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땅 구석구석

[경주 남산] ‘절들은 하늘의 별처럼 펼쳐져 있고 탑들은 기러기 떼처럼 줄지었다’(삼국유사)는 경주 남산에서 ‘보물찾기’ 산행에 빠지다

↑ 용장사곡 삼층석탑. 해발 350m에 위치한 아찔한 암반 절벽을 하층기단으로 삼고 있다.

 

by 김지지

 

■남산에서 보물찾기

경주 남산이 그리웠다. 가고 싶었다. 수년 전 아내와 함께 처음 올랐을 때의 잔상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기억은 삼릉과 송림에서 시작된다.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다른 지역이라면 범접도 하기 어려운 보물(문화재)들이 그곳엔 차고 남쳤다. 사실 경주 자체가 보물 창고 아닌가. 국가가 보물로 인정한 석조 불상들과 탑들을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경주 남산이 아니었다면 언감생심이었을 것이다. 남산 중턱에서 내려다 본 초록의 경주 벌판과 그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형산강도 남산을 소록소록 생각나게 했다. 2021년 9월 19일 아내와 함께 또다시 경주 남산을 만나러 갔다. 삼릉계곡~금오봉(정상)~용장골로 이어진 코스였다. 산행 초반에는 기억하지 못하다가 금오봉 정상에 올랐을 무렵에야 수년 전 코스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 번째 떠난 남산 여행은 보물찾기였다. 여기서 말하는 보물은 보배로운 물건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재를 뜻한다. 학창시절 보물찾기가 그러하듯 남산의 보물들 역시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곳에 숨어 있다. 아니 공개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이번 남산 여행에서 직접 대면한 보물(문화재)은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63호), 삼릉계 석조여래좌상(666호), 용장사곡 삼층석탑(186호),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187호),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67호)이다. 남산에서 내려와 남산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는 중에도 남산리 동서 삼층석탑(보물 124호)과 남산사지 당간지주(보물 909호)도 만났다.

경주 남산

 

■경주 남산

 

▲천년 역사

경주 남산에는 신라 천년의 역사와 흔적이 곳곳에 서려 있다. 경주남산연구소에 따르면, 산 능선과 골짜기 곳곳에 흩어져 있는 절터만 150곳이다. 불상은 129기, 탑은 99기에 달한다. 여기에 왕릉 13기, 산성지(山城址) 4개소, 석등 22기, 연화대 19점 등의 문화유적도 남아있다. 우리나라 유일의 ‘지붕 없는 박물관’이자 ‘노천 박물관’으로 불리는 이유다. 문화유적으로 지정된 것은 국보 1점, 보물 14점, 사적 15개소, 중요민속자료 1개소 등 51점이다. 2000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어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신라 석불의 보고’라고 불릴 정도로 남산에 특히 석불과 석탑이 많은 것은 남산에 질 좋은 화강암이 많기도 하지만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정착된 바위 신앙과도 관련이 깊다.

일연은 이런 경주의 모습을 ‘삼국유사’에서 ‘사사성장 탑탑안행(寺寺星張 塔塔雁行)’이라고 묘사했다. ‘절들은 하늘의 별처럼 펼쳐져 있고 탑들은 기러기 떼처럼 줄지었다’는 뜻이다. 또한 “남산을 오르지 않고선 경주를 알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남산은 경주의 진산이자 주산이다.

남산에는 신라 천년의 흥망성쇠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신라의 시작과 끝이 모두 남산에서 이뤄졌다. 서북쪽 자락의 ‘나정’은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가 깃든 곳이고, 그곳에서 남쪽으로 1㎞ 거리에 있는 ‘포석정’은 신라 말기 경애왕이 후백제의 견훤에게 죽임을 당한 곳이다. 서라벌을 지켰던 남산신성을 비롯 왕릉, 무덤, 궁궐터 등을 망라한 많은 유적들도 천년 역사를 반추하고 있다.

