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금・달러 태환정지 선언한 ‘닉슨 쇼크’… 세계를 향한 선전포고였지만 어느 나라도 감히 미국에 항의하지 못해

↑ 리처드 닉슨 대통령

 

1944년, 금·달러 본위 체제를 의미하는 ‘브레턴우즈 체제’의 탄생

세계 최초로 금본위제를 채택한 나라는 1819년의 영국이다. 금본위제는 중앙은행이 금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금을 해당 국가의 화폐로 바꿔주는 제도다. 19세기 말까지 독일, 프랑스, 미국 등이 영국을 따라 금본위제를 채택했지만 당시만 해도 영국이 세계 무역의 60%를 차지하고, 런던 금융시장이 세계 금융시장의 절반을 소화하고 있어 영국의 파운드화가 사실상 금을 대체하는 대표적 수단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1차대전이 일어나고 각국이 전쟁비용을 마련하느라 돈을 많이 찍어대면서 각국의 통화는 물론 파운드화까지 가치가 떨어져 금본위제를 유지하는 데 무리가 따랐다. 결국 영국은 1914년 금본위제 포기를 선언하고 급기야 1931년 “파운드화를 가져와도 바꿔줄 금이 없다”며 금 지급 불가를 선언했다. 미국도 대공황기인 1933년 금본위제를 폐지했다.

그렇다고 금을 화폐로 사용할 수는 없어 2차대전 말 각국은 새로운 국제통화제도를 모색했다. 피폐된 경제를 부흥시키고 교역을 확대하는 게 1차 목적이었다. 이를 위해 1944년 연합국 44개국 대표들이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턴우즈에 모였다. 7월 1일부터 22일까지 진행된 회의에서 ‘IMF(국제통화기금)’와 ‘IBRD(국제부흥개발은행)’ 창설이 결정되었다.

또한 당시 세계 금의 74%를 보유하고 있는 미국의 달러를 세계의 중심 통화로 삼고, 각국의 통화를 달러에 고정시키는 ‘고정환율제’를 채택하기로 했다. 금 1온스(28.3495g)를 35달러로 고정하고 그 외의 다른 나라 통화를 달러에 고정시키기로 한 것이다. 이른바 금·달러 본위 체제를 의미하는 ‘브레턴우즈 체제’의 탄생이었다. 이로써 파운드 시대는 가고 달러 시대가 도래했다. 이후 달러의 위상은 국제무역거래나 대외채무에 대비한 준비통화로서 크게 강화되었고, 미국 경제는 풍부한 달러를 기반으로 국제 무역을 좌지우지했다. 세계 경제도 덩달아 호황을 구가했다.

 

미국이 국내통화이면서 유일한 국제통화였던 달러를 마구 찍어댄 게 원인

문제는 미국이 국내통화이면서 동시에 유일한 국제통화였던 달러를 마구 찍어댄 데 있었다. 달러는 국내 투자는 물론 공산화를 막기 위한 개도국 지원과 베트남전 군사비로 펑펑 쓰였다. 국내 복지비용 지출도 만만치 않았다. 미국의 인플레를 막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싼 물건을 구입할 때도 달러가 사용되었다. 결국 호황기가 끝난 1960년대 후반 문제가 불거졌다. 이후 미국에는 성장은 더딘 데 실업이 늘고 물가가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흑자에서 적자로 곤두박질친 무역수지도 주요 원인이었다. 국제수지 적자를 줄이려면 수입을 줄이고 수출을 늘려야 하는데 그러러면 달러화 가치를 낮추고 금 가격을 올려야 한다. 하지만 그럴 경우 달러화의 위신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미국은 국제수지 흑자국인 일본과 독일 등에 통화를 절상토록 압력을 가했다. 두 나라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세계 각국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고 달러를 시장에 쏟아냈다.

1971년 4~6월 사이에 140억 달러가 시장에 나와 달러가 폭락하고 금값이 요동을 쳤다. 먼저 서독이 불안을 느껴 1971년 5월 브레튼우즈 체제를 탈퇴했다. 다른 나라들도 동요하며 달러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스위스가 7월에 5000만달러를 금으로 바꾸어갔다. 프랑스도 1억 9100만달러를 금으로 태환해갔다. 8월에는 스위스가 브레튼우즈 체제를 떠났다. 급기야 1971년 8월 9일 영국마저 미국에 30억 달러를 금으로 바꿔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적자 누적에 달러 유출과 금 준비고의 감소로까지 이어져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미국은 달러와 금의 연결고리를 떼어놓을 수밖에 없었고, 결국 기축통화인 달러화를 마치 실 끊어진 연처럼 세계 외환시장에 던져버렸다. 1971년 8월 15일, 닉슨 미 대통령이 긴급성명을 통해 “달러화의 금태환(金兌換) 정지”를 선언함으로써 세계를 겉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뜨린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브레턴우즈 체제’에서 달러 가치는 금 1온스당 35달러로 고정되어 있어 미국 중앙은행은 35달러를 가져오면 금 1온스와 바꿔줘야 하는데 갑작스럽게 “달러를 더 이상 금으로 바꿔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또한 모든 수입품에 10%의 관세(수입과징금)를 매겨 외국 제품의 가격 경쟁력 약화를 유도했다.

