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베트남 패전(1975년) 상황 떠오르게 한 아프가니스탄 정부 항복… 그때도 부패한 정부, 무능한 군대, 미국의 철군(撤軍)이 원인이었다
2021년 8월 17일 · zznz

↑ 남베트남 대통령궁 정문을 부수고 들어간 북베트남군 탱크 (1975년 4월 30일)
by 김지지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2021년 8월 15일 이슬람 무장 조직 탈레반에 항복했다. 대통령은 해외로 달아났다. 이로써 2001년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20년 만에 베트남 전쟁에 이어 미국의 ‘실패한 전쟁’으로 막을 내리게 됐다. 아프가니스탄에 남아있던 우리 교민과 대사관 직원도 8월 17일 카불에서 빠져나왔다. 전문가들은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상황이 1975년 4월의 베트남 상황과 유사점이 많다고 설명한다. 당시 베트남의 상황이 어땠는지를 살펴본다.
남베트남 정부의 오판과 군대 내 부정부패가 패전의 결정적 원인
1973년 1월의 파리평화협정에 따라 미군이 철수했어도 베트남 정부는 별다른 위기감을 보이지 않았다. 미군이 남기고 간 최신 무기와 58만 명의 베트남 병력, 여기에 미국과의 방위조약이 시퍼렇게 살아 있어 식량과 물자 부족에 시달리는 북베트남(월맹)이 남침하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북베트남군이 도발하면 조약에 따라 미군이 즉각 개입해 폭격을 재개할 것이고 미국의 북베트남 경제 원조도 중단될 것이며 베트남군의 기동력과 화력으로 그들의 공세에 맞설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대다수 베트남인이 느끼지 못했을 뿐 베트남은 밑둥부터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베트남의 정치권은 1975년 9월에 있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극심한 혼란상을 보이며 끊임없이 분열, 반목, 대립하고 승려와 학생, 반전운동가와 인권운동가 등은 연일 구엔 반 티우(응우옌반티에우) 정권 타도를 외치며 혼란을 부채질했다. 그들 가운데는 티우 정권의 부정부패와 사리사욕을 참지 못하고 정의감에 길거리로 나온 사람들도 많았지만 베트남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골수 공산주의자들도 적지 않았다. 뇌물, 마약, 매춘, 도박도 전염병처럼 전국을 휩쓸었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군대 내 부정부패였다. 58만 명의 군인 중 10만여 명이 뇌물로 비공식 장기휴가를 떠나거나 부유층 집안의 자식들은 형식적으로 입대만 하고 바로 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는 군인들을 가리켜 ‘유령 군인’, ‘꽃군인’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베트남이 혼란에 빠져 있을 때 북베트남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북베트남은 미국의 반응을 시험해볼 겸 1차 목표로 사이공 북방의 한 성을 점령했다. 그런데도 베트남군의 반격은커녕 미국의 군사적 반응도 없었다. 미국은 북베트남이 파리평화협정을 위반했다고 비난만 할 뿐 철군 당시 남베트남에 약속했던 군사적 지원은 하지 않았다.
미국의 불개입을 확신한 북베트남은 1975년 2월 참모총장 반 티엔 둥 장군과 파리평화조약 당시 북베트남의 협상 당사자인 레 둑 토를 비밀리에 남베트남 중부지역으로 파견해 현지에서 전투를 지휘하도록 했다. 수만 명의 북베트남군도 군사분계선을 피해 라오스․캄보디아 국경과 접해 있는 ‘호찌민 루트’를 따라 베트남 영내로 잠입했다.
반 티엔 둥 장군의 잠행은 훗날 전설이 되었다. 북베트남의 하노이에서는 둥 장군의 이름으로 계속 메시지가 발신되고 있고, 하노이 사령부 앞에는 매일 아침 둥 장군의 승용차가 멈춰서는 등 마치 둥 장군이 하노이에 있는 것처럼 꾸며댔다. 하노이 주재 외국 정보원들은 이런 기만전술을 눈치채지 못한 채 연일 엉터리 보고서를 본국으로 타전했다. 그 사이 둥 장군은 사이공 진격이 바로 가능한 중부 고원의 전략 요충지 반메투오트시(市) 부근 밀림지대에서 북베트남군을 지휘했다. 당시 베트남은 북베트남군이 북위 17도선에 있는 군사분계선을 넘어 공격해 올 것으로 예상하고 북쪽 해안 도시 다낭에 병력을 집결시켰다.

