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다니엘 바렌보임 (출처 바렌보임 홈페이지)
by 김지지
만해 한용운의 삶과 정신을 기리는 만해평화대상의 2021년 수상자로 음악을 통해 중동 평화를 기원해온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 다니엘 바렌보임이 선정됐다. 그가 누구이고 왜 ‘평화의 사도’로 불리게 됐는지를 알아본다.
어려서부터 ‘음악의 신동’으로 불리고 두각 나타내
다니엘 바렌보임(1942~ )은 러시아에서 일어난 유대인 핍박(포그롬)을 피해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두각을 나타내 ‘음악의 신동’으로 불렸다. 8살 때인 1950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첫 피아노 독주회를 열고 10살(1952) 때는 유럽에서 공식 연주회를 멋지게 치러냈다. 12살 때인 1954년 당시 베를린필 지휘자 푸르트벵글러의 눈에 띄어 피아노와 지휘 공부를 병행했다.

지휘자 이력은 19살이던 1961년 이스라엘에서 시작했으나 공식적으로는 1966년 잉글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녹음하며 지휘자로 데뷔했다. 30대부터는 파리 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1975~1989), 시카고심포니 수석 지휘자(1991~2006)로 활동했다. 2000년부터는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의 음악감독 겸 종신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 겸 종신지휘자도 맡고 있다.
1967년 뛰어난 연주력에 빼어난 외모를 가진 영국의 유망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와 결혼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 뒤 프레는 사랑을 위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종교까지 유대교로 바꿔가며 ‘키 작은 유대인’ 바렌보임과 결혼한 순정한 여인으로 세상의 칭송을 받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발성 근육경화증’이라는 희귀병에 걸려 1973년 무대에서 내려오고 1987년 42세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바렌보임에게 “아내를 돌보지 않는 못된 남자”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바렌보임은 1988년 재혼했다. 게다가 바렌보임이 “나는 하루 2시간 이상 피아노 연습을 하지 않는다”고 공공연히 발언하면서 “잘난 척하는 인간”이라는 낙인까지 찍혔다.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는 1990년대 들어 바렌보임이 일련의 활동을 보이면서 사라졌다. 일련의 활동이란 인종과 국가를 뛰어넘으려는 음악가로서의 결연한 자세를 말한다.

