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러시아 스보보드니 체스노코프역의 급수탑. 한인 독립군 부대가 소비에트 적군의 무장해제 명령을 거부하며 마지막 항전을 벌인 곳이다. (2018년 1월 이희용 촬영)
by 김지지
1917년 11월 러시아혁명 후 시작된 적군(볼셰비키 군대)과 백군(반혁명 군대) 간의 러시아 내전은 1920년 무렵 사실상 적군의 승리로 기울었다. 따라서 러시아혁명의 안착을 방해하기 위해 러시아에 발을 들여놓은 열강의 군대도 1920년 여름까지 대부분 러시아에서 철수, 시베리아 지역은 그럭저럭 안정을 찾아갔다. 그러나 일본만은 극동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에 그대로 눌러앉고 있어 볼셰비키 혁명 세력에게는 여전히 골칫거리였다. 분통이 터졌지만 힘이 열세였던 탓에 일본이 스스로 물러나 주기만을 기다리며 전략상 완충지대 역할을 해줄 ‘극동공화국(원동공화국)’을 1920년 4월 수립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최대 비극 사건
그 무렵 러시아의 극동 지역에는 수십 개의 크고 작은 한인 독립군 부대가 있었다. 이들은 레닌의 볼셰비키 정권이 그동안 피압박 민족의 해방운동에 지지와 성원을 보내온 터라 러시아 적군 편에 가담해 백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그 중에는 한인보병자유대대도 있었는데 이 부대는 극동공화국 정규 부대 소속으로 편성되었다가 1920년 9월 독립하긴 했지만 사실상 러시아 적군의 정규군이나 다름없었다. 부대 지휘자 오하묵은 러시아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차대전에도 러시아군으로 참전했던 귀화 러시아인이었다.
그 무렵 러시아 적군은 극동공화국 내 아무르 주의 알렉세예프스크를 점령한 뒤 도시 이름을 ‘자유’라는 뜻의 스보보드니(자유시)로 바꾸어 해방구를 선포했다. 연해주나 동시베리아에서 활동하던 한인 빨치산 부대들은 정세가 러시아 적군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극동공화국도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자 자유시로 집결했다. 박일리아의 니항부대, 김표돌의 이만부대, 최니콜라이의 다반부대 등이었는데 그중 대표 부대는 니항부대였다.

한인 부대가 속속 자유시로 집결하자 그곳에 터를 잡고 있던 오하묵이 일방적으로 한인 빨치산 부대를 한인보병자유대대에 편입시켜 힘의 우위를 자랑했다. 그러던 중 1921년 1월 박일리아의 니항부대와 오하묵의 한인보병자유대대의 지위가 역전되는 일이 벌어졌다.
극동공화국 정부가 이동휘 등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요청을 받아들여 니항부대를 사할린의용대로 확대 개편한 후 한인보병자유대대 등 자유시에 집결한 모든 한인 부대를 사할린의용대의 지휘를 받도록 한 것이다. 당시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는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각각 한인 사회주의 정당의 대표성을 주장하며 각축전을 벌였는데 한인보병자유대대는 이르쿠츠크파, 사할린의용대는 이동휘의 상해파와 보조를 맞췄다.
만주 북간도에서 활동하던 우리 독립군 부대가 국경을 건너 러시아 땅에 도착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독립군 부대는 1920년의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로 일본군에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주었으나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밀려 1921년 1월 흑룡강을 넘어 러시아령 이만에 집결했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 안무의 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군 등 북간도에서 활동하던 우리 독립군이 국경을 넘을 수 있었던 것은 이동휘와 극동공화국 정부 사이에 이뤄진 사전 교섭의 결과였다.

