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마르셀 뒤샹이 출품한 ‘소변기’(작품명 ‘샘·fountain’)는 이전 사고를 향한 도발이자 회화의 관습에 대한 조롱이었다

↑ 마르셀 뒤샹

 

전시에 거부당한 소변기, 어디론가 사라져 사진만 있고 진품은 없어

1917년 4월 10일 미국의 독립미술가협회가 주최하는 첫 전시회가 뉴욕의 그랜드 센트럴 팰리스 전시장에서 개막했다. 독립미술가협회는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젊은이들의 집단으로 현대미술에 보수적이고 경직된 태도를 보이는 국립디자인아카데미와 정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따라서 개최 사실만으로도 미국의 기존 예술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전시회는 누구든 6달러만 내면 무심사로 출품할 수 있었기 때문인지 1,200여 명의 예술가들이 2,100여 점을 출품해 대성황을 이뤘다.

협회 이사이자 조직위원이기도 한 마르셀 뒤샹(1887~1968)도 배관 업체에서 남성용 소변기를 구입해, 제조업자의 이름 리처드 머트에서 딴 ‘R.Mutt 1917’이라고 소변기에 적어 넣고 개막 이틀 전 ‘샘(fountain)’이라는 제목으로 출품했다.

‘머트(R.Mutt)’가 뒤샹이라는 사실을 알 리 없는 주최 측은 소변기가 출품된 것에 당황하며 전시 여부를 두고 갑론을박했다. 위원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한 뒤샹은 자신이 작가임을 감춘 채 출품비를 낸 예술가는 작품을 전시할 권리가 있다며 전시를 주장했다. 하지만 다수가 소변기를 미술품으로 볼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려 소변기 전시는 물거품이 되었다.

뒤샹은 이 결정에 항의하는 뜻으로 협회 위원직을 사임하고, ‘맹인(The Blind Man)’지 1917년 5월호에 실린 ‘미국인에게 보내는 공개장’이라는 글을 통해 위원들의 무지를 질타했다. “혹자는 그것이 부도덕하고 상스럽다고 말하지만 머트의 작품은 부도덕하지 않다. 머트가 그것을 자기 손으로 제작했는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이 소재의 새로운 개념을 창출해냈다”며 “미국의 문화라는 것이 변기와 교량밖에 없지 않는가”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뒤샹의 소변기가 함축한 것은 ‘예술은 더 이상 풍경이나 인물을 손으로 재현하는 테크닉이 아니다’라는 메시지였다. 즉 ‘예술가의 선택’도 예술의 범주에 속한다는 새로운 해석이었다. ‘제작’으로만이 아니라 작가의 ‘선택’만으로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뒤샹의 시도는 이전 사고를 향한 도발이었고 회화의 관습에 대한 조롱이었다.

‘샘’은 결국 전시에 실패하고 뒤샹도 모르게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다행히 미국의 유명 사진작가인 앨프리드 스티글리츠가 소변기의 사진을 찍어 놓은 덕분에 뒤샹은 나중에 그 사진을 보고 다시 ‘샘’의 복제품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복제품 역시 행방불명되었다. 현재 전 세계 컬렉션 중 뒤샹의 서명이 새겨진 ‘샘’은 모두 15점으로 알려져 있다.

 

뒤샹이 평생 선정한 레디메이드는 ‘샘’을 포함해 대략 20여 개

뒤샹은 프랑스 노르망디의 작은 마을 블랭빌에서 태어났다. 1904년 10월 파리로 이주해 수련기를 거친 뒤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No.2’를 그려 1912년 9월 입체파들이 중심이 된 파리의 ‘앙데팡당전’에 출품했다. 그러나 그림은 주최 측에 의해 거부되었다. 그림 소재가 누드인 데다, 기계문명이 가져온 도시의 약동감과 속도감을 새로운 미로 표현하려는 미래주의 그림으로 읽힐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자 뒤샹은 미국으로 건너가 1913년 2월 17일 뉴욕에서 개막된 아모리쇼에 파리에서 거절당한 그림을 또다시 출품했다. 아모리쇼는 유럽의 아방가르드 미술과 미국의 현대미술을 소개하는 대규모 전시회였는데 30만 명의 관객이 몰려들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총 1,600여 점의 전시품 중에는 폴 세잔, 앙리 마티스, 파블로 피카소 등 유명 예술가들의 작품도 전시되었지만 그중에서도 화제를 불러일으킨 것은 뒤샹의 그림이었다. 관객이 도발적인 그의 작품을 보기 위해 장사진을 쳤으나 전문가들로부터는 악평과 호평이 교차했다.

