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땅 구석구석

[안동 어데 가봤니껴 6-①] 도산권(동북권) : 도산서원 노송정고택 온계종택 퇴계묘소 오천군자마을

↑ 도산서원 전경

 

by 김지지

 

■안동과 도산권(동북 지역) 여행

경북 안동은 우리나라 역사·문화의 보고다. 시내 전체가 유물·유적지다. 수려한 자연풍광까지 더해지니 관광객이 차고 넘친다. 몇 개 권역으로 나누어 다녀오지 않으면 자칫 도로에서 시간을 허비하기 십상이다. 전시관이나 기념관 등 현대식 건물을 제외하면 크게는 5개 권역이다.

△동북 지역(도산권) : 도산서원, 노송정고택, 온계종택, 오천군자마을, 선비순례길, 퇴계예던길, 고산정, 농암종택, 청량산 △서남 지역(하회권) : 하회마을, 부용대, 옥연정사, 겸암정사, 병산서원 △시내 지역(도심권) : 임청각, 월영교, 호반나들이길, 낙동물길공원, 안동댐 △서북 지역 : 봉정사, 이천동 마애여래입상 △동남 지역 : 만휴정과 원림, 묵계서원, 용계 은행나무, 백운정과 개호송숲 등이다.

안동은 낙동강이 시내 전체를 관통하는 호반도시다. 2021년 현재 인구가 16만 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인데도 다리가 많은 이유이다. 안동에 태를 묻은 대표적 인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황, 김성일, 류성룡, 이현보 등이 있다. 가장 최근 인물로는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시인 이육사가 있다.

안동시 전경 (출처 안동시)

 

도산권(동북 지역)은 퇴계 이황(1501~1570)의 도산서원을 품고 있어서 붙여진 권역 이름이지만 퇴계 말고도 살펴볼만한 곳이 몇 군데 더 있다. 퇴계와 관련된 곳은 도산서원, 노송정고택, 온계종택, 선비순례길 등이고 그 외의 곳으로는 오천군자마을, 고산정, 농암종택 등이다. 그럼에도 퇴계의 그림자가 워낙에 짙고 넓어 도산권을 온전히 즐기려면 퇴계 이황이 어떤 인물인지를 먼저 공부하고 떠나는 게 좋다

흥미로운 것은 안동과 경주 중 어느 지역이 더 문화재가 많냐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문화재 하면 경주가 많다고 생각한다. 경상북도의 새 도청 유치를 위해 경주시와 안동시가 치열하게 경쟁할 때도 경주시가 내세운 자랑 중 하나가 문화재가 많다는 주장이다. 그러자 안동시가 “어디가 더 많은지 국가 및 지방 지정문화재를 세어 보자”고 반박했다. 그 결과 안동이 3점 더 많았다. 경주가 320점, 안동이 323점이었다. 안동에 이처럼 문화재가 많은 것은 전통 있는 가문마다 한 마을에 종택(宗宅)·정자(亭子)·재실(齋室)·서원(書院) 등을 경쟁적으로 갖추고, 그 후손들이 지극 정성으로 이 목조건축들을 보존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퇴계의 도산서원

 

▲도산서원

도산서원은 안동 시내에서 북쪽으로 27㎞ 정도 떨어져 있다. 35번 국도를 따라 북상하다가 도산서원 삼거리에서 우회전한다. 주차장까지는 안동호를 끼고 도는 1~2㎞ 남짓 거리의 아스팔트 길이다. 이런저런 수종의 나무들이 길 양편에서 양팔을 벌린 채 오가는 여행객을 맞는다. 도산서원 뒤에서는 구릉같은 도산이 푸근하게 감싸준다. 앞에서는 너른 안동호 물이 넘실대니 천하의 명당이다. 대개 입장료를 받는 곳이 그러하듯 이곳도 깔끔하게 잘 관리되어 있다. 서원 입구와 안에서는 유림 복장을 한 가이드가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고 적극적이다.