극동공화국 정부는 이들 독립군 부대를 이만에서 자유시로 이동하도록 했다. 이 조치에 의심을 품고 북만주로 되돌아간 김좌진 부대 등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독립군 부대는 1921년 3월까지 자유시로 이동했다. 이미 자유시에 모여있던 니항부대, 이만부대, 다반부대원들과 합치면 총병력이 3,000여 명을 헤아렸다.
사망 272명, 익사 31명, 행방불명 250여 명, 포로 917명 (피해자 측 주장)
극동공화국의 지원 덕에 자유시에서 주도권을 쥐게된 사할린의용대는 북간도 독립군 부대와 시베리아 빨치산 부대를 포함한 모든 조선인 부대를 자유시로부터 서북쪽 70마일에 위치한 마사노프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한인보병자유대대만은 이를 거부하며 시간을 끌었다.
그러는 사이 사할린의용대와 한인보병자유대대의 지위가 또다시 역전되는 일이 벌어졌다. 코민테른 결정에 따라 극동공화국 내 이르쿠츠크에 설치(1921.1)한 동양비서부의 슈미야츠키 부장이 모든 한인 독립군 부대를 통합해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군대인 고려혁명군정의회를 창설하기로 하고 그 전 단계로 1921년 4월 러시아인 갈란다라시윌린을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 의장으로, 오하묵을 부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이다.

오하묵은 1921년 4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결정을 사할린의용대에 전달하면서 모든 한인부대들은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할린의용대가 따르지 않았다. 1921년 5월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정식으로 발족하자 갈란다라시윌린 의장과 오하묵 부사령관이 600여 명의 고려혁명군정의회 군대를 이끌고 6월 6일 자유시에 도착했다.
이 역전 현상에 홍범도의 한국독립군과 안무의 국민회군은 고려혁명군정의회 소속으로 들어간 반면 김표돌의 이만부대,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등은 고려혁명군정의회에 합류하지 않고 사할린의용대와 함께 행동했다. 그러자 갈란다라시윌린과 오하묵은 사할린의용대 등을 무장해제하기로 결정하고 1921년 6월 28일 새벽 총공격을 감행했다. 공격 지점은 자유시 중심부에서 3㎞ 떨어진,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통과하는 수라세프카역(현재의 체스노코프역) 부근이었다.

독립군의 항일 의지 꺾어놓고 볼셰비키 이미지 바꿔놓아
당시 고려혁명군정의회 소속 군대는 정규 군사훈련을 받은 정규군이었기 때문에 승패는 사실상 정해져 있었다. 고려혁명군정의회에 가담한 우리 독립군 부대는 이 공격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사할린의용대 등은 오하묵의 자유대대가 적극 가담한 이 ‘자유시 참변’(일명 ‘흑하 사변’)으로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사할린의용대는 뒤편으로 퇴각해 제야강을 건너 도망치는 과정에서 또 다시 많은 익사자를 냈다.

이 사건은 경위도 복잡하고 피해 상황에 대한 보고도 일치하지 않아 정확한 실상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가해자 측인 고려혁명군정의회 측에서는 사망 36명, 행방불명 59명, 포로 864명이라고 주장한 반면 만주의 항일단체들이 연명한 성토문에는 사망 272명, 익사 31명, 행방불명 250여 명, 포로 917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사건으로 독립군 세력이 크게 위축된 것은 물론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둘러싸고 고려공산당 내분이 격화되었다. 코민테른은 이후 소련(러시아) 내에서 한인들의 독자적인 조직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지휘 체계에 편입시켰다. 이로써 소련에서의 자생적 사회주의 독립운동은 막을 내렸다. 이르쿠츠크파는 군권을 차지하려고 외세의 힘을 빌려 아군을 공격했다는 점에서 민족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선인들끼리 벌인 군권 쟁탈전으로 조국의 해방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자원한 수백 명의 독립군 전사들이 이국땅에서 참혹하게 죽어간 ‘자유시 참변’은 독립군의 항일 의지를 무참히 꺾어놓았고 독립군의 지원 세력으로 알고 있던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이미지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현재 러시아 아무르주의 스보보드니 외곽 소벳스키 마을에는 사람 키만 한 높이의 오석(烏石) 빗돌이 서 있다. 앞면 왼쪽에는 ‘다시는 우리끼리 싸우는 일이 없기를…’이란 문구가 한글로 쓰여 있고 가운데와 오른쪽엔 한자와 아라비아 숫자로 ‘西歷(서력) 1921. 06. 28’과 ‘黑江(흑강) 自由市事件(자유시사건) 獨立軍殉絶地(독립군순절지)’라고 각각 새겨놓았다. 아래쪽에는 러시아어로 ‘1921년 이 땅에서 희생된 한인 빨치산 잠들다’라고 적혀 있다.