뒤샹은 이후 사실상 그림 그리기를 중단하고 새로운 미술 양식에 몰두하다가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레디메이드’ 즉 기성품을 예술로 끌어들이는데 골몰했다. 미술사상 처음으로 제기된 레디메이드의 등장은 ‘미술품이란 무엇인가’하는 본질적인 질문이었다. 레디메이드는 2,000년 이상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미술의 오랜 전통을 무시하고 반기를 들었다는 데 그 의미가 있었다.

사실 뒤샹은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에 자전거 바퀴를 원형 철제 의자에 붙인 ‘자전거 바퀴’를 제작한 바 있다. 이 ‘자전거 바퀴’를 ‘20세기의 첫 레디메이드’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으나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제작한 것이 아니므로 “첫 레디메이드가 아니다”라는 반론에 더 힘이 실리고 있다.

1915년에는 눈을 치우는 눈삽의 손잡이를 천장에 매단 ‘부러진 팔 앞에서’ 제목의 작품도 만들었는데 눈삽에 ‘마르셀 뒤샹’이라고 이름을 쓰고 그 뒤에는 ‘작(作·by)’ 대신 ‘산(産·from)’이라고 적어놓음으로써 만든 것이 아닌 생각해낸 아이디어가 곧 작품이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뒤샹이 평생 선정한 레디메이드는 ‘샘’을 포함해 대략 20여 개가 된다. 이 작품들은 모두 뒤샹의 손을 거쳐 애초 갖고 있던 기능과는 상관없는 순수한 오브제로 새롭게 탄생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레디메이드는 사라지고 없다. ‘샘’조차도 파손되어 없으나 당시 찍어놓은 사진을 토대로 만든 ‘복제품’만이 남아 있다.

 

“미국의 문화라는 것이 변기와 교량밖에 없지 않는가” 항변

뒤샹이 프랑스를 떠나 다시 뉴욕으로 갔던 1915년 6월경, 뉴욕에는 이미 다다이즘을 일으킬 만한 토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뒤샹이 주도한 ‘뉴욕 다다’는 1916년 시작된 ‘취리히 다다’의 예술가들처럼 선언문을 발표하거나 조직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1923년까지 지속되었다. 뒤샹은 1917년 4월 ‘샘’의 출품을 거부당한 뒤 미술에 흥미를 잃고 1918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갔다가 1919년 6월 파리를 거쳐 그해 12월 말 다시 뉴욕으로 돌아갔다.

뒤샹은 파리에 체류하던 어느 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인쇄한 싸구려 그림엽서를 한 장 사, 모나리자의 얼굴에 수염을 그려넣고 아래에는 대문자로 ‘L. H. O. O. Q.’라고 적어 넣었다. 프랑스어로 발음하면 ‘그 여자는 뜨거운 엉덩이를 가졌다’라는 뜻으로, 뒤샹이 르네상스 대가의 작품에 감히 수염을 그려 넣고 지독한 농담을 보탠 것 자체가 극도의 다다적인 행위였다.

1923년 뒤샹은 1915년부터 작업해 온 ‘큰 유리’를 완성했는데 초현실주의를 이끌던 앙드레 브르통은 이 작품을 보고 “논리성과 비논리성이 가장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20세기 미술작품 중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뒤샹은 1923년 이후 예술가로서의 표면적인 활동을 중단하고 체스에 몰입했다. 체스는 뒤샹의 무관심적 자유를 실천에 옮기는 또 다른 방식이었다. 그는 프랑스어 교습으로 근근이 생활을 유지하면서 체스로 지적 에너지를 소모했다. 극장이나 레스토랑에 가는 대신 체스 클럽을 좋아했고 지속적으로 체스 경연대회에 참가했다. 세계체스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뒤샹은 차갑고 이지적인 사람이었다. 어떤 것에도 빠져들지 않기 위해 최대한 몸을 사렸다. 일이 생기면 그 일에 관여하지 않고 관망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그런 까닭에 예술에도 체스에도 그리고 사랑에도 모든 존재를 걸지는 않았다.

뒤샹에 대한 평가는 당대는 물론 1950년대 후반까지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서만 호평을 받았을 뿐 제도권 비평가들로부터는 괴짜이거나 실패한 예술가 혹은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과대평가되고 있는 인물”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그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1968년 10월 2일 세상을 떠난 후였다. 프랑스의 예술가들은 여전히 칭찬에 인색했지만 미국의 예술가들은 뒤샹을 전설의 예술가로 추앙했다. 그의 등장이 프랑스의 미술에 비해 자신들이 열등하다고 생각해온 미국 예술가들에게 확실한 이정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