도산서원은 정문을 지나 중간 출입문인 진도문을 경계로 크게 서당과 서원 구역으로 나뉜다. 아래는 도산서당이고 위는 도산서원이다. 1570년 퇴계가 세상을 떠났다. 제자들이 스승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퇴계가 생전에 지은 도산서당 바로 위에 1574년 서원을 짓기 시작해 1576년 완공했다. 서원은 1575년 선조가 당대의 명필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陶山書院)’의 편액을 하사해 국가가 지원하는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도산서원 편액에는 일화가 있다.

1575년 선조가 당대 최고 명필 한석봉(1543~1605)을 불렀다. 사액(賜額·임금이 직접 현판을 내림) 서원에 보낼 글씨를 쓰게 하기 위해서였다. 부르는 대로 받아만 쓰라고 했다. ‘원’-‘서’-‘산’ 한석봉은 열심히 받아 썼다. 마지막 글자는 ‘도’. 그제야 자신이 쓰는 것이 ‘도산서원’임을 알았다. 선조는 ‘천하의 한석봉도 도산서원 현판이란 사실을 알면 붓이 떨려 현판을 망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단어를 거꾸로 부른 것이었다. 도산서원 현판 글씨의 마지막 자가 오른쪽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간 듯 보이는 유래다. 지금 도산서원에 걸려 있는 현판은 모사본이다. 진품은 안동 국학진흥원에 있다.

도산서원 입구로 들어가면 계단 위 정면으로 진도문이 있고 그 뒤로 전교당이 있다.

 

구릉같은 도산이 푸근하게 감싸주고, 안동호 물이 넘실대니 천하의 명당

도산서원 건물들은 정문에서 시작하는 남북의 축을 따라 일직선상에 중문인 진도문과 중앙의 전교당을 기준으로 좌우 대칭으로 배열했다. 진도문을 지나면 정면에 대강당 역할을 하는 전교당(보물 제210호)이 있다. 전교당 아래 좌우에는 동재(박약재)와 서재(홍의재) 가 있고 동재 뒤쪽에 장판각이 있다. 장판각은 도산서원에서 찍어낸 책의 목판본을 보관하던 곳이다. 지금은 인근의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전교당과 장판각 사이로 난 계단을 올라가면 퇴계의 신주를 모시고 있는 상덕사(보물 제211호)다.

진도문의 동서 양쪽에 책을 보관하는 2층 누각의 광명실이 있다. 현판 글씨는 퇴계의 친필이다. 동(東)광명실에는 역대 왕이 하사한 서적과 퇴계 선생이 친히 보던 수택본이. 서(西)광명실에는 퇴계의 제자와 유학자들의 문집이 보관되어 있다. 도산서원 내 한 건물에 도산서원의 옛 모습을 그린 18세기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 17세기 김창석의 도산도, 18세기 강세황의 도산도 등이 사진으로 걸려있다. 서원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할 수 있어 반가웠다. 특히 계상정거도는 퇴계 영정이 들어있는 1000원권 지폐 뒷면에도 실려있다.

도산서원은 1870년(고종 7)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무사했다.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으로 등재되었다. 도산서원과 함께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서원은 조선의 첫 서원인 소수서원(경북 영주)을 비롯 옥산서원(경북 경주), 병산서원(안동), 도동서원(대구 달성), 남계서원(경남 함양), 무성서원(전북 정읍), 필암서원(전남 장성), 돈암서원(충남 논산) 등이다.

전교당

 