이스라엘인과 아랍인의 화해 목적으로 ‘서동시집 오케스트라’ 결성
그에게 힘을 실어준 것은 팔레스타인 출신의 사상가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였다. 두 사람은 1999년 독일 바이마르 주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스라엘인과 아랍인의 화해를 목적으로 한 ‘웨스트-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West-Eastern Divan Orchestra)’를 독일 바이마르에서 결성했다. 오케스트라 이름은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사랑을 읊은 ‘웨스트-이스턴 디반’ 즉 ‘서동시집(西東詩集)’에서 땄다.
중세 페르시아 시인 하피즈의 문학에 매료된 괴테는 칠순이던 1819년 ‘서동시집’을 펴냈다. 괴테는 시집을 펴내면서 “자신을 알고 다른 사람을 아는 이라면 알게 되리라. 동방과 서방이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음을”이라고 노래했다. 바렌보임과 사이드는 괴테가 당대 문인들 중 드물게 동양 문학에 관심을 보이고 아랍어를 배우는 등 실질적 노력을 했다는 점을 감안해 이름을 지었다.
바렌보임은 엄정한 오디션을 통해 청소년 단원을 뽑으면서 아랍인과 유대인의 비율을 가능한 한 똑같이 맞춰서 선발했다. 단원들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물론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이집트 출신 100여 명의 젊은 연주자들로 구성했다. 2021년 현재 단원도 40%는 이스라엘, 40%는 아랍, 20%는 유럽인이다.
두 사람은 2002년 오케스트라 본부를 스페인 세비야에 마련했다. 2004년에는 세비야를 거점으로 ‘바렌보임-사이드 재단’을 설립했다. 세비야는 이슬람이 지배하던 수 세기 동안 유대인과 무슬림이 공존했던 곳이다. 바렌보임이 주장하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공존은 팔레스타인이 국가로서 모든 권력을 가지면서 이스라엘·요르단과 연방 정부를 이루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박해받는 소수’에서 ‘핍박하는 다수’로 변했다고 판단해 팔레스타인 편에 서
사실 바렌보임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조국을 위해 행동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친 이스라엘 음악가였다. 1967년과 1973년 중동전쟁 때도 이스라엘로 달려가서 연주회를 열었던 ‘애국 청년’이었다. 그가 팔레스타인 편에 서게 된 것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스라엘이 ‘박해받는 소수’에서 ‘핍박하는 다수’로 변했다고 판단하면서였다.
2001년 7월 7일,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오케스트라가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공연할 때 바렌보임은 주최 측과 사전 상의 없이 리하르트 바그너 작곡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을 기습적으로 지휘하는 방식을 통해 건국 후 이스라엘에서 이어져온 ‘바그너 금지’ 전통에 도전했다. 생전 바그너가 반유대주의자이고 히틀러가 바그너를 열렬히 추종한 탓에 이스라엘인들에게 바그너는 연주도 감상도 ‘금기(禁忌)’였다. 그럼에도 바렌보임이 바그너의 곡을 과감히 연주하자 방청석에서는 박수갈채와 욕설이 동시에 쏟아져 나왔다.
바렌보임은 2004년 이스라엘의 울프재단이 주관하는 울프상의 예술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시상식에는 이스라엘 대통령과 울프재단 이사장인 교육문화체육부 장관이 참석했다. 시상이 끝나고 수상 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바렌보임은 과거 이스라엘의 독립선언문이 적혀있는 쪽지를 꺼내들었다. 선언문에는 “모든 접경국 그리고 그 국민들과 평화와 우호를 유지할 것을 약속한다”고 적혀 있었다.
바렌보임은 선언문을 읽고 나서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현재, 남의 땅을 점령하고 그 국민을 지배하는 것이 독립선언문의 정신에 부합한가. 독립이라는 미명 하에 다른 나라의 기본권을 희생시키는 것이 합당한가. 우리 유대 민족이 고난과 박해의 역사를 보냈다고 이웃 국가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그들의 고통을 모르는 척하는 것에 면죄부가 주어지는가.”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장내가 술렁였다. 화가 난 교육문화부 장관이 바렌보임을 비난했으나 바렌보임은 한 술 더 떠 “상금을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을 위한 음악교육을 위해 기부하겠다”고 말했다.

아르헨티나와 이스라엘 그리고 팔레스타인 시민권까지 가진 세계 유일 인물
2005년 8월에는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팔레스타인 분쟁의 한복판이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임시 행정수도인 라말라에서 감동적인 콘서트를 개최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의 화합을 위한 음악적 노력을 계속 이어갔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사고에 대비해 무장군인들이 공연장을 에워싼 가운데 진행된 콘서트에서는 모차르트의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 호른을 위한 협주교향곡’과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이 연주되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2007년 팔례스타인 정부로부터 명예시민권을 받았다. 이로써 그는 고국 아르헨티나와 핏줄인 이스라엘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시민권까지 가진 지구상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2011년 5월에는 유럽 음악가 20여명과 함께 이스라엘이 공습을 퍼부은 가자지구에 들어가 모차르트 작품 두 곡을 연주했다.
바렌보임은 우리나라도 두 번 방문했다. 1984년 파리 오케스트라, 2011년 서동시집 오케스트라와 함께 내한했다. 2011년에는 8월 10일부터 4일 동안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베토벤 교향곡 전곡(全曲)을 연속 공연함으로써 화제를 일으켰다. 무엇보다 국내 음악팬을 감동시킨 것은 8월 15일 경기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 야외공연장에서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연주하고 조수미 등 국내 성악가와 120여명의 연합합창단이 서동시집 오케스트라 연주에 맞춰 4악장 ‘환희의 송가’를 노래한 것이다.

2011년 공연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아 “지휘자가 심술을 부리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현악과 관악이 맞지 않는 등 거친 면이 있다” “전반적으로 기량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8월 14일 공연 때는 ‘교향곡 2번’ 1악장을 지휘한 뒤 공연장 온도가 23도인데도 ‘덥다’며 무대에서 퇴장, 15분간 돌아오지 않아 빈축을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