석불들은 ‘석조여래좌상’처럼 현대인들이 편의상 지어준 고유의 이름을 갖고 있다. 이름에 주로 사용되는 용어는 여래, 관음보살, 약사여래, 보살, 마애, 석조, 좌상, 선각 등이다. 이 용어들의 뜻을 미리 알고 산행을 떠나면 아는 만큼 보일 터이니 탐방 답사도 그만큼 충실해질 것이다. ‘여래’는 부처를 달리 이르는 말이고 ‘관음보살’은 자비로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고 왕생의 길로 인도하는 보살을 말한다. ‘약사여래는 질병 구제, 수명 연장 등을 통해 중생에 만족을 주고 중생을 바른 길로 인도하여 깨달음을 얻게 하는 부처를 뜻한다. ‘보살’은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부처에 버금이 되는 성인을 뜻한다. ‘마애’는 석벽에 글자나 그림, 불상 따위를 새기는 것, ‘석조’는 돌에 조각하는 것, ‘선각’은 선으로 새기는 것이다. ‘좌상(불)’은 앉아 있는 모습의 불상을 뜻한다. 그런데도 ‘석조여래좌상’ 같은 이름은 남산에만 3기나 되어 이름 앞에 지역명인 삼릉곡이나 용장골을 붙여 구분한다. 이를테면 지역명이 성(姓)인 셈이다.

바둑바위에서 내려다본 경주 벌판

 

▲산행 코스

 경주 남산은 분지 한 가운데에 솟아있는 타원형의 산이다. 동서 거리는 약 4㎞이고 남북 거리는 약 8㎞다. 북쪽의 최고봉인 금오봉(468m)과 남쪽의 최고봉인 고위봉(494m) 높이가 500m가 안되어 규모나 높이 면에서 내세울만한 산세는 아니다. 그럼에도 높고 낮은 봉우리와 아기자기한 골짜기가 서로 어울려 입체감을 깊게 해준다.

남산에는 등산로가 70개쯤 있다. 등산로가 향하는 곳은 주로 금오봉과 고위봉이다. 산세가 부드러워 어느 계곡에서나 쉽게 정상에 오를 수 있고, 어느 코스로 올라가도 석불과 석탑을 만난다. 안내판이 잘 갖춰져 있어 서울의 남산처럼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남산에서 가장 인기있는 산행 코스는 서쪽 삼릉에서 올라가 금오봉을 지나 서남쪽 용장골로 내려가는 것이다. 남산의 34골짜기 중 석불상이 가장 많은 삼릉골과 용장골을 더듬는 경로다. 석불상은 모두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 말기에 제작된 것들이다. 아기자기한 산세 덕분에 등산 자체도 재미있다. 이번 산행에서 확인한 멋진 조망터는 세 곳이다. 바둑바위, 용장사곡 삼층석탑,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을 멀리서 바라보는 조망터다.

삼릉골~금오봉~용장골 코스는 삼릉에서 버스로 한 정거장 떨어진 삼불사에서 출발하는 게 정석이다. 그러나 대개는 편리성 때문에 삼릉주차장(서남산주차장)에서 가까운 삼릉에서 출발한다. 삼릉골~금오봉~용장골 등산은 3시간 남짓 걸리지만 유적 답사를 제대로 하려면 5~6시간을 잡아야 한다. 거리는 대략 6.5㎞다. 하산 후에는 용장골에서 삼릉골로 수시 운행하는 시내버스를 타고 대여섯 정거장을 지나 삼릉주차장으로 돌아온다.