▲도산서당

퇴계는 50세 때인 1550년 낙향 후 도산면 토계리에 거처(한서암)를 정했다. 제자들이 몰려와 불편해지자 바로 옆에 계상서당을 세웠다. 그때 건물은 사라지고 최근 복원한 서당 건물이 현재 토계리의 퇴계종택을 사이에 두고 개울 건너 산기슭에 있다. 계상서당이 문을 열자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비좁아지자 퇴계가 대책을 강구했다. 그리고 계상서당에서 3㎞쯤 떨어진 도산 남쪽에서 완벽한 터를 찾아냈다. 야트막한 도산과 낙동강 지류에 둘러싸인 형세여서 산책과 사색에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퇴계는 1557년 도산서당을 직접 설계한 뒤 집짓기를 시작했다. 퇴계는 사대부인데도 사실상 건축가 역할을 했다. 승려 정일에게는 목수 일을 맡기고, 아들 준에게는 세세한 일들을 지시하면서 공사를 이끌었다. 기와를 굽는 작업, 사람을 동원하는 일에도 직접 간여했다. 한 편지에 “당(堂)은 반드시 정남향, 재(齋)는 서쪽 정원을 마주 보도록 하며(중략) 남쪽 변의 3칸에 들보와 문미의 길이를 8자로 하고…”라고 썼듯, 건물의 방향, 실(室)의 구성은 물론 기둥 사이의 치수까지도 명시했다.

1561년 완공된 건물은 두 채였다. 지금까지도 원형 일부가 보존되어 있는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다. 도산서당은 온돌방, 마루, 부엌 3칸으로 지어진 사설 교육기관이고 농운정사는 기숙사다. 농운정사는 공자(工字)형 구조를 가진 8칸짜리 건물이다. 동서로 길게 방이 있고, 양쪽 앞뒤로 마루방을 설치한 형태다.

서당 마당 동쪽 끝에는 작은 연못 ‘정우당’과 정우당 동쪽 산기슭에서 솟아나는 샘물 ‘몽천’이 있다. 화초와 나무를 심은 화단 ‘절우사’, 앞마당을 둘러싼 울타리에 낸 사립문 ‘유정문’도 있다. 퇴계는 1570년 숨질 때까지 9년간 이곳에서 학문을 닦고 후학을 길렀다. 이곳 도산서당에서 퇴계에게 공부한 대표적인 제자가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 한강 정구다.

도산서당

 

▲시사단

도산서원 앞을 지나는 낙동강 지류에는 1796년(정조 20) 세워진 시사단이 있다. 물이 차지 않을 때는 논과 밭에 둥글게 솟아있는 모습인데 내가 갔을 때는 안동호에 물이 많아 호수 한가운데 떠있는 섬처럼 보였다. 시사단(試士壇)은 이름 그대로 ‘선비를 뽑은 장소’라는 뜻이다.

1792년 재위 16년째를 맞은 정조가 퇴계를 추모하기 위해 특별히 도산서원에서 과거시험(도산별과)을 치르도록 했다. 한양 아닌 곳에서 처음 치러진 이날 과거에 응시한 사람은 7228명이나 되었다. 이때 치러진 별과를 기념하여 4년 뒤인 1796년 그곳에 비와 비각을 세운 것이 시사단이다. 원래 장소는 강변 솔밭이었으나 1970년대 안동댐 건설로 물에 잠기게 되자 단을 10m 높이로 쌓아 올려 옮려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시사단 (출처 안동시청)

 

▲도산서원 나무들… 왕버들, 금송, 매화

도산서원에서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서원 앞 너른마당에서 자라는 두 그루의 노거수 왕버들이다. 왕버들은 바로 옆산의 그늘 때문에 햇빛을 확보하기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려고 위로 자라기를 포기하고 햇빛이 조금이라도 오래 머무는 곳을 향해서 가지를 뒤틀어 옆으로 뻗어나갔다. 그렇게 버텨온 세월이 400년이다. 특히 두 그루 중 강가 쪽으로 가지를 낮게 뻗고 있는 나무는 마치 마른 붓질로 그린 듯한 형상이다.

도산서원 밖에 있는 두 그루의 왕버들

 

서원 앞마당의 금송(金松)에는 사연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 12월 청와대 집무실 앞에 있던 것을 서원 경내에 옮겨 심었는데 2년 만에 말라죽었다. 그래서 당시 안동군이 같은 수종을 구해 몰래 그 자리에 심었는데 문제는 금송이 일본에서 천황을 상징하는 일본 왕궁의 조경수라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진 것이다. 이를 비판하는 여론이 일자 결국 2018년 11월 서원의 담장 밖 현재 위치에 옮겨 심었다.

