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배호 50주기] 아픔과 감정이 묻어나는 저음과 구슬프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큰 인기 끌었던 ‘불멸의 가객’

↑ 웃고 있으나 밝지는 않다.

 

by 김지지

 

11월 8일은 ‘불멸의 가객’ 배호의 50주기다. 올해도 어김없이 전국의 팬들이 그를 기리는 행사를 치른다. 먼저 11월 4일부터 7일까지 서울 이화여고백주년기념관에서 그의 인생과 음악을 담은 뮤지컬 ‘천변카바레’가 5년 만에 공연된다. 기일에는 전국의 팬들이 그가 잠들어있는 신세계공원묘지로 몰려가 합동추모제를 지낸다. 배호가 어떤 인물인지를 알아본다.

 

우리 가요사에서 사후에 더 뜨겁게 조명을 받는 최초 가수

우리 가요사에서 사후에 더 뜨겁게 조명을 받는 가수는 배호(1942~1971)가 처음이다. 그는 생전에도 방송국 10대 가수로 몇 차례 선정될 만큼 인기가 높긴 했지만 1971년 사후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오히려 더 늘어나는 특이한 현상의 주인공이다. 그가 타계한지 10년이 된 1981년 MBC여론조사에서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 1위를 차지하고, 2005년 KBS ‘가요무대’가 선정한 ‘국민에게 가장 사랑받은 10인의 가수’에 이름을 올렸다.

2000년 11월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가수 이름을 딴 ‘배호 길’이 서울 용산의 삼각지 로터리에 지정되었으며 노래비는 서울시 용산구 삼각지(2001.11 ‘돌아가는 삼각지’)를 비롯,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2002.4 ‘두메산골’), 경북 경주시 현곡면(2003.6 ‘마지막 잎새’), 강원 주문진(2003.7 ‘파도’), 인천 연안부두(2011.10 ‘비 내리는 인천항 부두’) 등 전국적으로 5곳에나 있다. 지금도 인터넷에 공개된 배호 팬클럽만 40여개가 되고, ‘배호를 기념하는 전국 모임’은 16개 시도에 지부가 있다. 미국에도 6개 지부, 중국 일본 호주 칠레에도 팬클럽 지부가 있다. 배호 가요제도 열리고 있다. 팬들은 ‘배호 평전’을 출간하고 배호의 유해가 안치된 경기도 장흥의 묘소를 관리하는 등 지극정성이다.

경북 경주시 현곡면의 ‘마지막 잎새'(왼쪽)와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의 ‘두메 산골’ 노래비

 

배호(본명 배극남)는 1942년 4월 중국 산동성 제남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광복군 제3지대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였다. 배호는 광복 후 부모 품에 안겨 귀국해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1955년 부산의 한 중학교에 입학했으나 그해 8월 부친의 작고로 생활이 어려워지자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부산의 이모가 운영하는 모자원에서 살았다. 그러나 음악이 하고 싶어 중학교를 중퇴하고 1956년 8월 홀로 상경해 넷째 외삼촌 김광빈의 집에 기거하며 드럼을 배웠다.

중학생 시절의 배호

 

외가는 뛰어난 음악 집안이었다. 둘째 외삼촌 김광옥은 대만에서 교향악단을 지휘했던 우리나라 클래식 음악의 선구자였으며 셋째 외삼촌 김광수는 KBS의 초대 악단장을 역임하고 동요 ‘엄마야 누나야’ 작곡가로 유명했다. 넷째 외삼촌 김광빈 역시 1962년부터 MBC 초대 악단장을 지내며 형 김광수와 함께 국내 방송계의 유명 악단장 형제로 화제를 모았다. 그 중에서도 김광빈은 배호의 음악인생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배호는 16살이던 1958년 김광빈에게서 드럼을 마스터하고 ‘김광빈 악단’에서 연주를 하다가 1960년 미8군 무대에서 악단생활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활동을 했다. 1963년에는 김광빈이 작곡하고 배호가 노래한 ‘굿바이’ ‘사랑의 화살’이 ‘김광빈 작곡집’(앨범)에 수록되어 가수로 데뷔했다. 배호는 그때 김광빈이 지어준 예명이다. 김광빈은 배호의 노래가 별다른 히트를 치지 못하자 목소리는 성숙한데 나이가 어려 인기를 끌지 못했다고 판단해 장차 배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될 중절모와 양복차림, 검은 뿔테안경으로 조카를 변신시켰다.