삼릉골~금오봉~용장골 코스 (출처 경주남산연구소)

 

■우리 산행은

 

▲삼릉, 석조여래삼존입상(보물 제63호)

우리도 삼릉주차장(서남산주차장)에 주차하고 삼릉에서 올라가 금오봉을 지나 용장골로 하산하는 코스로 진행했다. 이 글 위에서 삼불사 출발을 권했으니 당연히 우리도 삼불사를 출발지로 삼아야 했으나 빨리 올라야 한다는 생각에 삼릉에서 출발했다. 대신 하산 후 삼불사와 석조여래삼존입상(보물 제63호)을 따로 둘러보았다. 삼불사는 오랫동안 폐사로 남아 있다가 근래에 중창한 절이다. 우리에게 낯익은 전통적 사찰 모습이라기 보다는 현대식 암자에 가깝다. 경내에 석탑이 있으나 경주에 보물급의 석탑이 워낙에 많아 문화재로서의 가치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삼불사 부근에서 지나치지 말아야 할 것은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불상이 3기다. 배동의 옛 지명인 배리를 붙여 배리삼존불로도 불린다. 석불은 주변에 흩어져 묻혀있던 것을 1923년 지금 자리에 모아 세웠다. 본존불(으뜸가는 부처)의 높이는 2.75m이고 좌우 보살상은 높이 2.28m, 2.2m다. 부근에 망월사도 있다. 경내에 연화탑이라 불리는 제법 세련된 모습의 삼층석탑이 연못 속에 있으니 둘러볼만 하다.

배동석조여래삼존입상

 

삼릉골 기점은 서남산주차장(삼릉주차장)이다. 주차장에 남산안내소가 있으니 그곳에서 관련 지도와 자료를 얻어 가면 산행 중 석불과 석탑의 위치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문화재해설사도 상주하고 있어 해설 시간만 맞추면 해설사의 전문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 삼릉주차장에서 금오봉까지 2.6㎞다. 주차장에서 도로를 건너 삼릉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면 삼릉계곡과 울창한 소나무 숲이다. 삼릉계곡은 사시사철 시원한 계곡물이 끊이지 않아 냉골로도 불린다.

이리 휘고 저리 굽어진 삼릉 앞 소나무들은 수년 전 처음 보았을 때 만큼 인상적이진 않았으나 여전히 매력적이다. 사실 경주에 멋진 소나무가 이렇게 많다는 것은 이번에야 알았다. 그동안 강원도 동쪽만 송림 세상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경상북도야말로 송림 천국이었다. 어딜가나 낙락장송들이 감탄사를 자아낸다. 송림 옆 삼릉에는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이 잠든 봉분 셋이 나란히 들어서 있다. 신라 고분에서 채색이 확인된 유일한 무덤이어서 가치가 크다. 삼릉은 귀공자처럼 기품있어 보인다. 낙락장송이 수호신처럼 삼릉 쪽으로 길게 가지를 뻗고 있다. 계곡 너머 숲속에 55대 경애왕릉(924~927)이 있다.

삼릉

 

▲냉곡 석조여래좌상,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삼릉에서 시작되는 등산로는 초반에는 완만하다가 곧 경사 있는 돌길로 바뀐다. 다만 전국의 국립공원이 그러하듯 반듯하고 평평하게 다듬어놓은 돌길이어서 걷기는 편하다. 삼릉계곡을 따라 500m쯤 올랐을 무렵 결가부좌하고 있는 부처님이 가슴을 넓게 펴고 당당한 모습으로 탐방객을 맞는다. 냉곡 석조여래좌상이다. 높이가 1.6m에 무릎 너비가 1.56m나 되는 큰 좌불이다. 그런데 목이 잘리고 머리가 없다. 원래 인근 계곡에 어깨 일부분만 노출된 채로 파묻혀 있던 것을 1964년 발견 후 현재 자리로 옮겨놓았다. 땅 속에 파묻혀 있다보니 마멸이 거의 없고 옷 주름이 생생하다.

냉곡 석조여래좌상에서 북쪽 산등성이 50m쯤 위에 뾰족한 바위 기둥들이 솟아 있다. 그중 한 바위에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이 있다. 돌기둥같은 암벽에 돋을새김했다. 자세히 살펴보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다. 높이는 1.54m, 어깨너비는 54㎝다.