퇴계 하면 떠오르는 나무가 매화나무다. 그래서 서원 문을 들어서면 매화나무가 많다. 크기가 작은 것으로 미루어 오래전에 심은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퇴계가 매화를 좋아했다는 사실이 익히 알려진 터라 절로 퇴계를 떠올리게 한다. 퇴계는 평생 매화를 끔찍이 사랑했다. 자신이 지은 매화시 91수를 모아 ‘매화시첩’이란 시집으로 묶고, 문집에 실린 것까지 포함하면 107수의 매화시를 남겼다. 심지어 매화와 이야기를 주고 받는 문답 형태의 시도 남겼다. 한 개인이 지은 매화시로는 최다작이다. 퇴계는 시 속에서 매화를 지칭할 때 ‘매군(梅君)’ ‘매형(梅兄)’이라 하여 엄연한 인격체로 예우했다. 애지중지하던 매화가 얼어 죽었을 때는 매화의 원혼을 애도하는 장시를 짓기까지 했다. 퇴계는 1570년 12월 8일 숨을 거두기 전, 매화가 걱정되어 자신의 수발을 드는 사람에게 “매일 매화 화분에 물을 주라”고 당부하고는 그날 오후 눈을 감았다.

도산서원 (출처 안동시청)

 

■노송정고택과 온계종택

 

▲노송정고택과 퇴계태실
노송정 터를 잡은 이는 퇴계의 조부 이계양

안동 시내에서 국도 35호선을 따라 북쪽으로 20분쯤 내달리면 퇴계의 정신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도산면이다. 도로 오른쪽 도산서원에 들르지 않고 더 북상하면 도로 왼쪽에 퇴계가 태어난 온혜리가 있다. 당시 주소는 예안현 온계리였다. 현재 마을 앞을 흐르는 온혜천(퇴계 당시는 온계천)은 봉화군과 도산면의 경계를 이루는 북쪽의 용두산(664m)에서 발원해 운곡리와 온혜리를 지나 토계천(兎溪川)과 합류한다. 그 주변에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노송정고택이 자리잡고 있다. 찾아가려면 내비게이션에서 ‘노송정’을 검색하면 된다.

노송정 고택

 

이곳에 터를 잡은 이는 퇴계의 조부 이계양이다. 그는 진성이씨 시조 이석의 5세손(퇴계는 7세손)이다. 이계양은 관직에 있다가 1453년 단종을 폐위하려 한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초야에 은거하기로 하고 이곳에 터를 잡은 뒤 1454년(단종2년) 정자를 지었다. 건립과 중수를 알려주는 기록이 다수 남아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이계양은 집 주위에 오래된 소나무가 많아 노송정(老松亭)을 당호와 아호로 삼았다. 노송정 현판은 조선의 명필 한석봉이 썼다.

출입문인 솟을대문으로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펼쳐지고 빨간색 테두리를 한 ‘老松亭’이 정면에서 시선을 사로잡는다. 솟을대문은 기와집 대문의 한 형식인데 문지방이 없고 높다. 양반들이 말을 타거나 가마를 타고 대문으로 들어설 때, 고개를 숙이지 않고 진입하려면 대문이 높아야 하기 때문이다. 건축 당시 노송정은 지금처럼 웅장하지 않은 그냥 작은 정자였다. 후대에 다시 증수하면서 지금의 규모로 커졌다.

노송정은 마루, 온돌방, 툇간으로 구성된 ㄱ자형 정자다. 온돌방 문 위에 ‘屋漏無愧(옥루무괴)’라는 현판이 보인다. ‘집이 낡아 빗물이 새어도 부끄럽지 않다’는 뜻으로 학문하는 자세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대청 마루 양편에는 ‘山南洛閩(산남낙민)’, ‘海東鄒魯(해동추로)’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산남낙민은 ‘산 남쪽의 낙읍과 민’을 뜻한다. 낙읍(洛邑)은 정호·정이 형제가 태어난 곳이고, 민(閩)은 주자가 태어난 곳이다. ‘해동추로’는 추나라에선 맹자가, 노나라에선 공자가 태어났다는 뜻으로 퇴계가 태어난 곳임을 은유하고 있다.