 

달러를 순식간에 ‘그림 딱지’로 만들어버린 닉슨 쇼크는 세계를 향한 선전포고

닉슨의 선언은 타국의 통화 특히 무역흑자가 정착되기 시작한 일본의 엔화와 서독 마르크화의 통화절상을 노리고, ‘브레턴우즈 체제’의 고정환율제를 변동환율제로 바꾸려는 포석이었다. 결국 ‘닉슨 쇼크’로 인해 1944년부터 27년간 세계 경제를 지탱해온 ‘브레턴우즈 체제’의 금·달러 본위제와 이에 근거한 고정환율제도는 붕괴되었다.

닉슨의 신경제정책은 엄청난 연쇄작용을 낳았다. 닉슨 발표 10일 만에 일본은 달러화에 대한 엔화의 변동 환율을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그 즉시 달러화 대비 엔화 가치가 7% 급등했고 여기에 10% 관세까지 더해져 미국으로 수출되는 일본 제품의 가격이 삽시간에 17%나 오르게 됐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만 해도 1971년 3분기에 전년 대비 11.3%였던 경제성장률이 그해 4분기엔 6%로 반 토막이 났다. 막대한 부채를 껴안고 있었던 국내 기업들은 대외 충격으로 휘청거렸다. 급기야 정부는 금리를 내리고 기업과 사채권자의 채권·채무관계를 전면 무효화하는 ‘8·3 긴급경제조치’를 단행했다.

달러를 순식간에 ‘그림 딱지’로 만들어버린 닉슨의 긴급 경제조처는 결국 세계를 향한 선전포고였지만 어느 나라도 감히 미국에 항의하지 못하고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그래서 출범한 것이 ‘스미스소니언 체제’다. 이 체제는 1971년 12월 18일 선진 10개국 재무장관이 미국 워싱턴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모여 격렬한 논의 끝에 새로운 국제통화조정협정에 서명한 데서 출발한다.

과도체제이긴 하지만 협정에 따라 미국은 달러를 다시 금으로 바꿔주는 대신 금값을 올리기로 했고, 다른 국가들은 달러 가치의 하락을 용인했다. 이로써 금에 대한 달러의 평가가 금 1온스당 35달러에서 38달러로 7.895% 절하되어 주요국 통화가 달러화에 대해 절상되고, 환율변동 폭도 상하 각 2.25%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스미소니언체제는 달러화의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인정하고 고정환율제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통화제도 개혁은 아니었다. 다만 금환본위제가 폐지되어 달러화가 금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브레턴우즈체제와 달랐다.

스미소니언체제는 달러를 기축통화로 받아들임으로써 달러본위제를 채택했다. 이에 따라 금태환의 폐지가 공식화되었고, 주변국들이 보유하고 있던 막대한 금액의 달러화는 전적으로 미국 정부의 신용에만 의존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끈 떨어진 연처럼 금과 달러의 연결고리가 끊어짐으로써 금에 대한 달러의 가격은 자유롭게 변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곧 달러화의 가치가 영국의 파운드, 프랑스의 프랑, 독일의 마르크, 일본의 엔 등의 통화에 대해 자유롭게 변동하게 됨을 의미했다.

 

세계 주요국들, 환율을 시장의 가격 형성 메커니즘에 맡기는 변동환율제 채택

스미소니언체제가 출범하자 미국은 국제금융질서가 혼란상황을 벗어나 안정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미국의 바람과는 달리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이번에도 위기의 진앙지는 미국이었다. 1972년 미국의 무역수지는 닉슨의 발표로 달러화가 10% 정도 평가절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선되기는커녕 악화일변도를 걸었다. 마치 브레이크가 파열된 자동차처럼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는 해가 갈수록 늘어났고, 늘어나는 만큼 달러화의 신인도는 추락했다.