계곡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골짜기 왼쪽에 자리잡은 커다란 바위에 선으로 새겨진 불상이 있다. 남산에서는 드물게 여섯 불상을 선각으로 새겨놓은 삼릉계곡 선각육존불이다. 조각수법이 정교하고 우수해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선각마애불 중 으뜸가는 작품으로 꼽힌다. 석질이 단단한 화강암에 새긴 때문인지 천년의 풍우에도 윤곽이 선명하다. 동쪽 바위 면에는 설법하고 있는 석가모니 삼존불을 새기고, 서쪽 바위 면에는 아미타삼존불을 새겨, 현생과 내생을 나타내고 있다. 오른쪽 암벽 위에는 당시 이들 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법당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 있다.

석조여래좌상(왼쪽)과 마애관음보살상

 

▲삼릉계곡 선각여래좌상,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마애선각여래좌상

선각육존불에서 바위 위 등성이로 200m쯤 올라가면 높이와 너비가 각각 10m쯤 되는 넓은 절벽바위가 서쪽을 향해 솟아 있다. 그 암벽 중앙에 지름 2.5m쯤 되는 여래상이 있다. 공식 명칭은 삼릉계곡 선각여래좌상이다. 몸체는 선각으로 나타내고 얼굴은 깎아 내어 돋을새김으로 표현했다. 선각여래좌상 옆 바위는 부부가 서로 안고 있는 모습 같다고 해서 부부바위로 불린다.

선각여래좌상에서 오른쪽으로 난 능선 길을 따라 150m 정도 가면 숲속에 바위 무리가 있다. 그 가운데 순백 화강암으로 조성된 결가부좌한 여래상이 연화대석 위에 앉아있다. 경주 남산 불상 중 가장 잘생겼다는 삼릉계 석조여래좌상(보물 제666호)이다. 높이는 2.16m다. 불상 앞쪽 평평한 바위에 작은 단이 있다. 그 옛날 바위를 탑의 기단으로 삼아 세웠던 삼층석탑은 지금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에 있다. 다시 등산로로 내려와 잠시 오르는 중에 왼쪽 위를 바라보니 위에서 소개한 삼릉계 석조여래좌상이 다소곳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삼릉계 석조여래좌상(보물666호)

 

그 뒤쪽 30여m의 바위 절벽에 얼굴 부분만 선각으로 새겨진 마애선각여래좌상이 있다. 거리가 먼 탓에 윤곽만 어슴푸레하게 보일 뿐 상세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 바위 오른쪽 바위 절벽 중턱에 1915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진 석조약사여래좌상(3.4m) 터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석조약사여래좌상(왼쪽)과 원래 남산에 있을 때 모습

 

▲상선암, 바둑바위, 상사바위,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

본격적인 오르막이다. 계곡과 점점 멀어지면서 길도 한층 가팔라진다. 자연석 계단과 데크 계단으로 15분쯤 오르면 삼릉에서 1.6㎞ 떨어진 상선암이다. 급한 경사로는 거의 다 오른 셈이다. 상선암은 옛 절터에 90여년 전 세운 암자이다. 전국 암자 대부분이 그러하듯 상선암 역시 고즈넉한 전통적 사찰의 모습은 아니고 여염집이나 생활집 모습이다.

상선암 뒤로 150m쯤 올라가면 거대한 자연 암반 벽면에 6m 높이로 양각된 불상이 있다. 남산에서 두 번째로 큰 불상의 명칭은 삼릉계 마애석가여래좌상이다. 그러나 상선암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예전에는 상선암에서 바로 올라갈 수 있었으나 지금은 낙석 위험 때문에 길을 막아놓았다. 결국 등산로 따라 위로 올라가 상사바위 앞에서 내려다보아야 한다. 마애석가여래좌상에 대해서는 뒤에서 소개한다.