노송정 모습

 

왕족이 아니면서도 태실을 보존하고 있는 이는 퇴계가 유일

솟을대문 위에 ‘聖臨門(성림문)’ 편액이 걸려있다. 대문 이름이 ‘성인이 태어난 곳’이라는 뜻의 성림문인 것은 퇴계 어머니 춘천박씨가 임신 중에 공자가 70제자들을 이끌고 대문으로 들어서는 태몽을 꾸었고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된 퇴계의 수제자 학봉 김성일이 ‘성림문’이라 명명했기 때문이다. 후일 제자들이 종택 들어오는 솟을대문 위에 ‘聖臨門’ 편액을 써서 붙여 놓았다.

노송정 왼편의 안채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口’자형 건물이다. 본채 바깥쪽에 ‘온천정사’라는 편액이 걸린 곳이 사랑채이다. 안채에 앞쪽으로 불쑥 튀어나온 가로세로 2m 정도 크기의 정사각형 방이 있다. 1501년 퇴계가 태어난 방이다. 이런 돌출형 건물 형태는 전통 한옥에선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문을 열어 보니 좁은 방이 깨끗하고 청정하다. 하도 유명해서 방 바깥에 ‘퇴계선생태실(退溪先生胎室)’이라는 현판을 걸어놓았다. 사실 노송정고택에서는 퇴계 뿐만 아니라 퇴계의 부친인 이식, 숙부인 송재 이우가 태어나고 퇴계의 형과 누나 등 6남매도 태어났지만 퇴계가 워낙 큰 인물이어서 퇴계태실로 불리고 조선 유교의 성지순례 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노송정고택 안에 있는 퇴계퇴실

 

태실(胎室)은 탯줄을 끊은 장소를 가리키는데 우리 문화에서는 태실을 중시하는 전통이 있다. 지금도 조선 왕가의 왕이나 대군, 공주들의 태를 전국의 곳곳에 보존하고 있지만 왕족이 아니면서도 태실을 보존하고 있는 이는 퇴계가 유일하다. 다만 퇴계의 태실과 일반적인 왕실의 태실은 다르다. 왕족의 태실은 태어날 때 자른 태를 보존하고 있지만 이곳은 태를 보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 장소임을 알리는 태실이다. 즉 출산 방인 셈이다. 경북 민속문화재 제60호 퇴계태실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11월 국가민속문화재로 승격되었다.

 

퇴계, 온혜천 건너편 야산에 생애 첫 집 마련

퇴계는 노송정고택에서 훗날 참판이 될 숙부(이우)와 훗날 충청관찰사가 될 넷째형(이해)의 가르침 속에 학문을 닦고 수양을 했다. 1521년 첫째부인과 결혼 후 분가했으나 1526년 넷째형이 성균관에서 공부하기 위해 상경하자 형이 지은 인근의 온계종택에 들어가 5년간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그러다가 첫 부인과 사별하고 1530년 두 번째 부인을 맞아들인 이듬해 생애 첫 집을 노송정 고택 앞을 흐르는 온혜천 건너편 야산에 마련함으로써 홀어머니와 형제들로부터 독립했다. 퇴계는 자신의 첫 집을 ‘달팽이집’(芝山蝸舍·지산와사)이라 불렀다. 그는 이 집에서 15년 동안 전처 소생 두 아들 및 부인과 지내며 학문에 정진했다. 그 사이 과거에 급제하고 한양에서 벼슬살이를 했다.