북베트남군, 아무런 저항 없이 사이공에 입성
북베트남군은 1975년 3월 10일 새벽 2시를 기해 반메투오트를 공격·점령했다. 이른바 춘계 대공세였다. 뒤이어 군사분계선 쪽으로 북상해 중부 지역의 남베트남군을 포위하자 티우 대통령은 3월 15일 중부 고원지대를 포기했다. 이 때문에 베트남 영토의 절반이 고스란히 북베트남군으로 넘어갔다. 북베트남군은 여세를 몰아 3월 26일 중부 최대 거점도시 다낭을 점령하고, 3월 31일 세 번째 큰 도시 퀴논까지 함락했다. 이 과정에서 베트남군의 절반이 도주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이를 지켜본 군사전문가들은 미국의 무모한 1973년 철수를 “역사상 가장 무책임한 결정, 파렴치한 작태”라고 비난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북베트남군은 4월부터 해안가 주요 거점들을 하나 둘 잠식한 후 최종 목표인 사이공으로 모든 병력을 집결시켰다. 18개 사단이 하루 50㎞씩 강행군하며 사이공으로 접근해 가고 있던 4월 19일 사이공 주재 미 대사관에 “2주일 안에 철수하라”는 명령이 본국에서 떨어졌다. 그날 사이공 근처의 가장 큰 공군기지가 4일 동안의 집중 포격을 당한 끝에 북베트남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4월 21일 모든 재산을 이미 해외로 빼돌린 티우 대통령이 사임을 발표했다.

춘계 대공세가 시작된 지 40여 일 만에 남베트남 대부분의 성이 함락되거나 포위된 상태였기 때문에 사이공만 고도(孤島)로 남았다. 당시 사이공에는 10만 명의 베트남군이 있었으나 가동 병력은 고작 3만 명 뿐이었고, 그나마 전의도 상실한 상태였다. 바야흐로 사이공 함락은 시간 문제였다. 그런데도 북베트남군은 미국인이 철수할 때까지 공격을 미뤘다. 자칫 미국이 다시 대규모 폭격을 가해올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끝장난 전쟁에 굳이 미국을 다시 불러들일 필요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사이공 근교에 펼쳐진 방어선은 모두 무너뜨렸다. 결국 각국의 대사관들도 철수를 시작했다.
티우의 뒤를 이어 두옹 반 민 장군이 대통령에 취임한 4월 28일 아침, 북베트남군이 사이공 주택가에 몇 발의 로켓포를 발사했다. 철수를 서두르라는 메시지였다. 북베트남군은 어느덧 1시간 만에 사이공에 닿을 수 있는 지점까지 다가와 있었다. “24시간 내에 항복하라”는 방송이 사이공으로 전해지는 순간 사이공은 무법천지로 빠져들었다. 그 무렵 미국은 수십 척의 전함을 먼 바다에 배치해 철수를 지원했다. 사이공의 주요 건물 옥상에서는 미국의 헬리콥터 60여 대가 쉴 새 없이 사람들을 전함으로 실어날랐다.