상선암에서 7~8분 정도 오르니 삼불사에서 올라온 길과 만나는 갈림길이다. 그곳에서 삼불사까지는 1.6㎞이고 삼릉까지는 1.65㎞다. 갈림길에서 20분 정도 오르니 경주 최고 조망터인 바둑바위다. 신선이 내려와 바둑을 두었다는 곳이다. 거대하고 평평한 자연 암반이다. 바둑바위는 경주 시내를 두루 살필 수 있는 남산 최고 조망터다. 바둑바위에 오르니 대릉원 등 경주의 주요 문화유적과 함께 형산강(서천)이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초록의 드넓은 경주 벌판이 막힘없이 한 눈에 들어온다. 바둑바위를 지나 오른쪽 절벽 쪽으로 조금 다가가면 금송정 터다. 금송정은 경덕왕 때 음악가 옥보고가 가야금을 타며 즐기던 정자가 있던 곳이다. 옥보고 때부터 터 잡고 있었을 바위와, 틈새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푸르른 소나무가 멋진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

바둑바위 모습

 

금송정 터에서 금오봉 방향으로 가다보면 대형 암반이 보인다. 상사바위인데 길목에 안내문이 없어 초등자는 상사바위 앞길을 지나면서도 옆의 바위가 상사바위란 사실을 모르고 지나치기 일쑤다. 바둑바위와 상사바위 안내판이 필요하다. 상사바위 앞 길을 지날 때는 반드시 방금 걸어온 금송정 자리 쪽을 향해 뒤돌아봐야 한다. 금송정 아래 거대 암벽을 파내 만든 6m 높이의 장대한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이 그곳에서 사바세계를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가까이 다가가 볼 수 없어 상세한 모습은 알 수 없지만 설명에 따르면 남산에서 두 번째로 큰 불상이란다. 얼굴은 돋을새김으로 원만하게 다듬었으며, 몸은 억센 선으로 그리고, 머리 뒷부분은 투박하게 바위를 쪼아냈다.

상사바위 앞을 지나 살짝 안부로 내려오면 거대 암반인 상사바위 뒤쪽이다. 그곳에 기도용 감실이 있고 그 앞에 머리와 연화대를 잃어버린 소(小)석불이 있는데 남산에서 발견된 가장 작은 석불이다. 마모가 심해 식별이 어렵다.

마애석가여래좌상. 오른쪽은 불상을 확대한 모습이다.

 

▲금오봉, 용장골

멀리서나마 마애석가여래좌상을 내려다볼 수 있는 상사바위 조망대를 지나 20분 정도 가면 금오봉(468m) 정상이다. 출발지인 삼릉을 기준하면 2시간 30분이 지났다. 이런저런 보물들을 완상하느라 일반 산행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정상 100m 전에 임도와 정상으로 갈라지는데 두 길은 몇백m 지나 다시 만난다. 금오봉에 오른 후에는 임도 쪽에 화장실이 있고 임도가 편하다는 이유로 100m를 되돌아가 임도로 내려가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 있으나 산행이 목적이라면 정상을 지나는 코스가 좋다. 정상은 평평하고 넓고 깔끔하다. 다만 키가 큰 나무들이 사방을 가로막고 있어 조망은 없다. 정상을 기준하면 삼릉주차장 2.6㎞, 상선암 1.0㎞, 고위봉 4.6㎞, 용장사지 1.3㎞, 용장마을 3.5㎞, 약수골 입구 1.5㎞다.

정상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눠진다. 오른쪽은 약수골 방향이고 직진하면 임도로 내려간다. 임도는 용장골, 고위봉, 칠불암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금오봉 정상에서 <용장사지 → 1.3㎞> <용장마을 3.5㎞> 이정표를 따랐다. 정상을 지나 0.4㎞ 내려가면 임도(남산일주도로)와 만난다. 도로라지만 아스팔트가 아니고 흙길이거나 야자수잎 길이다. 임도를 따라 10분 정도 내려가니 용장골(오른쪽)과 통일전(왼쪽)으로 나뉘는 갈림길이다. 이곳에서 용장마을은 2.5㎞ 정도이고 통일전은 3.8㎞ 거리다. 우리는 임도에서 용장골로 내려간다.