한양 벼슬살이에 환멸을 느낀 퇴계는 46세 때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내려온다. 이 때 그는 두 번째 집을 짓는다. 도산면 온혜리에서 멀지 않은 토계리에 지은 양진암이다. 벼슬길에서 물러난다는 의미로 지은 호 ‘퇴계(退溪)’는 토계(兎溪)에서 따온 것이다. 이듬해에는 토계리 죽동에 터를 구해 집을 짓고 이사했다. 50세 때 죽동 위쪽에 한서암을 건축했으나 제자들이 몰리면서 불편해지자 바로 옆에 계상서당을 세웠다. 그리고 1557년 계상서당에서 3㎞쯤 떨어진 도산에 새로운 서당을 짓기 시작해 1561년 완공한 것이 도산서당이다.

 

▲온계종택

노송정고택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퇴계의 넷째 형인 온계 이해(1496~1550)의 고택인 온계종택(溫溪宗宅)이 있다. 당호는 ‘잣나무 세 그루처럼 선비의 의리를 지키라’는 뜻의 삼백당(三栢堂)이다. 온계종택은 온계 이해가 노송정 본가에서 분가한 뒤 지은 집이다. 1526년 온계가 성균관에 유학하는 동안 퇴계가 어머니를 모시고 5년간 지낸 곳이기도 하다.

온계는 어려서 작은아버지 이우에게서 글을 배웠다. 1525년 진사가 되고 152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이후 연산군~중종~인종~명종 대를 살며 대사헌, 대사간, 예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반정과 사화로 이어지는 혼란한 역사의 변곡점에서 직간을 서슴지 않아 당대 사림과 백성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인종 대에 이르러 권신 이기를 우의정으로 임명하는 것에 반대하고 탄핵한 일로 원한을 샀다. 결국 명종 즉위 후 소윤 일파가 득세하면서 모함을 당해 귀양길에 올라 도중에 병사했다.

온계종택

 

온계종택 건물이 환난을 맞은 것은 1895년 을미의병 때 온계의 12대손인 이인화가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면서 삼백당을 의병 활동의 거점으로 삼았을 때였다. 그가 300여 명의 의병을 지휘하며 크게 활약하자 일제가 1896년 삼백당을 불태워 전소시켰다. 그후 후손들은 110여년 동안 서너 군데의 지손(支孫)들 집을 전전하며 떠돌이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2011년 국가보훈처와 경북 안동시의 지원으로 삼백당을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온계종택에 다가가는데 문 앞에서 한 중년 남성이 종택 앞에 쌓여있는 흙을 고르고 있다. 알고보니 종택을 지키고 있는 온계의 17대손 이목 선생이다. 무엇을 하냐고 물어보니 종택 앞 너른 공터에 무궁화를 심을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내 회사 이름을 알게된 종손이 “우리 집안의 동생도 그 회사의 사진부장을 했다”며 친근감을 표시한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종택 안으로 들어가 사모님이 끓여준 차를 마시는 행운을 누렸다. 차를 마신 뒤 일어나려하자 종손이 최근 출간된 두툼한 ‘온계 이해 평전’을 건네준다. 퇴계의 생애 첫 집(지산와사)의 위치가 궁금해 물어보니 종손은 마을 앞을 지나는 온혜천 건너편 야산에 있었다고 알려주어 궁금함을 풀어주었다. 온계종택 입구에는 수령이 500년이나 되는 밤나무가 있다. 높이가 12m, 나무 둘레가 5.5m나 되는데 이렇게 오래된 밤나무는 흔치 않다. 500살인데도 매년 밤이 열린다니 놀라울 뿐이다.

온계종택 앞 밤나무

 

▲퇴계종택

도산서원 주차장 뒤 언덕 너머로 아스팔트길이 나 있다. 차를 타고 5분 정도 길을 따라가면 오른쪽으로 퇴계종택이 있다. 다만 시간 여유가 없다면 굳이 찾아갈 필요는 없다. 퇴계가 짓거나 잠시라도 살았던 집이 아니어서 퇴계와는 직접적으로 무관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래 가옥은 사라지고 1920년대 말 새로 지은 것이어서 과거 흔적도 찾을 수 없다. 관리가 부실한데다 플라스틱 물건들이 종택 여기저기 방치되어 있어 과거로의 여행을 방해하는 것도 신경이 쓰인다.