4월 30일 오전 4시 30분 마틴 미 대사가 떠나고 7시 53분 11명의 미 해병대원이 대사관의 성조기를 챙기고 마지막으로 베트남을 떠났다. 북베트남군은 아무런 저항 없이 사이공에 입성했다. 정오경 탱크 1대가 대통령궁을 밀치고 들어가더니 한 병사가 발코니로 뛰어올라가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의 깃발을 게양했다.
보는 이에 따라 감회가 달랐다. 베트남이 망했다는 사람, 베트남이 하나가 되었다는 사람 등 반응이 제각각이었다. 미국이 참전했던 가장 긴 전쟁이었으면서도 공식적으로는 전쟁이라고 한 번도 부른 적이 없는 미국에도 베트남전쟁은 비극이었다. 손익계산서는 처참했다. 1400억 달러(당시 금 1온스가 36달러, 원유 1배럴이 2달러)에 달하는 전비에 5만7000명의 젊은이가 이국 땅에서 숨졌다.
이대용 공사 등 베트남 주재 한국 외교관 3인의 억류와 석방
1975년 3월 북베트남군이 베트남에 대해 총공세를 시작하고 사이공마저 함락의 위기에 놓이자 우리 정부는 공관원에 대해 철수를 지시하고 교민들에게도 자진철수를 독려했다. 또 비밀리에 해군 군함(LST)을 남베트남에 보내 구호물자를 전달하고 교민과 피난민을 수송하기 위한 ‘십자성 작전’도 전개했다. 1975년 4월 현재 남베트남에는 외교관 21명(가족 59명)과 교민 1009명, 그리고 농업·의료·수자원 관련 사절단 45명 등 총 1134명의 우리 국민이 남아 있었다. 주베트남 대사관은 4월 26일 한국에서 파견한 2척의 LST함에 교민들을 실려보낸 뒤 추이를 살피다가 상황이 더욱 급박해지자 전원 철수를 결정했다. 4월 28일, 국기를 내리고 통신기기와 비밀서류를 소각했다. 그러는 사이 사이공의 탄손누트 국제공항이 갑자기 폐쇄되었다. 결국 남아 있는 교민들은 미군 헬기에 의존해야 했다.
4월 29일, 교민들이 미 대사관 후문 헬기장으로 몰려갔으나 미 대사관은 이미 몰려든 3000여 명의 각국 난민들로 북새통이었다. 다행히 미군 헬기가 오후 4시부터 각국의 난민들을 부지런히 실어나른 덕에 상당수의 교민도 사이공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교민 탈출을 위해 미국 측과 만반의 준비를 다 갖췄다고 판단한 김영관 대사 일행은 오후 6시쯤, 헬기를 타고 미 대사관을 떠났다.
마침내 운명의 날 4월 30일이 밝았다. 밤샘한 일부 교민이 새벽 무렵 헬기로 미 대사관을 벗어나고 마지막 남은 9명의 공관원과 165명의 교민이 가슴을 졸이며 차례를 기다렸다. 그런데 이륙하는 헬기만 보일 뿐 착륙하는 헬기는 보이지 않았다. 유일한 생명선인 미군 헬기가 더 이상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교민 일부는 인근 항구로 달려가 돈을 주고 배를 빌려 베트남을 탈출했다. 그렇지 못한 나머지 교민들은 베트남에 갇히거나 남았다.
문제는 남베트남을 도운 9명의 외교관이었다. 그들 중 1명은 베트남에서 탈출하고 5명은 1년 뒤 5월 월맹 정부의 출국허가를 받고 사이공을 빠져나왔다. 다만 중앙정보부 소속의 이대용 공사와 안희완 2등 서기관, 그리고 서병호 경찰 총경 등 3명은 체포되어 악명 높은 치화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이대용 공사는 1963년부터 대사관 무관(대령)으로 재직하며 국군의 베트남 파병 업무를 수행하고, 1968년 준장 진급 후 대사관 공사로 또다시 근무하던 중이었다. 그는 북베트남군 심문관들로부터 “북한으로 가겠다는 망명각서를 쓰라”고 수차례 회유와 협박을 받았으나 그때마다 “북한으로 압송될 경우 손목 동맥을 끊어 자살하겠다”며 버텼다.

우리 정부는 우방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등 3인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베트남 당국의 대답은 자신들은 외교관 석방을 반대하지 않지만 북한이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1977년 11월 프랑스 정부가 중재에 나서 남·북·베트남 3자 비밀협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78년 7월 인도 뉴델리 주재 베트남 대사관에서 제1차 3자 예비회담이 개최되고 여섯 차례의 예비회담 이후 1978년 7월 제1차 본회담이 개최되었다. 그러나 14차례의 비공개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북한의 계속된 억지로 양측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 회담은 결국 1979년 5월 성과 없이 종료되었다. 외교관들을 구할 수 있는 한 줄기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이 무렵 긍정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에 대해 북한이 베트남을 비난하면서 양측 관계가 급랭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정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 베트남 정부와 관계가 깊었던 아이젠버그라는 이스라엘 국적의 사업가를 통해 외교관 석방을 이뤄냈다. 그 결과 외교관 3인은 억류 5년 만인 1980년 4월 12일 평양이 아닌, 꿈에도 그리던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