여기서 잠깐. 용장골로 내려가기 전, 통일전 방향으로 조금만 가면 보이는 대연화대(삼화령)를 둘러볼 것을 권한다. 대연화대는 용장골 정상에 있는 높은 암반 위에 있다. 원래는 석불이 안치되었을 바위 위에는 큰 연꽃이 새겨져 있다. 봉우리는 세 갈래의 산 능선이 모여 꽃송이처럼 솟아올랐다고 해서 삼화령이다. 봉우리에 올라서면 앞으로는 고위산이, 서쪽으로는 단석준령 즉 깎아지른 듯한 언덕과 높고 가파른 고개가 바라보인다. 용장골로 내려가다가 뒤돌아보면 멀리 원형탈모처럼 그곳만 허옇게 보인다.

대연화대(삼화령)

 

다시 돌아와 용장골로 하산한다. 용장골은 금오봉과 고위봉 사이 골짜기로 계곡 길이가 3㎞다. 남산에선 가장 크고 깊은 골짜기다. 22개소의 절터, 7기의 석탑, 5구의 불상이 남아있다. 절 이름은 용장사만 빼고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도 용장사 덕분에 용장골과 용장마을 이름이 생겨났다. 용장골 코스는 한동안 바위와 송림의 연속인 지능선을 타고 내려간다. 하산 중 언제라도 고개를 들면 고위봉과 정면에서 수시로 눈이 마주친다. 이곳엔 며느리밥풀꽃 군락이 유난히 많다. 꽃잎은 크고 색은 선명하다.

 

▲용장사곡 삼층석탑,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임도 갈림길에서 20분 정도 내려가니 경주 남산의 상징탑인 용장사곡 삼층석탑(보물 186호)이 뒷 모습을 보여준다. 삼층석탑 자리는 경주 남산에서 첫손 꼽히는 명소다. 석탑 앞쪽으로 용장골과 주변 능선이 유려하게 펼쳐진다. 석탑이 딛고 선 자리가 절묘하다는 사실은 계곡 아래에서 올려다 보아야 비로소 알게 된다. 해발 350m에 위치한 아찔한 암반 절벽을 하층기단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탑 높이는 4.5m이고 석탑 상층부는 부러져 없다. 용장사지 아래쪽 계곡에 흩어져있던 것을 찾아내 1920년대에 복원했다.

다시 5분을 내려가니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보물 187호)이 보인다. 자연암반 위에 둥글게 다듬은 북 모양의 중대석을 얹고 그 위에 쟁반 모양의 둥근 반석을 놓았다. 3m 높이에 있는 대좌 위에는 결가부좌로 앉은 141㎝의 불상을 모셔놓았다. 다만 불상은 머리가 없다. 쟁반 모양의 돌을 층층이 쌓아 올린 형태는 우리나라에서는 유례가 없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경덕왕 때 용장사에 대현스님이 계셨는데 절에 돌로 만든 미륵 장육상(사람 키의 두배나 되는 크기의 불상)이 있었다. 대현스님이 그 미륵부처님께 기도하면서 돌면, 미륵부처도 대현스님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이것을 근거로 삼아 이 석조여래좌상이 대현스님께서 기도하면서 돌던 그 미륵부처님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 바로 뒤 대형바위 벽면에는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보물 913호)가 돋을새김되어있다. 풍만한 얼굴, 균형잡힌 몸, 단정한 이목구비가 돋보인다. 남산에는 마애여래좌상이 여러 기 있는데 이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이 가장 씩씩하고 아름다운 청년기 모습이라고 한다. 좀더 내려가면 용장사지 탑 부재와 석등대석이 나온다. 현재는 옥개석과 자연암반의 석등대석만 남아있는데 전문가들은 이것으로 미루어 이곳에도 석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곳에서 위를 쳐다보면 삼층석탑이 보인다.