퇴계는 50세이던 1550년 토계천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한서암을 짓고 살았다. 그의 사후 퇴계의 손자 이영도가 한서암에서 멀지 않은 남쪽에 새 가옥을 지었다. 퇴계종택의 시작이다. 이후 대를 이어 살던 그곳에 도산서원 원장으로 있던 권두경이 문중과 회의 후 1715년 가옥 안에 사랑채인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을 지어 종택의 위엄을 갖추었다. 하지만 이 집들은 1907년 일본군의 방화로 불타버렸다. 1926~1929년 13대 종손 이충호가 문중과 유림의 지원을 받아 옛 종택의 규모와 형태를 고려해 다시 지은 집이 현재의 퇴계종택이다. 추월한수정도 그때 재건했다. 입구 대문 위에 ‘퇴계선생구택’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퇴계 묘소

 

낙동강 상류 굽어보는 건지산 남쪽 자락에 안장

도산서원 주차장 뒤 언덕 너머로 아스팔트길이 나 있다. 승용차로 5~10분 정도 길을 따라가면 왼쪽에 퇴계묘소가 있다. 묘소는 아스팔트길에서 150m 정도 위 중턱에 있다. 비탈 높은 곳에 자리 잡은 것이 신기했으나 사실 경상북도 산을 다니다 보면 산 중턱에 묘소가 많음을 알 수 있다.

퇴계는 1570년 12월 8일(음력) 별세했다. 선조는 퇴계의 부음을 듣고 퇴계를 영의정에 추증했다. 3일 동안 조회(朝會)를 멈추고 상가 철시와 죄수의 처형과 도살 그리고 음악을 금했다. 시신은 1571년 3월 낙동강 상류를 굽어보는 건지산(557m) 남쪽 자락인 도산면 토계리 하계마을 뒷산에 안장되었다.

퇴계묘소 100m 아래에 퇴계의 맏며느리 봉화김씨의 묘소가 있다. 퇴계는 생전에 친정아버지 못지 않은 자애로움으로 맏며느리를 대했다. 봉화금씨는 퇴계가 서울 생활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시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 봉화금씨는 퇴계가 숨을 거두고 2개월 뒤인 1571년 2월 세상을 떠났다. 유언을 남겼다. “시아버님 살아 계실 적에 여러 가지로 부족해 극진히 모시지 못했다. 그래서 죽더라도 다시 아버님을 정성껏 모시고 싶으니 내가 죽거든 반드시 아버님 묘소 가까이에 묻어주도록 하라.” 다만 맏며느리의 유언 얘기는 구전이어서 확실치는 않다. 그렇더라도 퇴계의 가족 중 유일하게 맏며느리의 묘소가 퇴계 묘소 아래에 있다는 것은 보통 사연이 아니다.

퇴계묘소에는 아담한 봉분과 동자석, 문인석, 묘비가 있다. 간결하고 조촐한 느낌을 준다. 묘소 앞은 트여있고 뒤는 소나무들이 묘소를 감싸고 있다. 묘소에서 주의깊게 봐야 할 것이 있다. ‘퇴도만은이공지묘(退陶晩隱李公之墓)’라고 쓰여 있는 묘비다. ‘도산에서 물러나 만년을 숨어산 진성이씨의 묘’라는 뜻이다.

퇴계묘소

 

제자들이 자신의 행적을 미화할까 염려해 자신의 인생을 정리한 명문(銘文) 남겨

퇴계는 눈을 감기 나흘 전인 1570년 12월 4일, 저승길이 가까워졌음을 직감하고 제자들을 불러모아 자신의 가르침이 올바르지 못했다고 자책했다. 그러면서 후학들이 자신의 행적을 함부로 미화할까 염려해 자신의 70평생을 4언 24구 96자(字)로 압축·정리해놓은 명문(銘文)을 쓰라고 일러주었다. 명문은 ‘生而大癡 壯而多疾 中何嗜學 晩何叨爵(생이대치 장이다질 중하기학 만하도작)’로 시작한다. ‘태어나서는 크게 어리석었고 장성하여서는 병이 많았네. 중년에는 어쩌다가 학문을 즐기게 됐고 말년에는 어쩌다 벼슬을 하게 되었네.’라는 뜻이다.