왼쪽 사진은 ‘김광빈 악단’ 시절의 배호(맨 왼쪽)와 김광빈(왼쪽에서 세번째). 오른쪽은 드럼을 치는 배호

 

진한 저음, 처절한 목소리와 감성, 도시 서민의 애환이 한데 엉켜 대중의 심금 울려

배호는 22살이던 1964년 서울 낙원동 한 카바레의 밴드 마스터로 발탁되어 12인조 풀악단인 ‘배호와 그 악단’이란 이름으로 드럼을 치고 노래하는 가수로 이름이 알려졌다. 같은 해에는 반야월 작사, 김광빈 작곡의 ‘두메산골’과 정성수 작사, 김인배 작곡의 ‘황금의 눈’을 발표했다. 이렇게 막 이름이 알려지고 있던 1966년 2월, 배호는 갑자기 신장염에 걸렸다. 요즘 같으면 큰 병이 아니지만, 당시엔 치명적이었다. 결국 음악활동을 접고 어머니, 누이동생과 단칸방에 살며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던 1966년 가을 어느 날, 군에서 막 제대한 신예 작곡가 배상태가 배호의 청량리 단칸방 집을 찾아왔다. ‘돌아가는 삼각지’를 작곡해 몇몇 가수들에게 취입을 의뢰했으나 모두 거절당하자 배호를 찾아온 것이다. 배상태는 병세가 심해 거동은 물론 호흡조차 힘들어하는 배호와 가족을 설득해 ‘돌아가는 삼각지’를 취입시켰다.

배호가 가쁜 숨을 몰아 쉬며 힘들게 취입한 ‘돌아가는 삼각지’는 1967년 3월 발매되었다. 서울 용산구 한강로 1가에 자리잡은 삼각지 입체 교차로는 그 무렵 한창 공사 중이었다. 그런데 노래에 등장하는 ‘돌아가는 삼각지’가 이 입체 교차로가 아니라 삼각지 일각의 모처를 뜻한다는 주장도 있다. 입체 교차로가 노래가 발매되기 한 달 전에 착공했기 때문이다. 삼각지 입체 교차로는 1994년 허물어지고 현재 그 부근엔 배호 노래비가 놓여있다.

‘돌아가는 삼각지’ 음반

 

‘돌아가는 삼각지’는 특유의 저음과 구슬프지만 힘이 있는 목소리에 힘입어 전국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발매 첫 해 KBS의 ‘가요베스트’에서 연속 20주 동안 1위를 차지한 것은 대중가요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배호는 ‘돌아가는 삼각지’ 발매 한달 뒤인 1967년 4월 전우 작사, 나규호 작곡의 새 노래 ‘누가 울어’, ‘안개 속에 가버린 사람’을 비롯 10여 곡을 수록한 첫 독집음반을 발표했다. 같은 해 7월에는 ‘안개 낀 장충단공원’을 발표해 연속적으로 히트를 기록했다. 아픔과 감정이 묻어나는 진한 저음, 처절한 목소리와 감성, 도시 서민의 애환이 한데 엉켜 대중의 심금을 울리는 그의 노래들은 그해 말 배호를 MBC 10대 가수 무대에 올려놓았다.

