 공공연히 위협을 가했다. 무하마드는 “맬컴은 목이 잘려야 마땅하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이슬람국가’ 매체는 맬컴의 잘린 목이 튀어다니는 카툰을 실었다. 결국 1965년 2월 21일, 뉴욕 할렘의 오더본 볼룸에서 열린 OAAU 연설 도중 3명의 무하마드 조직원이 쏜 16발의 총탄을 맞고 40세로 절명했다. 변화된 이미지를 보여주기도 전에 쓰러져 맬컴은 지금까지도 증오와 갈등과 분노의 이미지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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