1972년 서독의 무역수지가 큰 폭의 흑자를 보이면서 대규모 단기자본이 미국에서 빠져나갔다. 이렇게 되자 더 이상 달러화의 가치를 고정환율제의 틀 안에 묶어두기 어려워졌다. 1973년 1월 스위스 중앙은행이 고정환율제를 폐기하고 변동환율제를 채택하면서 스미소니언체제는 붕괴의 길로 들어섰다. 이런 가운데 1973년 2월 미국이 다시 한 번 달러화를 평가 절하하자 국제 금시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국제 금시장의 금값이 온스 당 38달러에서 42.22달러로 치솟으면서 주요국의 통화가 약 10% 평가절하되었다.

이렇게 되자 1973년 2월 중순에서 3월 초순 사이 대규모의 단기 자본이 미국에서 유출되어 서독을 비롯한 강세 통화국으로 이동했다. 유럽 국가들은 이를 계기로 달러화에 대한 믿음을 철회하고 변동환율제를 채택하기 시작했다. 서유럽 국가들이 변동환율제를 채택하자 고정환율제에 기초한 스미소니언체제는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져들었다.

변동환율제는 시대의 대세가 되었고, 스미소니언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국제통화제도가 필요해졌다. 스미소니언체제의 설립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IMF가 중심이 되어 새로운 통화제도 수립을 위한 논의를 이끌었다.

1976년 1월 자메이카의 수도 킹스턴에서 개최된 IMF 제5차 잠정위원회에서 각국에 환율제도의 선택재량권을 부여하기로 결정(킹스턴 합의)한 것은 이미 폐기된 ‘브레턴우즈 체제’에 대한 확인사살이었다. 이후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주요국 사이에서 환율조정이 일어나 주요국들은 환율을 시장의 가격 형성 메커니즘에 맡기는 변동환율제를 채택했다.

 

‘플라자 합의’, 일본 경제와 사회에 엄청난 변화 몰고 와

1973년과 1979년 두 차례 발생한 오일 쇼크로 달러 가치는 더 떨어졌고 금값은 상대적으로 치솟았다. 온스당 가격은 35달러에서 최고 800달러까지 치솟았다. 그후 미국이 강력한 긴축정책을 펴면서 금리를 두 자리 수준으로 끌어올리자 세계의 자금이 미국으로 다시 집중되는 듯했다. 그러나 엄청난 무역수지 적자와 재정적자(이른바 쌍둥이 적자)가 좀처럼 해결되지 않아 달러는 매력을 다시 잃기 시작했고 금값은 다시 온스당 450달러까지 폭등했다. 1984년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국내총생산(GDP)의 3.5% 안팎으로 사상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반면 일본과 독일은 미국을 상대로 막대한 무역흑자를 챙겼다.

그러자 1985년 9월 22일 미국, 독일, 프랑스, 일본, 영국 등 G5(선진5개국)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이 뉴욕 플라자호텔에 모여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 개선을 위해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의 평가절상(달러가치 하락)을 유도하는 데 합의했다. 환율이 의도한 대로 떨어지지 않을 경우 5개국 정부가 ‘협조 개입’을 통해 시장을 인위적으로 조정한다는 이른바 ‘플라자 합의’였다.

플라자 합의 결과, 합의 직전 달러당 240엔대이던 환율은 합의 후 3개월 만에 달러 당 200엔대로 떨어졌다. 1987년 말에는 다시 그 절반 수준인 달러당 121엔까지 떨어졌다. 독일 마르크화도 달러당 2.85마르크대에서 1987년 말에는 달러당 1.57마르크대로 45% 정도 떨어졌다. 당시 우리나라의 원화는 달러화에 연동되어 움직이고 있어 엔화 절상은 우리에게 수출 경쟁력 제고라는 호재를 가져다 주었다. 그래서 나온 게 한국경제의 3저(저금리·저유가·저달러) 호황이었다.

엔화 가치의 급격한 상승(엔화 절상)은 일본 경제와 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다. 일본 기업들은 엔화가치의 상승에도 불구하고 미국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출품의 달러 가격을 올리지 않았다. 수출품의 달러 가격은 같은데 달러 가치가 절반으로 떨어졌으니 일본 기업의 채산성이 악화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일본 중앙은행은 고통받는 기업들의 이자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저금리 정책을 취했다. 5%이던 정책금리는 1년 반 만에 2.5%로 떨어졌다. 그 틈을 타 은행들은 기업뿐만 아니라 개인에게도 마구 돈을 풀었다. 돈은 부동산과 주식 투기로 몰렸다. 1990년대 일본의 장기불황을 촉발한 버블(거품)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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