1968년 봄 배호는 거짓말같이 멀쩡해졌다. “병마가 내 몸에서 사라진 것 같다”고 스스로 말할 정도였다. 덕분에 배호는 1968년을 생애 최고의 해로 보내고 1969년에는 고액납세자 가수 부문 3위에 오를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공개방송, 업소 출연, 지방공연 등 무리한 활동으로 신장염이 재발, 1969년 12월 MBC 10대 가수 시상식에는 동료가수 이상렬의 등에 업혀 출연해야 했다. 배호가 무대에서 쓰러지겠다는 각오로 무대에 오르면 오를수록 병세는 그의 삶을 나락으로 밀어냈다.

그러던 중 1970년 11월 2일 강원 양구의 한 다방에서 총을 든 어떤 남자가 인질극을 벌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인질범의 요구사항은 담배 한 보루와 배호의 음반, 이렇게 두 가지였다. 여자 넷을 인질로 붙잡아 둔 그는 배호 노래를 듣고 또 들었고 때로는 따라부르다가 이튿날(3일) 밤 11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무슨 이유로 최악의 선택을 했는지 결국 알려지지 않았지만 배호의 노래는 그만큼 사람들을 위로하는 힘이 있었다.

배호 이야기는 그로부터 35년이 지나 구효서의 소설집 <시계가 걸렸던 자리>(2005년)에 수록된 단편소설 ‘달빛 아래 외로이’에도 등장한다. 배호 마니아이자 가수 지망생인 주인공은 사기를 당해 재산을 다 날리지만 배호의 노래를 들으며 괴로운 삶을 견딘다. 한 팬은 그의 노래를 듣고 충격을 받아 밤새도록 술을 먹으며 엉엉 울었다는 고백을 털어놓고 있다.

서울 삼각지 입체 교차로

 

많은 곡이 ‘가요의 고전’으로 남아 지금도 전국 곳곳에서 애창돼

배호는 1970년 건강이 잠깐 회복되어 연말 가수상 시상식에 스스로 걸어서 나왔으나 1971년 라디오 출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비를 맞는 바람에 병세가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했다. ‘0시의 이별’, ‘마지막 잎새’를 취입한 것은 병원에서 치료 중이던 1971년 여름이었다. 하지만 그해 11월 8일 서른 문턱을 넘기지 못하고 자택에서 숨져 마지막 노래가 되고 말았다. 11월 11일 예총회관(현 세종문화회관) 광장에서 가수협회장으로 치른 장례식에는 300여명의 팬들이 몰려와 그와의 작별을 아쉬워했다. 임종 직전 배호가 누운 병상에는 오랫동안 그를 간호해 배호와 약혼한 한 여인이 있었다. 죽기 얼마 전 배호는 자신의 손목시계와 반지를 건네주면서 그녀를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것으로 그녀와도 마지막이었다.

배호는 7~8년에 불과한 짧은 가수 활동에도 불구하고 250여 곡의 노래를 부르고 30여 곡의 히트곡을 남겼다. 그 중 많은 곡이 배호의 열렬한 팬들을 통해 ‘가요의 고전’으로 남아 지금도 전국 곳곳에서 애창되고 있다. 뮤지컬 ‘천변카바레’는 배호 노래를 아주 잘 부르던 시골 청년이 우연한 기회로 서울의 한 카바레에서 배호 모창가수로 활동하게 된다는 내용의 공연이다. 2010년 초연된 이 뮤지컬은 배호가 활동하던 당시의 풍경을 그럴 듯하게 재연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2021년 배호 50주기를 맞아 11월 4일부터 7일까지 서울 이화여고백주년기념관에서 다시 공연되고 있다.

현재 그가 잠들어있는 신세계공원묘지에는 해마다 기일이면 수많은 팬들이 몰려와 합동추모제를 지낸다. 배호 팬들에겐 성지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름을 딴 ‘가요제’도 1년에 세 차례, 그 것도 각각 다른 단체에 의해 개최되고 있다. 서울 중구에서 매년 개최하는 ‘배호 가요제’도 그 중 하나인데 이 가요제는 2021년 어느덧 제23회나 된다.

배호를 기리는 뮤지컬 ‘천변 카바레’ 포스터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