조카 이영에게도 당부의 말을 남겼다. 그 내용이 ‘퇴계집 연보’에 실렸다. “내가 죽고 난 후 조정에서 관례에 따라 예장을 하려고 청하면 사양해라. 비석은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빗돌에다 앞면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쓰고, 뒷면에는 향리·세계·지행·출처를 간략하게 서술하라. 만약 이러한 일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비명(碑銘)을 짓게 되면 기대승 같은 이는 반드시 실제로 없던 일은 장황하게 늘어놓아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나의 뜻을 적어서 미리 명문(銘文)을 지으려고 했다. 그러나 자꾸 미루어 오다가 미처 끝내지 못한 채 어지러이 흩어놓은 난고(亂稿) 가운데 숨어 있으니 찾아서 묘비의 명문(銘文)을 새기도록 해라.”

퇴계 아들 이준은 부친의 뜻을 따르려고 했지만 제자들은 스승을 세상에 드러내기를 원했다. 조정에서도 예장을 권고했다. 결국 묘비에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쓰라고 했던 퇴계의 당부는 지켜지지 않았다. 기대승 같은 이에게 비명을 맡기지 말라고 그의 이름까지 특정했는데 공교롭게도 기대승이 묘갈명을 썼기 때문이다. 묘갈명은 묘소 앞 비석에 망인의 일생을 추모하여 타인이 100자 이내로 쓴 글을 말한다.

현재 퇴계 묘비 중앙에는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는 큰글씨가, 양편에는 기대승이 쓴 ‘退溪先生墓碣銘(퇴계선생묘갈명)’이 새겨있다. 기대승은 묘비에 쓴 묘갈명에 퇴계의 명문을 앞에 소개했다. 묘비 글씨는 당대의 명필인 금보가 썼다. 현재 비는 1905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일반적으로 묘비석이 묘의 앞에 있는데도 퇴계 묘비는 묘 오른쪽에 있다. 퇴계의 당부를 지키지 않아서 퇴계의 눈치를 봐야했기 때문이란다. 다만 묘비에 관직은 새기지 않았다.

퇴계묘비 실물(왼쪽)과 탁본

 

■오천군자마을

 

안동에서 35번 국도를 따라 20㎞ 정도 북상하면 오른쪽 길가 자연석에 군자리라는 표석이 보인다. 그곳에서 100m정도 굽은 길을 따라 들어가면 대형 주차장과 함께 20여 채의 고택이 나타난다. 500~600년 전 광산김씨 김효로가 정착한 후 형성된 광산김씨 집성촌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에 속한다. 조선 중기 안동 부사였던 정구(1543~1620)가 “오천 한 마을에는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라고 한 말에서 군자마을로 불렸다.

마을은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골짜기와 호수여서 풍광이 아름답다. 마을 분위기도 다수 학자들을 배출한 마을에 걸맞게 단아하다. 기와집들은 광산김씨 예안파가 600여 년 동안 세거해 온 건축물이다. 고택은 종택 별당인 후조당, 전통 조리서 ‘수운잡방’의 저자인 김유 고택과 김유가 세운 정자(탁청정) 등 20여 채나 된다. 1974년 안동댐 조성에 따른 수몰을 피해 2㎞ 떨어진 지금 위치로 옮겨놓았다.

탁청정은 정면3칸 옆면2칸의 누각 건물이다. 정자 이름은 김유 호에서 따왔고 현판은 한석봉이 쓴 글씨라고 전한다. 후조당은 광산김씨 예안파 종택에 딸린 별당이다. 현판은 스승인 퇴계가 썼다. 탁정정과 후조당은 국가지정 민속문화재이고 다른 건물은 경상북도 문화재인데 국가지정과 도지정 문화재가 왜 품격이 다른지 그 이유를 알게 해준다.

오천군자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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