용장사지 석조여래좌상(왼쪽)과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보물 913호)

 

▲용장사지, 용장계 절골 석조약사여래좌상

부근에 용장사지가 있다는데 확실한 안내판이 없어 찾지 못했다. 용장골 팻말에는 금오봉에서 1.1㎞ 아래, 용장마을에서 2.5㎞ 위에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지만 막상 어디가 용장사 터임을 알려주는 안내문은 없다. 용장사는 통일신라시대 대현스님이 거주하고 조선 세조 때 대학자이자 승려인 설잠 스님(매월당 김시습)이 7년간(1465~1471) 머물며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비롯 ‘유금오록’을 집필한 곳으로 전한다.

하산길은 바위 일색인데도 일부 구간에 빽빽한 대나무 숲이 있어 신기했다. 대나무 숲을 지나 다시 길을 잡으니 곧 작은 계곡을 가로지르는 현수교 모양의 설잠교가 나타난다. 설잠은 김시습의 법명이다. 계유정난(1453년)으로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21세의 김시습은 읽던 책을 불살라버리고 불가에 귀의해 전국을 유랑했다고 한다. 설잠교를 지나면 화강암 반석 위로 물이 흐르는 계곡이 본격적으로 이어진다. 1년 내내 수량이 풍부하다는 용장골이다.

이어지는 하산 중 등산로 한켠에서 용장계 절골 석조약사여래좌상 설명문을 만난다. 그런데 설명문만 있고 어디로 가야 있다는 이정표가 없다. 결국 찾지 못하고 지나쳤다. 그런데 경주남산연구소 소책자에는 <설잠교를 지나 절골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약 150m 정도 올라가면 계곡을 가로지르는 무너진 축대가 2곳이 있고 좀 더 올라가면 큰 축대가 나타난다. 법당터 한 가운데 앉아있는 불상이 용장계 절골 석조약사여래좌상이다. 불상은 산에서 흘러온 모래와 자갈돌에 묻혀 있다가 1940년 발굴되었다. 머리와 광배는 찾지 못하고 대좌와 몸체만 발견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등산로에 150m 산 속에 있다는 방향표시가 있었다면 일부러 찾아가봤을 것인데 아쉽다. 혹 내가 이정표를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나중에 ‘삼릉탐방지원센터’에 전화를 걸어 문의하니 직원은 확인 후 연락을 주겠다고 한다. 며칠 후 전화가 왔는데 아직 길을 제대로 정비하지 못해 이정표를 설치하지 못했다며 상황을 봐서 설치를 검토하겠다고 했다.

설잠교에서 약 30분을 내려와 흔들다리를 건너면 공원지킴터에 도착한다. 산행 마무리 지점이다. 이어 한적한 마을을 지나 내남치안센터 버스정류소에 닿는다. 약 6.5㎞의 거리를 5시간 걸렸다. 석불과 석탑을 감상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버스를 타고 삼릉주차장으로 이동했다.

설잠교(왼쪽)와 용장골 계곡

 

▲하산 후

보물찾기 여행인 만큼 남산에서 내려와 남산 주변을 한 바퀴 돌며 보물찾기를 이어갔다. 포석정(사적 1호), 나정(사적 245호), 남간사지 당간지주(보물 909호), 상서장(경상북도 기념물 제46호), 서출지(사적 138호),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보물 124호) 등이 둘러본 곳이다. 이중 보물이 2점이나 있어 뿌듯했다. 관련 사진도 많이 찍었다.

그런데 다음날 오전 스마트폰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완전 먹통이 되었다, A/S센터에서는 회복불능이라면서 저장된 사진도 복구할 수 없다고 한다. 동기화환 ‘구글 포토’에도 대부분의 사진은 있는데 이상하게도 남산 아래 주변 사진들만 동기화되지 않았다. 신기한 것은 그날 밤 경주 시내에서 촬영한 월정교 사진은 구글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아쉬웠지만 다음에 또 오라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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